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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섬이 아니다. 한 권의 책이 하나의 세상이다."

앨리스 섬에 서점이 하나 있다. '아일랜드 서점'이다. 그 서점의 간판에 새겨진 말이다. 물론 '아일랜드 서점'은 <섬에 있는 서점>이라는 개브리얼 제빈이 쓴 소설에 등장한다.

아일랜드 서점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여름휴가 때문이다. 휴가철이면 사람들로 섬이 붐비고 서점도 꽤 매출이 오른다. 하지만 나머지 계절은 텅 빈다.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도 섬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서점 주인은 아내를 먼저 보내고 쓸쓸히 지내는 남자다. 아내가 살아있던 시절, 책이 좋아 서점을 차렸다. 손님이 없어도 책 읽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다. 요즘은 이런 사람이 드물다. 그래서인지 주인공에게 마음이 간다. 나도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는다.

새 식구
 
 <섬에 있는 서점> 책표지
<섬에 있는 서점> 책표지 ⓒ 루페
 
어느날 서점 주인에게 놀라운 일이 찾아온다. 새 식구가 생긴 것이다. 이름은 마야다. 누군가 서점 앞에 버리고 간 아이다. 자신에게 찾아온 생명을 거두는 것은 소설의 주인공들에게는 익숙한 일이다. 딸이 생긴 그의 삶은 이전과는 다른 생명력을 얻는다. 세상은 딸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마야는 서점에서 놀며 책과 뒹군다. 마야가 가게의 크기를 재는 방법을 살펴보자.
 
가게 너비는 십오 마야, 길이는 이십 마야다. 이걸 아는 이유는 한 나절을 바쳐 누워 굴러가며 측정했기 때문이다. 삼십 마야가 넘지 않아 다행이었다. 측정 당시 마야가 셀 수 있는 숫자가 거기까지였으므로.

마야가 한 번 뒹군 거리가 한 마야다. 스무 번 뒹굴었으니 이십 마야가 된다. 일 미터, 십 미터라는 식으로 재는 우리와는 다른 기준이다. 마야 자신이 세상을 재는 기준이다. 얼마나 이쁜지. 

소설은 인생의 슬픔 혹은 비극을 중화시켜준다.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어머니로부터 버려진 일은 슬픈 일이고 비극적 사건이지만 서점의 딸로 즐겁게 살아간다. 작가가 '멀리서 보면 비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희극'으로 마법을 부려버렸다. 
 
마야는 어머니가 자신을 아일랜드 서점에 두고 갔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일정 나이가 되는 모든 애들한테 일어나는 일일지도 모른다. 어떤 아이들은 신발 가게에 남겨진다. 또 어떤 애들은 장난감 가게에 남겨진다. 또 어떤 애들은 샌드위치 가게에 남겨진다. 그리고 인생은 어떤 가게에 남겨지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거다. 마야는 샌드위치 가게에서 살고 싶지 않다.

마야에게 서점은 즐거운 놀이터였다. 서점에 남겨진 마야는 서점 주인이라는 아빠가 생겼고, 서점 주인의 애인이라는 엄마가 생겼고, 책이라는 친구도 생겼다. 읽기와 쓰기는 인생이 될 터였다.

피쿼드와 퀘커그

서점 주인은 출판사 영업사원을 무례하게 굴었다가 후회를 한다. 그 후회는 곧 친밀해지는 계기가 된다. 자신의 행동을 사과하기 위해 영업사원을 식사에 초대한다. 앨리스 섬에 있는 유일한 해물전문식당이다. 이름은 '피쿼드'. 허먼 멜빌의 유명한 소설 <모비딕>에 등장하는 포경선 이름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칵테일은 '퀘커그'를 여러 잔 마시고 친해진다. '퀘커그' 역시 <모비딕>에 등장하는 식인종 작살수 이름이다.
 
"당신은 어떤 소설을 배경으로 한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으면 좋겠어요?"

"아, 어려운 질문이네요. 전혀 뜬금없긴 한데, 대학 다닐 때 <수용소군도>를 읽고 있으면 그렇게 배가 고파지더라고요. 소비에트 교도소의 빵과 수프에 대한 그 온갖 묘사들 하며."

"당신은 어디가 좋을 것 같아요?" 영업사원이 묻는다.

"이것 자체만으로는 레스토랑이 되진 않겠지만, 난 항상 나니아 연대기에 나오는 터키시 딜라이트를 먹어보고 싶었어요. 어렸을 때 <사자와 마녀 옷장>을 읽으면서 에드먼드가 터키시 딜라이트 때문에 가족을 배신할 정도라면 그건 진짜 어마어마하게 맛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어느 핸가 아내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한 박스를 사줬거든요. 근데 가루를 잔뜩 묻힌 꾸덕꾸덕한 사탕이라더라고요. 내 평생 그때처럼 실망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만나서 책 이야기를 한다. 그렇게 서로 통한다. 통하다가 가까워지고 그러다 꿍짝꿍짝. 둘은 결혼한다.

우리는 섬이 아니다

서점 주인의 삶은 바뀐다. 입양한 딸도 생겼고 새 아내도 생겼다. 그리고 늘 있던 책과 함께이다. 책은 그들의 연결고리이자 삶의 배경이다.

서점 주인은 뇌에 종양이 생긴다. 그래도 책은 놓지 않는다. 장편소설이 읽기 힘들어지면 단편소설을 읽는다. 천천히 오래 읽으며 느리게 생각한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란 걸 알기 위해 책을 읽는다. 우리는 혼자라서 책을 읽는다. 책을 읽으면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내 인생은 이 책들 안에 있어. 마야에게 말하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면 내 마음을 알 거야.

같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은 같다. 누군가에게 책을 선물한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도 함께 주는 것이다. 그의 마음은 그가 선물한 책의 내용이다.

임종이 가까워지면서 그의 뇌에는 통각 세포가 없어진다. 아프지는 않지만 횡설수설한다.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 단순한 것도 이런저런 표현들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다.
 
"마야. 지금 네가 여기 있으니 나도 여기 있는 게 기뻐. 책과 말이 없어도 말이야. 내 정신이 없어도, 대체 이걸 어떻게 말하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 중요한 말은 하나밖에 없어.

마야,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 바로 우리야.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이 바로 우리다. 우리는 우리가 수집하고, 습득하고, 읽은 것들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여기 있는  한, 그저 사랑이야. 우리가 사랑했던 것들,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런 것들이, 그런 것들이 진정 계속 살아남는 거라고 생각해. 한 단어가 돼야 한다면 한 단어로 하지 뭐."

"사랑?"
 
우리가 섬은 아니지만 '섬에 있는 서점'에 가고 싶어진다. 각자 자신의 몸을 소유한 개체로 살아가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올 여름에는 섬에 있는 서점에 가서 확인하고 싶다. 섬에 살지만 사람이 찾아오고 그 사람들로 삶이 바뀌는 주인 이야기를 듣고 싶다.

삶을 바꾸는 것은 찾아오는 사람에 대한 반응, 즉, 사랑일 것이다. 걍팍한 육지 속 삶을 벗어나 섬에 있는 서점에서 그런 사랑을 조금만 담아오고 싶어진다.

섬에 있는 서점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루페(2017)


#섬#서점 #여름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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