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중학교를 마친 노회찬은 1972년 봄 부산고등학교에 입학시험을 쳤다. 그런데 의외로 낙방이었다. 초중학교에서부터 반에서 1,2등 하던 그였다. 부산고는 부산 중학생 한반 60명 중 1등부터 45등까지 평균적으로 합격하던 것이 관례처럼 되었는데도 그가 떨어졌다. 주위에서는 일부러 떨어졌다고 수군거렸으나 사정은 달랐다.
시험을 치기 며칠 전에 심한 감기에 걸려 독하게 지은 약의 후유증으로 체육 실기는 물론 필기시험 시간에 정신을 잃다시피 하여 시험을 망친 것이다. 학우들은 평소 노회찬이 자기는 경기고등학교에 갈 거라고 장담해서, 일부러 떨어진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노회찬이 경기고를 가야 한다고 작심한 것은 부모 곁을 떠나고 싶어서였다고 회상한다.
"사춘기 때여서, 부모님하고 죽 떨어지고 싶었어요. 왜냐면 집이 가까워서 초등학교를 걸어서 다녔어요. 중학교는 초등학교와 더 가까운 곳에 있었어요. 내가 부산고등학교를 가게 되면 부산고등학교는 중학교와 운동장을 같이 쓰는, 그러니까 미칠 거 같은 거예요. 고등학교 3년을 부산에서 부모님 아래서 초등학교보다 더 가까운 곳에 다닌다고 생각하니까 끔찍했던 거예요. 경기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나갈 수 있는 명분이 서울 가는 거였으니까. 그래서 경기고등학교에 가고 싶었는데 집에서 못 간다니까 난 포기한 거고. 가려고 일부러 떨어진 건 아닌데 하여튼 그렇게 됐어요. (주석 6)
세상사는 가끔 우연이 필연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재수하여 부산고등학교에 가기도 쪽팔리는 일이고 하여, 부모는 아들이 서울에 가서 재수하는 데 동의하였다. 공부를 잘했던 누나가 경남중학을 졸업하고 경기여고를 지원할 때에는 한사코 반대했던 부모가 아들의 '감기약' 사건으로 서울행을 허락한 것이다.
그게 내 인생에 가장 큰 전환점이 된 거죠. 지금도 생각하면 내가 아마 부산에 있었으면 이 길에 안 들어섰겠죠. 부산에 있었으면 반항심은 극대화되었을 거 같고, 친구들과 어울려서 이상한 길로 빠졌을 가능성도 매우 높아요. (주석 7)
서울에 온 노회찬은 종로의 대성학원에 다니면서 재수를 한다. 학원에서는 1등 하는 학생에게 매달 2만원가량의 학원비를 면제해주었다. 그는 졸업 때까지 학원비를 면제받고, 집에서 보내준 학원비는 영화를 보거나 책을 샀다. 그때 산 책이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와 월간지 『다리』, 『씨알의 소리』, 『사상계』 등 진보적인 책이고, 『중국공산당사』도 포함되었다. 재수 시절에 이런 책들을 읽을 정도로 그는 조숙한 청년이 되었다. 영화를 좋아하여 개봉영화는 빼놓지 않았다.
갈 데가 없고 혼자였으니까 책방에 많이 갔어요. 그때는 교보문고도 없을 때였고, 아, 광화문에 범우사가 있었고, 종로서적은 고1 때부터 갔고요. 학원이 광화문에 있었기 때문에 그 범주를 많이 안 벗어났어요. 그때 알게 된 책이 『다리』라는 잡지였는데 그걸 매개로 해서 조금 조금씩 넓혀간 거예요. 그거 보니까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 10월 유신, 10월 유신이 내가 재수할 때였어요.
너무 놀라서, 그때 시험문제에 자주 나오던 일이었기 때문에, 대통령제에서 국회해산은 안 된다. O냐 X냐, 이런 거. 국회 해산했다고 라디오에서 들리니까 집에 와서 책 찾아보고, 내가 알던 대로라면 국회해산을 할 수 없다고 되어 있는데, 방송에선 방금 들었고, 그래서 국회로 갔죠.(주석 8)
노회찬이 재수를 하고 있던 1972년 10월 박정희가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국회를 해산하고 언론을 통제하면서 한국식 총통제를 만들었다. 학원의 시험문제에는 대통령이 국회를 해산시킬 수 없다는 것인데, 뉴스는 해산했다고 보도했다. 궁금해진 그는 광화문에서 버스를 타고 여의도에 가서 국회 앞에 탱크가 진주하고 사람들의 출입이 통제된 실태를 직접 지켜보았다. 충격이었다.
6살 때 겪은 5ㆍ16쿠데타는 그것이 무엇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나이였고, 초등학교 때부터 들어서 머리에 박힌 '대통령 박정희'는 조선시대의 왕(임금)처럼 인식되었는데, 17살 재수생의 눈에 비친 유신쿠데타는 실체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동안 접했던 『다리』,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그리고 얼마 전에 폐간된 『사상계』의 책갈피에서 읽은 지식으로 눈이 트인 것이다.
노회찬의 독서 범위는 날로 넓어졌다. 『서양철학사』를 탐독하고 이어서 각종 사상서를 읽었다. 학원 공부는 뒷전이고, 많은 교양서적을 탐독했다. 그런데도 매달 치른 시험은 1위를 유지하였다.
주석
6> 앞의 책, 42쪽.
7> 앞의 책, 43쪽.
8> 앞의 책, 44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진보의 아이콘' 노회찬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