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중심인 종로는 수많은 예술인들이 600여 년 동안 문화의 역사를 일궈온 유서 깊은 도시입니다. '종로의 기록, 우리동네 예술가'는 종로에서 나고 자라며 예술을 펼쳐왔거나, 종로를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하는 이 시대의 예술인들을 인터뷰합니다.[편집자말] |
원장현 대금 연주가가 들려주는 선율에 귀 기울이면, 탁해진 마음이 정화되면서 처연한 슬픔이 마음에 잔잔히 내려앉는다. 감정의 변곡점을 따라 명상에 다다르면, 어느새 너른 자연의 품이 펼쳐진다. 그의 음악이 피와 뼛속을 타고 흐르는 한국인의 원형에 맞닿는 길임은 이 지점에서 분명해진다.
'원장현류 대금산조'의 창시자로서 독보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한 것은 물론, 활발한 연주활동과 후학양성을 통해 국내 전통음악계의 발전에 헌신해온 그를 지난 5월 7일, 금현국악원에서 만났다.
오직 한 뜻으로 걸어온 길
"고향이 대나무가 많기로 유명한 담양이고, 집 부근으로 대밭이 펼쳐져 있다 보니 그 속에서 태어났다고 봐야죠.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이 대나무고, 아버지 대금소리를 들으면서 자랐으니 대금을 손에 쥐게 된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죠."
대나무의 고장이라 할 수 있는 전남 담양을 고향으로 둔 데다, 대금 연주자였던 부친과 중요무형문화재 거문고산조 보유자였던 숙부, 가야금산조의 명인이었던 고모의 영향을 받은 그는 이른 나이부터 대금을 가까이하게 된다. 온몸으로 받아들여 흠뻑 취해 버렸기에 다른 길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김용기, 오진석, 김동진 같은 명인을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구했다.
"사람들은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어서 일찍부터 준비했다고들 하는데, 제가 국악을 시작하던 시기만 해도 한국 경제가 참 어려웠어요. 예술로 먹고살 수 있다는 건 꿈도 못 꿀 상황이었고요. 대금이 좋다는 마음 하나로, 초지일관(初志一貫) 해온 거죠.
제가 후학들에게도 항상 강조하는 것이 '예술은 상품이 아니기 때문에 절대 욕심이 앞서면 안 된다'는 거예요. 성공하겠다, 명예를 얻겠다는 계산을 앞세우지 말고,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거죠.
저는 대금과 한길을 걸으면서 그 흔한 원망이나 후회 한 번 해 본 적이 없어요. 당시에는 번듯한 레슨실이 있던 것도 아니고, 선생님이 정확하게 수업 시간을 지켜주는 법도 없었죠. 그렇지만 셋방살이할 정도로 어려운 환경에서도 제자가 왔다고 밥 먹여주고, 무료로 전수해주시고 하셨어요. 옛 선생님들은 정말 따뜻하셨죠."
그중 한일섭 선생은 그의 대금 인생에 있어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 선생은 13세 때 '소년명창'으로 불릴 정도로 판소리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고법(鼓法)에도 특출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아쟁 산조와 태평소 시나위(무속음악에 뿌리를 둔 즉흥 기악합주곡 양식의 음악)를 만들었을 정도로 민속음악의 귀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산조라는 음악의 모체가 판소리라고 보면 되거든요. 판소리의 좋은 가락을 거문고면 거문고, 대금이면 대금, 가야금이면 가야금, 이렇게 악기 특성에 맞게끔 만든 것이 오늘날의 산조란 말이에요. 또 어린 시절에 대금 산조의 창시자인 박종기 선생님이 대금 부는 소리를 들으면서 성장한 덕분에 대금연주자는 아니었지만, 대금에 대해 훤히 꿰뚫고 계셨죠. 때문에 구음(口音)으로 소리의 원리를 정확히 알려주실 수 있었던 겁니다.
그분이 얼마나 천재적이었냐 하면은, 우리가 제대로 녹음된 카세트테이프도 구하기 힘들 때, 일본에 녹음기 두 대를 가지고 가서 한쪽에 장구를 먼저 쳐서 장단을 만들어놓고, 그걸 틀어놓고 거기 맞춰서 다른 소리를 녹음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지금 그런 귀중한 자료가 다 남아서 후학들에게 교재로 쓰이고 있는 거예요.
제가 선생님 댁에 가르침을 청하러 찾아뵈었을 때는 이미 건강이 많이 악화된 상태셨어요. 그때 반갑게 맞이해주셨던 것이 아직도 눈에 선해요. 매일매일 근 한 달 동안 아침부터 해 넘어갈 때까지 선생님 곁을 지키면서, 10년 이상 걸쳐서 배울 수 있을 만한 것들을 모조리 흡수했죠. 당신의 온 생에 걸쳐 축적한 요체(要諦)를 저한테 다 쏟아 붓고 가신 것 같아요.
몇 달 안 돼 돌아가실 분께 저처럼 집중적으로 배운 사람은 흔치 않을 거예요. 제 욕심이 앞선 것 같아 송구스럽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선생님께서 이룩한 결실을 이어받아 후학에게 전할 수 있기에 잘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새로운 음악세계를 열다
한일섭 선생의 귀중한 가르침을 새기면서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 그는 1982년에 열린 제8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기악부문에서 최연소로 장원을 차지하게 된다. 이후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단원이 되나, 처음에는 아쟁으로 시작해 거문고로 바꾸어 단원생활을 이어나갔고, 시간이 흘러서야 자신의 전공인 대금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이는 그가 대금을 왼쪽으로 잡고 부는 왼손잡이라는 점 때문에 무대에 세울 수 없다는 보수적인 편견이 작용한 탓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그는 아쟁과 거문고에도 조예가 깊은 음악가로 거듭날 수 있었다.
국립국악원 연주자로 활동하면서 그는 그동안 미뤄왔던 학업을 병행하며, 고등학교와 대학 과정을 거쳐 쉰 살의 나이에 중앙대 대학원을 마치게 된다. 학구열을 불태우며 꾸준하고 충실히 쌓아올린 음악세계는 1985년 국립국악원의 무형문화재 제66회 공연에서 베일을 벗는다. 서른다섯의 나이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원장현류 대금산조'를 발표한 것은 지금까지 회자될 정도로, 파격 그 자체였다.
"스스로 유파(학계나 예술계에서, 생각이나 방법 경향이 비슷한 사람이 모여서 이룬 무리 - 편집자말)를 발표하는 경우는 통상 원로의 위치에 있거나, 사후에 행하는 게 일반적이었어요. 그런데 살아 있는 사람 최초로, 제 이름을 딴 대금산조를 발표해 버렸으니 파장이 상당했죠. 응원해주는 분들도 계셨지만, 건방지다는 평이 많았어요. 젊음의 패기였다고나 할까요? 용감하기 짝이 없었죠. 그게 왜 위험하나면, 상품에 비유했을 때 '류'라는 게 붙으면 하나의 상표나 다름없잖아요. 그런데 만약 전공자들이 이걸 배우지 않겠다고 하면, 그저 의미 없는 시도로 그치고 말기 때문이죠."
당시 공연은 성황을 이뤘고, 서울대학교 국악과에서 원장현류를 전공하는 학생도 생기면서 세간의 우려는 불식됐다. 이후 원장현류를 강의하는 교수도 7명 넘게 배출됐고, 현재 전국 대부분의 대학에서 원장현류를 강의하고 있다. 대담한 시도가 있었기에 그의 음악이 더욱 널리 퍼져나가면서 단단히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셈이다.
스스로가 이룩한 음악의 세계를 정리하면서 대금의 선율을 더욱 널리 알리기 위해 1991년에 첫 음반 <원장현류 대금산조>를 발매한다. 특히 대금을 칭하는 순우리말 젓대를 붙여넣은 '젓대소리 한'은 오랫동안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은 대표곡으로 꼽힌다.
"40대에 낸 음반인데 긴 산조를 한바탕 넣고, 거문고와 박종선 선생의 아쟁을 병주(倂奏)로 넣었죠. 처음으로 한 시도인 만큼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셨어요. 이 곡을 들으면서 사람들은 '대금하는 분과 거문고 하는 분이 호흡이 참 잘 맞는다!'고들 하는데 제가 직접 거문고도 연주하고, 대금을 더빙해 합친 곡이에요. 특히 '젓대소리 한'은 방송에서 나오면, 다시 틀어달라는 요청이 쇄도할 만큼 인기가 많았죠. 60년대 말에 여성국극단 효과음악으로 많이 쓰이기도 했어요."
이후 1998년에 발매된 <날개>와 2001년에 발매된 <항아의 노래>는 여전히 스테디셀러로서 사랑받고 있다. 이 음반의 음악들은 모두 그가 직접 작곡하여 녹음했다는 점에서 다채롭게 확장된 그의 음악세계를 엿볼 수 있는 결과물이라 할 만하다.
(*
②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