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 없이 시도했다
그때마다 실패했다
늘 다시 시도했다
또 실패했다
이번에는 세련되게. - 사뮈엘 베게트
노회찬의 삶은 패배의 연속이었다.
6ㆍ25전쟁을 겪은 한국 사회는 사회민주주의나 진보사상을 금기시해 왔다. 특히 친일파들이 자신 또는 선대들의 죄과를 캄플라지하고자 친일의 깃발을 반공으로 바꿔 달면서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이명박→박근혜로 세습(또는 유사 세습)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들은 우파를 자처하면서 독립운동→민족운동→통일운동→민주화운동→노동운동을 좌파로 몰고, 강고한 물적ㆍ인적 기반을 바탕으로 기득권층을 형성하고, 국가자원을 독식하다시피 해왔다.
4ㆍ19혁명ㆍ반유신투쟁ㆍ부마항쟁ㆍ10ㆍ26사태ㆍ광주민주화운동ㆍ6월항쟁 등을 거쳐 수평적 정권교체로 김대중ㆍ노무현의 민주정부 10년이 있었지만, 저들 기득권세력의 훼방으로 개혁다운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노회찬의 삼성X파일 폭로 사건이 결국 폭로자를 희생양으로 만들었듯이, 보수의 가면을 쓴 수구(또는 우파)들은 정치 권력 뿐만 아니라 국회ㆍ사법ㆍ언론ㆍ재벌ㆍ정보ㆍ대형교회 등을 장악하고 연대하면서 긴 세월 한국 사회를 지배해 왔다.
노회찬은 2015년 7월 정의당 당대표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지난 2년여 동안 국회의원직 상실→아내의 노원 병 보궐선거 낙선→본인의 동작 을 보궐선거 낙선→당대표선거 낙선으로 이어지는 패배와 좌절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타조의 알이 햇볕에 저절로 부화되듯이, 정의ㆍ정치ㆍ진보가 저절로 나아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기에 결코 좌절할 수 없었다.
이즈음 그는 김광규의 시 「늦깍이」를 생각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늦깍이
역사는 어차피
이긴 사람의 편
그러나 진쪽의 수효는
항상 더 많았지
이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는 없지만
이대로 끝나서는 안 되겠다고
나는 요즘에야 생각한다.
노회찬은 2014년 5월 27일부터 '진중권ㆍ노회찬ㆍ유시민의 정치다방'이란 명칭으로 팟캐스트 〈노유진의 정치카페〉 첫 방송을 시작했다.
당대의 변사들인 이들의 팟캐스트는 곧 시중의 화제가 되었다. 이명박근혜 정권의 홍보기관 역할을 하고 있는 공영방송에 식상해한 깨어 있는 시민들의 토론장 역할을 한 것이다.
오래 전부터 그는 명강사로 알려졌다. 노동단체는 물론 각종 종교모임ㆍ시민단체ㆍ여성그룹 등의 초청 강연을 하고 영국과 일본도 몇 차례 다녀왔다. 강연 내용과 분위기 조성에 일품이어서 그의 강연장은 언제나 만원을 이루었다.
실정과 국정농단을 거듭해온 박근혜 정부는 2015년 11월 학계와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역사교과서 국정화 고시를 강행했다. 야당과 재야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이런 일에 노회찬이 침묵할 리 없었다.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예의 촌철살인식 한마디를 쏟았다.
노회찬이 내다 본 대로 '엎질러진 휘발유'는 얼마 뒤 촛불의 마중물이 되고 탄핵의 핵폭탄 역할을 했다.
지금 정부가 자신의 법적 권한으로 입법예고를 하고, 이렇게 국정화 고시를 하더라도 일이 끝나는 게 아니거든요. 지금 여론을 보면 그렇게 하면 엎질러진 물이 되는 게 아니라 엎질러진 휘발유가 되는 거죠. 계속해서 앞으로 파문이 계속 번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대통령은 51.6%의 지지율로 당선된 분인데요. 지금 국정화를 갖다가 이념문제, 이념공세로 정부가 온갖 언론을 통해서 일방적으로 퍼붓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 여론지지율이 저조한 걸 보면 박근혜 대통령 스스로 다시 생각해봐야 할 상황이라고 봅니다. (주석 7)
주석
7> CBS, 1915년 11월 2일.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진보의 아이콘' 노회찬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