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0월, 성균관대학교 인문사회과학캠퍼스에서는 학생총투표로 총여학생회(아래 총여)가 폐지되었다. 하지만 기구의 존폐와 상관없이 대학의 여성들은 여전히 이곳에서 하루하루를 '살아남고' 있고, 내가 속한 여성주의 모임 역시 혐오 발언이나 조롱에 노출되거나, 대자보가 훼손되거나 도난 당하는 일이 일상이다.
무엇보다 문제는 이것이 학내 익명 커뮤니티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학교와 학생회 주도로 이어지고 있다는 데 있다.
교직원이 페미니즘 대자보를 떼다
3월 4일, 지난해 총여 재건 투쟁을 주도했던 '성균관대 성평등 어디로 가나'는 3‧8 여성의 날 기념 대학 페미니스트 행진의 참가를 독려하는 대자보를 게시했지만, 하루만에 무단 철거됐다. '버닝썬 게이트'가 시작됐을 무렵 게시했던 '악마를 양산하고 용인해온 사회를 바꾸자'라는 대자보 역시 그랬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 형사로부터 "CCTV 보니 범인이 학교 교직원이라 형사처벌이 불가합니다. 잘 얘기해 보세요"라는 전화를 받았다. 게시 주체와 기한이 명시되어 있었는데도 학교가 학생의 대자보를 무단으로 철거한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도 총학생회는 '대자보 규제 강화'를 학교에 요청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이행 중이다.
문과대 여학생위원회 교육 막은 학생회
올해 초, 제49대 문과대 학생회 'Sun-Shine'(아래 문과대 학생회)은 매년 새내기 새로배움터(이하 새터)에서 여성주의 교양을 진행해온 문과대 여학생위원회(아래 문여위)를 일방적으로 불참시켰다.
인권센터 소장의 강연으로 대체하는 것이 더 '전문적'이라는 게 근거였지만, 5년 동안 문과대 새터 '반 성폭력 교양'을 도맡아온 문여위보다 이 새터에 처음 가보는 심리학 박사 학위 소지자 중 어느 쪽의 경험을 전문성으로 인정할 것인지는 논의되지 않았다. 과별로 성평등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자치적으로 시행해온 '여성주체' 제도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심지어 지난 4월 9일, 문과대의 최고 의결기구인 문과대 학생대표자 회의(이하 문학대회)에서는 여학생 기구인 '문여위'의 필요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결국 이 자리에서 문여위는 문과대 공식 기구로 재인준받지 못했다.
나는 이날 문과대 소속 학생으로 참관하여 문여위의 성폭력 사건 처리 과정에서 도움을 받은 경험과 새터 '반 성폭력 교양'을 듣고 안전함을 느꼈던 기억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표결 결과는 참석 대의원 25명 중 3명 찬성, 5명 반대, 17명 기권으로 문여위 인준안은 부결되고 말았다.
이제는 여학생휴게실마저?
사건은 문여위가 성균관대 유일의 여학생 기구라는 지위를 박탈 당한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지난달 28일, 문과대 소속 학과 학생회장단이 모이는 회의인 단위운영위원회(아래 단운)는 그동안 문여위가 관리해 오던 여학생휴게실 '여끔'의 용도변경을 의결했다.
다산경제관 지하1층에 위치한 '여끔'은 학교에서 관리하는 여타의 여학생휴게실과 달리 페미니즘 도서 대여사업과 월경용품 제공, 저녁 세미나실 대여사업 등 자치공간으로서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문학대회 이후 문과대 학생회는 문여위에 위임했던 관리 제반 업무를 인수하기로 구두 약속했었다. 용도변경 결정은 이 약속을 무시한 것이었다.
용도변경에 대한 학생들의 의견은 익명의 '구글 폼' 설문조사 한 번을 통해 수렴되었다. 그런데 문과대 학생회는 지난 5월 31일 성명서를 통해 "(설문조사에서) 다수가 현행유지를 희망했다"라고 밝히면서도, '학칙으로 인한 용도 변경이 불가피한 상황'임을 강조하며 '여끔'의 공간을 개편하겠다고 밝혔다. 이들이 근거로 든 학칙은 다음과 같다.
<교내 학칙 중 사무분장 규정>
제2장 3절, 제8조 5항 : 학생지원팀은 학생 복지 종합계획 수립 및 운영을 분장한다.
제2장 3절, 제8조 10항 : 학생지원팀은 여학생 지원에 관한 사항을 분장한다.
여학생휴게실이 '학생 복지 종합계획', 그 중에서도 '여학생 지원 사항'이기 때문에 관리 주체가 학생지원팀이 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그동안 자치공간으로서 운영되던 여끔에 왜 갑자기 위 규정이 적용되어야 하는지 문과대 학생회는 설명하지 않았다.
문과대 학생회는 "용도를 변경하지 않을 시, 실사용주체가 문과대인 해당 공간이 학교, 즉 학생지원팀/관리팀으로 관리 주체가 넘어가게 된다"며 해당 공간을 자치공간으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기에 용도 변경을 해야 된다"고 밝혔을 뿐이다.
지금까지 학생자치의 영역으로 인정되어 오던 공간을 난데없이
학교가 빼앗겠다는 주장에 당황한 몇몇 학생들은 지난 3일, 사실 확인을 위해 직접 학교 학생지원팀(아래 학지팀)을 방문했다.
문과대 학생회의 설명이 사실이라면 이는 학교 측의 부당한 학칙 해석이자 학생자치에 대한 월권이었다. 그런데 공식적으로 면담 신청을 하고 만나본 학지팀 과장의 입장은 사뭇 달랐다.
"아직까지는 문과대 학생회에서 학생자치공간으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 용도에 대해서 학생들 의견 모아서 그렇게 사용하겠다고 하면 저희 입장에서는 그 부분까지 나서서 '아니야 우리가 쓸 거야'라고 할 생각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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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 학지팀 여끔 관련 면담 녹취록 문과대 학생회의 입장문에 의문을 가진 학생들이 6월 3일 학교 학지팀을 방문해 정식으로 면담을 진행했다. 영상 속에서 학지팀 과장은 분명하게 휴게실이 학생자치공간에 해당하며, 이대로 유지되어도 공간 관할이 변동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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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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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자치공간의 영역에 휴게실이 포함되느냐고 추가 질의했을 때에도, 그렇다고 답변했다. 여학생휴게실이라는 기존의 용도가 유지되더라도 관여하지 않을 생각이라는 것이 면담의 요지였다.
이에 면담에 자리했던 학생들은 문과대 학생회의 지난 4일
'여끔 관련 긴급 간담회'에 참석하여 학생회의 입장문 중 "용도 변경이 불가피한 상황"이라는 서술이 거짓이었음을 지적하고 해명을 요구했다.
그러자 문과대 회장단 중 한 명이 간담회장 밖으로 나가 누군가와 통화를 한 뒤 "확인 결과 여끔 유지는 어쨌든 학칙 위반"이라는 주장만 반복했다.
학생 자율권을 추구하지 않겠다는 학생회
간담회 이후 문과대 학생회가 지난 14일 새로 발표한 입장문에는 또 다시 "학칙에 의거하면 '학생 휴게실'에 대해 학생회는 관리 주체가 될 수 없는 실정"이라는 문구가 등장했고, "저희는 학칙을 위배하면서까지 자율권을 맹목적으로 추구할 수는 없습니다"라는 다소 황당한 견해마저 포함되었다.
심지어는 문과대 학생회의 사과를 촉구하는 개인 명의의 대자보에 대해 "자명한 사실을 왜곡하며 근거 없이 폄훼하는 허위 사실 유포와 원색적인 비난을 강하게 규탄"한다고 밝혔다.
만약 문과대 학생회의 주장대로 학교가 학생자치공간을 빼앗으려 한다 해도, 설득·협상하거나 때에 따라 학생들의 권리 보장을 위해 앞장서야 할 학생회가 이를 '맹목적인 학생 자율권 추구'로 판단한 것이다.
학교와 학생회가 학생들을 거짓말쟁이로 몰다
공식적인 입장문에 의해 '거짓말쟁이'가 된 학생들은 다시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지난 19일 학지팀을 찾았다. 그런데 학지팀 과장의 태도가 돌변해 있었다. 그는 문과대 학생회의 입장문에 쓰인 문장을 그대로 구현하면서 지난 면담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다.
학지팀: "7월까지 문과대 학생회 의견 기다리고요. 그 이후에 없으면 저희가 임의로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학생휴게실로 (결정해) 오면 학생지원팀에서 관리감독할 수밖에 없습니다."
학생: "학교의 입장은 저번에 하신 얘기랑 달라지신 거네요?"
학지팀: "그렇게 느끼셨다면..."
학생: "느끼신 게 아니고 실제로 그렇게 얘기하셨잖아요. 거짓말 하신 거잖아요. 저희가 여학생휴게실이 학생자치 공간에 들어가냐 안 들어가냐를 여쭤봤는데 들어간다고 말씀하셔 놓고 지금 다르게 말씀하신 거거든요."
학지팀: "... 제가 인정하겠습니다. "
제37대 문과대 학생회장의 증언에 의하면 2005년 학생사회의 공약으로서 여끔이 만들어졌고, 제40대 문과대 학생회는 기존의 여학생회 업무를 '문과대가 가져가야 할 당연한 의제'로 삼아 여끔 관리 및 성폭력 사건 해결에 앞장섰다.
그러나 이후 독립적인 기구의 필요성이 다시 대두됐다. 이에 문여위가 만들어졌고 관리비를 문과대 예산에서 책정 받는 등, 여끔 제반 업무를 문과대 학생회로부터 다시 위임받았다. 그러므로 문여위가 인준되지 못한 올해의 경우에는 다시 문과대 학생회가 여끔 관리를 맡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런데 문여위를 배제하고, 이제는 학교가 정한 규칙 때문에 여학생휴게실을 유지할 수 없다는 현 문과대 학생회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간섭하지 않겠다고 했다가 약 2주 만에 태도를 바꾸어 학생자치에 압박을 가하는 이 학교는 대체 몇 년도쯤에 머무는 것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학생회와 학교 사이에서 합리적 의심을 품는 학생들만 거짓말쟁이로 몰렸다.
학생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
총여도 문여위도 잃은 성균관대 학생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단지 일부의 휴식을 위한 침대 두 칸과 소파가 아니라, 수많은 여학생들이 안전하게 휴식을 취하고 월경용품을 얻고 성폭력 사건 발생 시 문여위 위원들이 내담을 진행하는 '공간'이자 학생사회의 성평등한 역사, 의식, 문화 그 자체다.
따라서 여끔은 불필요한 공간이나 사적인 목적의 공간이 아니었을 뿐더러 이토록 이유 없이 지워져도 되는 역사도 아니다.
다시 만난 학지팀 과장은 그의 입장이 왜 바뀌었는지, 학교와 학생회가 대체 왜 이러는지 묻는 학생들에게 '지나치다'고 말했다. 하지만 과도한 쪽은 학교와 학생회다. 왜 그렇게까지 여학생휴게실을 없애지 못해 안달인 것인가. 대학 학생자치와 성평등을 어디까지 퇴보시킬 것인가.
덧붙이는 글 | 노서영 시민기자는 ''성균관대 성평등 어디로 가나'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