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귀족'들의 틈새에서 서민정치인 노회찬의 행보는 힘겹고 외로웠다.
당초 그는 15개 국회 상임위원회 중에서 재경위를 희망했다가 같은 당 의원에게 양보하고 두 번째로 정무위원회 배치를 원하여 전문 보좌진을 채용하는 등 준비하였다.
그런데 법제사법위원으로 배속되었다. 의원들은 15개 상임위를 통과한 모든 법률안이 최종적으로 법사위의 심의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일거리만 많고 '실속'이 없는 법사위를 기피하였다. 의원들의 두 번째 기피 상임위는 국방위원회다.
당세가 약한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거대 정당 소속의원들이 우선적으로 차지하고 남은 자리에 배치되었다. 그가 법사위에 배치된 사유다. 뒤에서 다시 쓰겠지만 그가 '삼성 X파일 사건'을 폭로하고 의원직을 박탈당하게 된 것도 법사위에 배치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노회찬은 법사위에서 맹활약하였다.
여당인 열린우리당 8명, 제1야당인 새누리당 6명이고, 대부분 법조인, 또는 법대 교수 출신들이었다. 서로가 이리저리 맥이 닿는 관계였다. 그만이 비법조인 출신이었다.
2004년 10월, 제17대 국회 첫 국정감사를 하던 중에 감사를 받던 고등법원장 한 분이 나를 추켜세우는 발언을 했다.
"노회찬 의원은 법조인 출신이 아닌데도 법률과 법무 행정에 대해 해박하시고…"
한쪽 귀로 흘려들어도 될 의례적인 발언이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바로 받아치며 말했다.
"저를 법조인 출신이 아니라고 하시는데 섭섭한 말씀이다. 저도 다년간 법무부의 보호와 관찰하에 고락을 함께한 법조인입니다."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주석 1)
국회 법사위에서 노회찬은 '고독한 맹장'이었다.
국정조사 피감기관인 법원이나 검찰청의 감사장에 가면 대부분이 법조계 선후배들 사이 또는 사법연수원 동기이거나 선후배 관계였다. 아무리 여야로 갈리지만, 이같은 '한국적 연고주의'는 선공후사(先公後私)가 뒤바뀌는 경우도 없지않다.
뒷날 박근혜 정부에서 일어난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의 원인은 사법 수장의 정의롭지 못한 행위에서 기인하지만, 따지고 보면, '한국적 연고주의'에 뿌리하고 있음을 알게된다. 사법부를 감시하고 감독하면서 '사법정의'를 확립시켜야할 국회법사위원들의 직무태만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노회찬은 17대 초선의원 4년을 법사위에서 보냈다. 그에게는 '연고'나 '정파' 따위가 통하지 않았다. 소신과 정의의 원칙만이 작동할 뿐이었다. 그래서 거칠 것이 없었다.
가고 싶지 않은 법사위에 배치된 뒤 대체 인력마저 없어 4년을 내리 붙박이로 지냈지만, 나는 나 자신의 존재 이유를 '새로운 시각'에서 찾았다.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국민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사법 현실에서 법과 정의의 문제를 다루는 데에는, 이제 전혀 새로운 시각과 접근이 필요했다.
법관, 검사가 아니라 피고인, 피의자의 처지에서 사법 현실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절실했다. 법의 지배하에서 살아가는 많은 국민들이 느끼는 법 감정을 대변하는 게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주석 2)
그는 다짐하고 또 다짐하면서 성찰과 자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주석
1> 노회찬, 『노회찬과 삼성X파일』, 12쪽, 이매진, 2012.
2> 앞의 책, 12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진보의 아이콘' 노회찬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