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편집자말] |
오는 19일이면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의 수돗물 사태가 터진 지 정확히 한 달이 된다.
피해 지역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발 빠른 대처가 이뤄지고, 시민들의 불안을 걷어낼 수 있는 대책도 비교적 빨리 나온 덕에 '수돗물 대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달 20일 이곳의 아파트단지와 초등학교에서 "붉은 수돗물이 나온다"는 민원이 쏟아지고 언론보도가 나올 때만해도 분위기는 낙관적이지 않았다. 사태 초기 상황을 다룬 일부 신문의 기사에는 이런 제목들이 붙었다.
<"아리수 믿고 먹으라더니"…서울까지 수돗물 파동>
<서울 문래동 주민들 "'붉은 수돗물', 아이 마시고 씻겼는데…">
<불안한 상수관…공포의 붉은 물>
지금에 와서는 언론들이 너무 호들갑스럽지 않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한 달 전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녹물 사태가 터지자 북한의 평양 상하수도 현대화 지원에 남북교류협력기금 392억 원 중 10억 원을 배정하기로 한 서울시의 방침까지 온라인에서 공격을 받았다.
서울시에 비난의 목소리가 쏟아졌지만, 사실 녹물 사태의 '원조'는 인천시였다.
인천시는 5월30일부터 서구에서 수도에서 녹물이 나온다는 신고가 잇따랐지만, 이틀 뒤 수질검사에서 '마실 수 있는 물'이라고 성급한 결론을 내렸다. 그 사이 영종도(6월 3일), 강화군(6월 13일)에서 녹물 신고가 나오는 등 '물 사태'는 인천 전역으로 번졌다. 박남춘 인천시장이 초기 대응의 미숙함을 인정하고 사과한 것은 사태 발생 19일이 지난 후였다.
서울 문래동의 녹물 사태는 인천시장의 사과 3일째 되는 6월 20일 언론보도를 통해 시민에게 알려졌다. 서울은 경기도와 함께 전국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사는 지방정부이기 때문에 이곳의 상황 대처가 물 사태의 전국화를 가름하는 '시금석'이 될 수 있었다.
"문래동 4,5,6가에서 혼탁수 유출이 의심된다"는 신고가 들어온 6월 19일, 서울시는 사태 발생 1시간 30분 만에 배수관 세척을 시작했다. 한때 1.10NTU까지 치솟았던 이 지역 수돗물의 탁도는 세척이 끝난 후 0.25까지 떨어졌다(먹는 물의 수질 기준은 0.5NTU 이내).
오후 5시경에는 상수도사업본부장이 아리수 병물을 들고 사고가 난 아파트들을 직접 찾았다.
그러나 이날 저녁 방송뉴스에 새로 끼운 필터를 검붉게 만드는 물이 흘러나오는 아파트 수도꼭지를 보여주자 시민들의 불안감은 더욱 증폭됐다.
박 시장은 자정을 넘긴 21일 0시 20분 사건 현장을 찾았다. 다음날 신문 마감이 이미 끝나거나 방송뉴스 제작이 끝난 시각이어서 박 시장이 간 곳에는 기자가 없었다.
다음날 오전 서울시가 배포한 보도자료에는 "먹는 물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은 서울시로서는 치욕적인 일"이라는 박 시장의 현장 발언이 소개됐다. 시민 건강이 걸린 수돗물에 문제가 생긴 것에 대해 박 시장이 '셀프 디스'하는 발언을 한 것을 언론사들이 놓칠 리가 없었다. 박 시장의 '치욕' 발언을 제목으로 한 기사만 30건이 쏟아졌다.
서울시의 핵심관계자는 "사태가 장기화됐다면 시장이 자신을 조롱거리로 만들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박 시장은 현장에서 솔직한 심경을 얘기했고, 대변인실도 가감 없이 전달했다"고 말했다.
박 시장이 발빠르게 현장을 찾음으로써 사건이 터질 때마다 으레 나오는 "책임자 어디 있냐"는 호통이 많이 줄어든 것도 사실이다.
박 시장은 이날 주민들에게 ▲ 식수, 간단한 세면 정도는 할 수 있도록 아리수를 충분히 공급할 것 ▲ 저수조를 가능한 한 빨리 청소해서 급수 불편을 해소할 것 ▲ 사고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여 시민 및 언론에 투명하게 공개할 것 ▲ 원인으로 추정되는 해당지역 노후 상수도관은 긴급 예산편성으로 조속히 정비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박 시장은 사건 발생 닷새 만에 주민과의 약속을 대부분 이행했다.
방문 당일 문제가 생긴 아파트단지 5곳의 저수조 청소를 완료하고, 대학교수와 시민단체 활동가 등 민간전문가들이 참여하는 합동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6월 23일부터 7월 12일까지 최대 100여 명이 참여하는 주민설명회와 민관합동조사회의가 각각 4차례 열렸다. 26일 기자설명회에서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긴급 예산을 편성해 내년까지 서울에 남아있는 노후 상수도관 138km를 전면 교체하겠다는 대안을 내놓았다.
"시민의 건강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는 호소에는 별다른 반발이 없었다. 서울시가 대안을 내놓고, 피해 지역이 더 이상 확산되지 않자 시민들의 불안 심리도 차츰 누그러졌다.
그러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6월 27일 이후에도 거의 매일 진희선 행정2부시장이 주재하는 회의에서 문래동 상황을 점검하고, 그 결과는 박 시장에게도 바로 보고됐다. 26일 오전 2시 이후로 문래동의 수질이 점차 호전되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지만, "필터를 통과하는 물의 색깔이 아직도 깨끗하지 않다"는 일부 주민들의 불만은 여전했다.
서울시는 12일 오후 6시 문래동 아파트단지 5곳의 음용 제한을 해제했다. 이 같은 결론에 이르기까지 민관합동조사단은 사고 발생 당일부터 아파트단지 7곳(식수 제한 5곳, 집중관리 2곳) 27개 지점의 시료를 채취해 매일 2~3시간 단위로 수질 검사를 했다. 탁도와 잔류염소 수치가 수질기준치 이내로 나오는 것을 확인한 뒤 12일 오후 5시 '마지막 주민설명회'를 통해 주민들의 공감을 얻어낸 뒤 발표가 나왔다.
공교롭게도 서울시가 '수돗물 사태 종료'를 선언한 금요일 오후는 주말을 앞두고 뉴스 소비량이 크게 줄어드는 시간대다. 대부분의 언론들도 "문래동 주민들이 수돗물을 다시 마실 수 있게 됐다"는 '굿 뉴스'를 담담한 톤으로 전했다. 근 4주 동안 사태를 해결하느라고 일에 매달렸던 사람들은 부정적인 뉴스를 주목하고 긍정적인 뉴스에 무심한 여론에 허탈함을 느꼈을지 모르겠다.
기자가 만나는 많은 공무원들은 "칭찬까진 바라지 않는다.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곤 한다. 좋은 성과는 인정받기 힘들지만, 나쁜 일이 터지면 수습에 진땀을 빼고 급기야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행정'의 고단함을 이르는 말로 이해했다.
세상은 계속 바뀌지만 "시민 안전만큼은 공공이 맡아야 한다"는 인식도 확고한 시대다. '문래동 수돗물 사태 이후 한 달'을 담담하게 돌아본 이 글이 시민안전을 지키는 많은 공무원들에게 조그마한 위로가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