"광주항쟁 3~4일 전, 광주에 있던 미국인 시민권자 전부를 대피시키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미 국방성의 지시였다. 대피 명령이 나온 건 광주뿐이었다. 미국은 광주항쟁 발발 이전에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17일,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미육군 501정보여단 광주파견대에서 근무했던 김용장 전 군사정보관의 추가 증언이 나왔다.
전남대에서 최초 충돌이 일어난 1980년 5월 18일 이전, 이미 미 국방성의 미국인 대피 지시가 있었다는 김용장 전 정보관의 증언은 당시 미국이 사전에 신군부의 움직임을 포착했다는 걸 보여주는 주요 단서다. 특히 한미관계를 규정하는 한미방위협정 등에 의거해 살펴보았을 때 신군부의 작전에 대한 미국의 승인이나 묵인, 방조로 해석될 수 있다. 당시 미국의 역할에 대한 규명작업에 힘이 실릴 것으로 보인다.
김용장 전 정보관은 지난 13일 특별기자회견을 통해 "5.18은 계획된 시나리오"였다며 △ 80년 5월 21일 전두환의 광주 방문 목적은 '사살명령'이다 △ 시민위장 남한 특수군(편의대)을 격납고에서 직접 목격했다 △ 북한군 광주 침투설은 전두환이 날조한 것 등을 증언한 바 있다.
김 전 정보관은 이날 <오마이뉴스>와 통화에서 "미국이 신군부의 계획을 사전에 알고 광주에 있는 미 시민권자만 피신시켰다"고 말했다.
"미 국방성에서 연락이 온 건 광주항쟁(5.18) 3~4일 전의 일이다. 이후 광주에 거주하는 미국 시민권자들을 철수시켰다. 이후 광주 소재 모든 미국 시민권자들을 대피시켰는데, 모르몬교 선교사 12명은 상무대에 있던 계엄군들에 막혀 대피하지 못했다. 이때 광주파견대로 나와 있던 나는 미 국방부의 추가 명령을 받았다. 현장에 주둔한 미군부대를 통해 빨리 이들 모두를 대피시키라는 것이다. 나와 부대요원들은 상황실 차(지프차)를 끌고 약 두 차례에 걸쳐 남은 이들을 모두 피신시켰다."
- 구체적인 날짜는 언제인가.
"25일에 모르몬교 선교사들을 광주 외곽으로 철수시켰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우리 부대에서 직접 계엄사 측과 몇 차례 연락했다."
- 당시 내려진 대피명령은 광주 소재의 미국 시민권자만이었나.
"그렇다. 광주에 있는 미국 시민권자만 대피시켰다. 자국민 보호 차원에서 광주 항쟁 발발 이전에 대피시켰다. 미국은 5.18 이전에 그 내용을 파악하고 있었다. 미국이 사전에 보고를 받았다는 건 국내 기록물로도 남아 있을 것이다."
5.18 당시 보안사령부 505보안대 특명부장이었던 허장환씨도 "신군부가 독자적으로 광주에 병력을 투입한 사실을 알면서도 미군이 이를 방관했다"고 추가 증언했다.
"한미방위협정에 의하면 모든 병력의 이동은 한미연합사의 사전 협조를 구하게 돼있다. 한국 내 전투병력은 협정상 한미연합사의 허가를 받고 이동해야 한다. 하지만 예비군과 공수특전부대(공수특전단)는 예외다. 80년 당시 미국이 사전에 광주에 공수특전단이 투입된 사실을 알았더라도 제어하지 못한 이유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다. 이후 광주에 20사단이 투입된다. 20사단 병력 이동은 협정 규정상 미국의 동의를 받아야만 한다. 하지만 외교적으로 어떠한 제재도 없었다. 방관한 것이다."
비슷한 증언은 2002년 5월 18일에 열린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규명하는 5.18 시민법정'에서도 제기된 바 있다. 당시 시민법정 검사단은 확보한 문서를 근거로 "미국은 신군부가 군대를 동원해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강경하게 진압할 것을 알았다"라며 "그런데도 한미연합사령관의 한국군 해병 1사단, 보병 20, 26, 30, 33사단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에게 이양하는 방법으로 신군부에게 계엄실시에 필요한 병력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