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1970년대 우리 정부는 국내 실업난 해소와 외화 획득을 위해 광부와 간호원을 독일로 파견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극심한 실업문제를 겪고 있었고 이에 많은 청년들이 독일 취업 광부 및 간호원에 지원했다. 이들은 대부분 3년 계약직으로 광부로는 7900여 명, 간호원으로는 1만여 명이 독일로 이주했다. 이들은 '산업 역군'이라 불리며 이들의 경제적 가치에 집중해 평가됐다. 그러나 우리 사회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측면도 적지 않다. 이 연재에서는 1960·1970년대 독일로 간 간호원, 광부 중 국내외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시민운동에 참여한 이들, 혹은 이들과 관계맺고 있는 사람들을 차례로 인터뷰하여 소개한다. 이 연재를 통해 한국 이주사에서 재외 한인들의 사회참여운동 시작과 흐름을 짚어보려 한다. - 기자말
안차조(74)씨는 밀양 보건소에서 일하던 중 1966년 독일 취업 간호사 모집 신문 광고를 보고 지원합니다. 당시 안씨가 한국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버는 보수로는 세 동생의 학비를 내기에 부족했습니다. 이러한 경제적 이유와 새로운 사회에 대한 동경으로 안씨는 독일 간호사 취업 선발에 지원했습니다. 당시 많은 동료들은 안씨와 비슷한 이유로 독일 취업 간호사로 선발되고 싶어했습니다.
완고하신 아버지가 안씨의 독일 취업 간호사 지원에 반대할 것을 우려해 아버지께 비밀로 하고 준비해야했지만, 안씨는 필기시험, 4주간의 독일어 교육기간 등에 열심히 참여하여 마침내 독일 취업 간호사로 선발됩니다. 1966년 10월, 안씨는 3년 계약으로 독일에 오게됩니다. 처음 안씨가 취직한 병원은 독일 북부 브레멘(Bremen)에서 가까운 작은 도시 베르덴(Verden) 시립병원이었습니다.
타국에서 하는 모든 경험은 낯설었고 일은 고됐지만 가족들을 생각하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3년간의 계약기간이 끝났지만 안씨가 처음 독일에 와야했던 상황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고 안씨는 독일에서 더 머무르며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1970년대 초반 독일에는 경제 위기가 있었고 외국인 노동자로 일자리를 구하기 쉽지 않았지만 베를린 지역의 병원에 어렵게 취직하게 됩니다.
1960~1970년대 독일로 온 한인 간호사들은 계약기간이 끝날 때 안씨와 비슷한 문제를 경험하게 됐습니다. 이로 인해 1977년 독일에서 일하고 있던 한국 간호사들이 강제로 해고되고 본국으로 송환되는 일들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1977년 초 이러한 사례가 늘자 한인 간호사들은 독일 전역에서 계약기간 이후 독일에 계속해 체류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취지의 서명운동을 벌입니다.
당시는 UN이 성차별을 없애고 여성 인권 신장을 위해 1975년을 국제 여성의 해로 정한 직후였습니다. 이에 전 세계에서는 다양한 영역에서 여성해방운동이 일어났고 독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러한 흐름 덕분에 한인 여성들의 체류권 운동은 많은 독일 시민들의 지지 속에 당시로는 엄청난 수인 1만 1000여 명의 서명을 받아 1977년 12월 독일 정부 관계당국에 전달됩니다. 이를 계기로 이후 독일연방 주정부에서 이들에게 체류허가와 노동허가를 내주었습니다. 안씨는 이 운동이 가능했던 이유는 당시 한인 여성 간호원들이 독일에서 헌신적으로 일하며 현지 시민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던 점이 주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라 밝혔습니다.
체류권 운동을 계기로 1978년 독일에서는 재독한국여성모임이 결성됩니다. 안씨는 1980년부터 이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합니다. 재독한국여성모임은 재독 한인들의 지위와 관련된 문제를 계기로 창립했지만, 점차 활동 범위를 확대해갔습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노동 주체로 인식하고 국내 노동문제로까지 범위를 확장하여 문제 해결을 위한 초국적 노력을 했습니다. 1978년 한국의 동일방직 여성노동자에게 가해진 이른바 '똥물 사건'에 분노한 여성모임은 그들의 투쟁에 기금을 모아 후원하기도 하고 한국에 있던 독일 의류회사 후레아 훼션의 노동착취문제를 독일 현지에서 고발하기도 했습니다.
재독한국여성모임은 1990년대 초반부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독일 및 유럽 사회에 알리기 위한 노력을 해왔습니다. 1993년 독일 일본여성회와 함께 '전쟁과 강간'이라는 주제로 한국, 북한, 필리핀 등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이 직접 증언하는 첫 국제회의를 연 이후로 매해 관련 활동을 펼쳐왔습니다.
최근에는 코리아협의회, 베를린 일본여성회, 재독 유럽연대, 등 민주단체들과 함께 독일 베를린에 소재하는 여성박물관에 평화의 소녀상(김운석, 김석영 작)을 세웠습니다. 오랜 시간 일본이 전쟁중에 벌인 만행을 고발하는 활동을 한 안씨는 최근 아베정부의 역사왜곡과 망언을 지켜보며 분노하고 걱정이 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분노와 걱정은 앞으로의 활동에 대한 다짐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안씨는 이런 활동을 하며 가슴아픈 이야기도 많이 들어야 했습니다. 이념과 정체성을 함부로 재단하여 비난하는 사람들의 폭력을 안씨는 '끝까지 싸우겠다'는 다짐으로 이겨냈습니다. 또한 개인의 삶의 영역에서도 변화를 위한 다양한 노력을 해왔습니다. 그의 일터와 활동하는 단체에서 권위적이고 위계적인 질서가 공동체 문화를 해치는 것을 발견하면 앞장서서 문제제기하고 개선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안씨는 2016년 겨울 한국의 촛불항쟁을 보며 우리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기대감에 눈물을 흘렸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런 역사와 활동 정신이 다음 세대에게 전해지길 바라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여성들이 계속해서 주체적 목소리를 내주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안씨는 인터뷰 참여를 망설였습니다. 동료들과 함께 한 일에 자신이 혼자 드러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간절한 설득 끝에 인터뷰에 참여했지만 인터뷰 도중에도 연신 인터뷰가 부담스럽고 쑥스럽다고 했습니다. '내가 앞에 나서는 것보다 동지들과의 연대가 우선'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활동 과정은 정말 그랬습니다. 구성원들의 서로를 위한 연대정신은 위대한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이들이 오랜시간 진심으로 이어온 활동들이 더디지만 우리 사회 곳곳의 문제점들이 개선되는 데 이바지해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