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김도희씨는 지역의 지상파 방송국에서 6년 동안 근무했다. 사회생활은 방송기자로 시작했으나, 오랜 꿈인 아나운서를 포기할 수 없어 다시 시험을 쳤다. 라디오 리포터, 공공기관 아나운서, 시황 캐스터 등을 거쳐 2012년 지상파 TV 방송국의 아나운서가 됐다.
아나운서는 천직이었다. 사회생활의 고단함도 있었지만, 꿈에 그리던 방송을 한다는 기쁨에 힘든 줄도 몰랐다. 6년 동안 근무하는 중에 3년 6개월간은 메인 뉴스 앵커로 일하기도 했다. 회사에서 주는 공로패도 받았다.
연차가 쌓일수록 회사에 대한 소속감이 깊어졌고, 역할도 커졌다. 신입 아나운서 채용 과정에 면접관으로 참여하기도 했고, 아나운서 카메라 테스트용 뉴스를 직접 선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씨가 오랜 기간 몸담은 회사는 그를 '근로자'로 인정하지 않았고, 퇴직금조차 지급하지 않고 있다.
출퇴근하고 유급휴가 쓰는데 '근로자 아니'라는 방송국
2016년, 김씨와 함께 입사한 아나운서 B씨가 건강상의 이유로 퇴사했다. 방송국은 그간의 '관행'에 따라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으려 했다. 아나운서는 근로계약이 아닌 전속 프리랜서 계약을 맺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사실상의 출퇴근, 여름에만 쓸 수 있도록 제한된 5일간의 유급휴가, 업무상의 지휘 감독 등은 사실상 근로자와 같은 노동 조건이었다. 고참 아나운서들은 별도의 수당도 없이 신입 아나운서들을 교육하기도 했다. 한 식구라는 소속감이 없이는 어려운 일이었다.
B아나운서는 받지 못한 퇴직금에 대해 노동청에 임금체불 진정을 넣었고, 근로자성을 인정받아 '금품체불확인원'을 발급받았다. 이를 통해 민사소송을 제기했고, 1심에서 승소했다.
그러나 형사소송에서는 판단이 달랐다. 검찰은 방송국의 퇴직금 미지급에 대해 '불기소처분'을 내렸다. 초범이라 '고의'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 동안 이 같은 사안에 대해서 한 번도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다는 것이 판단의 근거가 됐다.
퇴직금 안 주려 근로여건 개악... 경조사 휴가 무단결근 처리도
방송국과 B 아나운서가 법정 다툼을 벌이는 동안, 방송국 내 아나운서들의 근로여건에 변화가 생겼다.
방송국은 아나운서들의 근로자성이 인정될 수 있는 근거들을 없애려 했다. 1년에 고작 5일뿐이던 유급휴가를 무급휴가로 바꾸고, 전속계약직 아나운서 계약서를 프로그램별 출연 계약서로 바꾸어 서명을 요구했다.
업무 지시도 기존처럼 PD나 팀장이 직접 내리는 것이 아니라, 작가나 FD를 거치도록 해 업무상의 지휘 감독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사내에서 아나운서와는 밥도 같이 먹지 않는 분위기를 조성해 한솥밥 먹는 식구가 아닌 것처럼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김도희 아나운서는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고, 방송국을 퇴사했다. 결정적인 것은 경조사 휴가가 무단결근 처리된 사건이었다.
할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정당하게 허락을 받고, 방송을 대신 진행할 아나운서까지 결정해 업무에 지장이 없도록 했는데, 다녀와 보니 무단결근자가 되어 있었다. 아나운서들은 자체적으로 조직 내 다른 직원들의 경조사 소식에 부조금을 걷어서 내 왔는데, 부의금은커녕 무단결근으로 이틀치 임금이 미지급된 것이었다.
"택배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여건을 비판하는 기사를 카메라 앞에서 읽었지만, 정작 그러한 뉴스를 만드는 방송국은 4년 넘게 일한 아나운서에게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으려고 갖은 꼼수를 부리고 다른 아나운서들에게 횡포와 갑질을 부렸던 것입니다.
이러한 방송국이 보도를 할 자격이 있는 것인가... 보도를 할 자격이 없는 민간기업이 공공재인 전파를 마음껏 사용해도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저 돈벌이를 위해 뉴스를 파는 그러한 위선적인 방송국을 위해 일해야 할 이유를 더이상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메인 뉴스를 진행하던 김씨는 더이상 방송국을 위해 일할 이유를 잃어버렸다. 퇴사 후 로스쿨에 진학했다. 동기인 B 아나운서의 법정 싸움을 지켜보면서부터 마음먹은 일이었다.
퇴사 후에도 끝나지 않은 싸움
2018년 1월에 퇴사한 김도희 아나운서에 대해 방송국은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김씨는 과거 B 아나운서가 그랬듯이 노동청으로부터 근로자성을 인정받고 민사소송을 통해 법정다툼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단계부터 그 길이 막히고 말았다. 노동청에 낸 퇴직금 체불 진정에 대해 '내사종결' 통보를 받은 것이다.
입사 동기인 B아나운서는 4년 3개월을 근무하고 근로자성을 인정받았는데, 6년을 근무한 김도희 아나운서는 근로자성을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근로감독관의 자의적인 판단에 대해 여러 곳에 도움을 호소하던 중 <미디어 오늘>에 기사가 실렸고, 기사를 본 국회의원실의 부탁으로 김 아나운서는 고용노동부 국정감사에 참고인으로 출석하기도 했다.
노동청에 재진정을 내며 이의제기를 했으나 새로 배정된 근로감독관은 퇴직금의 60% 선에서 방송국과 합의할 것을 종용했다. 퇴직금을 받는 것보다도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인정받고 싶었던 김씨는 합의를 하지 않았고, 해당 근로감독관의 합의 종용 태도에 대해 국민권익위원회에 문제를 제기했다. 새로운 근로감독관이 배정되었으나 그 역시 사건을 내사종결 처리했다.
잘못 없어 징계 안 받았는데, 근로자가 아니라고?
조사서류를 통해 그 사유를 알고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예를 들어 정규직 직원인 H 아나운서는 폭행 건으로 징계를 받았으나 김 아나운서는 방송사고를 냈는데도 징계를 받지 않아 근로자성이 없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 해당 방송사고는 방송 '송출'의 문제로 일어난 사고였고, 앵커는 잘못이 없어 기술팀과 담당 PD가 징계를 받은 일이었다.
근로자성 판단을 해달라는 진정에 대해, 처음부터 근로자성은 없다는 것을 전제로 깐 채 회사측의 퇴직금 미지급에 고의가 있었는지를 판단하는 데 치중하고 있었다.
대전지방고용노동청의 담당 근로감독관에게 전화를 걸어 입장을 들어 봤다. 2016년 B씨가 근로자성을 인정받은 것과 달리 김도희 아나운서가 근로자성을 인정받지 못한 이유에 대해 이번에 새로 이 건을 맡은 근로개선지도2과의 차주철 근로감독관은 "2016년 건은 근로감독관의 판단에 의해 근로자성이 인정되었으나 그 이후의 진정은 검찰의 지휘를 받아 내사종결 처리한 사건"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특정 사건은 근로감독관 선에서 판단이 이루어지고 특정 사건은 검찰의 지휘를 받는 이유에 대해서는 "사안의 경중에 따른 판단"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김도희 아나운서가 근무했던 TJB대전방송 측은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노동청의 판단에 따른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경조사 휴가가 무단결근으로 처리된 사유에 대해서는 "프리랜서는 원래 휴가가 따로 없다. 방송에 출연하지 않았기 때문에 출연료를 지급하지 않은 것뿐"이라고 답변했다.
현재 TJB대전방송은 아나운서 고용 형태를 전속 프리랜서가 아닌 1년 단위의 계약직 아나운서로 대체한 상태다. 아나운서 5명 중 1명은 정규직, 1명은 무기계약직이며 다른 3명은 계약직 신분이다.
김씨는 국민권익위원회에 사안을 원점에서 재조사해줄 것을 요구한 상태다. 청와대에 국민청원(
링크)도 넣었다.
덧붙이는 글 | 김도희 아나운서가 올린 청와대 국민청원 주소입니다.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581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