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
세검정 삼거리를 돌아서 자하문 고개를 넘어 청운효자주민센터를 지나면 눈 앞에 광화문광장이 펼쳐진다. 기자는 2017년부터 이 길을 따라 매일 일터로 출퇴근한다.
이 광화문광장을 뜯어고친다는 얘기는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였던 2017년 4월 19일 서울시청을 찾은 후부터 나왔다. 그날 박원순 서울시장 손을 잡고 광화문광장으로 나온 문재인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여기 광화문을,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역사문화거리로 조성하자는 논의가 참여정부 때부터 있었다. 이후 실제 광화문 광장이 만들어질 때와의 개념과 전혀 다르게 이렇게 도로 중앙에 거대한 중앙분리대처럼 만들어졌기 때문에 굉장히 아쉽다. 광화문 광장의 월대라든지 의정부터를 제대로 복원하고, 그 다음에 육조 거리도 부분적으로 복원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광화문광장이 광장민주주의 상징처럼 됐기 때문에 그 기능도 살려나가는 방향으로 조화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문 후보가 대통령이 된 후 광화문광장이 어떤 식으로든 바뀌긴 바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사 기간의 교통 체증 걱정은 그 다음 문제였다.
정부와 서울시, '원팀' 아니었어?
그로부터 2년이 지났다. 지금은 문 대통령 얘기만 믿고 국제현상설계공모를 진행한 서울시청만 이 얘기를 하고 있다. 청와대도, 국무총리실도, 여당(더불어민주당)도 언제 첫 삽을 뜨고 마무리할지 입을 다물고 있다.
행정안전부는 서울시에 "시민들의 공감과 이해를 얻는 과정을 거친 뒤 광장 재구조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공문을 보냈다. 광화문 삼거리 한복판에 자리 잡은 정부서울청사를 관리하는 행안부가 버티면 공사를 일방적으로 진행할 수는 없다.
박근혜 정부까지만 해도 중앙정부와 서울시는 세상을 보는 관점 자체가 달라서 매사에 충돌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원팀'이 됐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일이 왜 이렇게 됐는지를 알 수 있는 단서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첫째, '광화문광장 재구조화'에 대한 청와대의 관심이 뚝 떨어졌다. 2018년 1월 4일 '대통령집무실 광화문 이전 보류' 발표가 전환점이 됐다.
문 대통령은 관저에 칩거하며 국민과의 소통을 등한시하는 박근혜 대통령을 반면교사 삼아 "퇴근길 재래시장에서 시민들과 소주 한 잔 하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그러나 막상 하려고 하니 관저에서 청사로의 출퇴근 등 경호의 불편이 장애물로 부상했다.
대통령이 청와대에 남기로 한 상황에서 광화문광장 재구조화는 '임기 중 반드시 해야 할 사업' 리스트에서 빠졌다. 설상가상으로 광장 재구조화 과정에서 행안부와 서울시의 갈등을 중재할 만한 청와대 비서관들이 내년 총선 출마를 위해 한꺼번에 청와대를 떠났다. 요즘은 "총선 앞두고 서울 한복판에 공사판 만들면 표가 나오겠냐?"는 얘기도 들린다.
둘째, 광화문광장 재구조화가 시민 편의를 증진시킬 수 있겠냐에 대한 회의론이 움트고 있다.
가깝게는 5월부터 우리공화당이 광화문광장에 천막 당사를 기습 설치한 것이 '시민 짜증'의 도화선이 됐다. 서울시는 두 차례에 걸쳐 3억 8000만 원을 들여 행정대집행을 시도했지만, 우리공화당은 그때그때 천막을 펼쳤다 접으며 광장을 맴도는 '게릴라전'으로 맞섰다. 돈은 돈대로 쓰고 "광화문광장 천막을 좌시하지 않겠다"고 한 박원순 시장의 정치력만 깎이는 결과를 빚었다.
광화문광장에는 거의 매일 기자회견 형식의 집회가, 매주 토요일에는 야당 등의 대규모 장외집회가 열리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앞에는 "조국캐슬 조로남불에 젊은 청년들은 분노한다"라고 적힌 현수막들이 어지럽게 나부끼고 있다. 집회는 편법이고, 현수막은 불법이다. 그러나 서울시와 종로구청 모두 손 댈 엄두를 못 내고 있다. 박원순 시장은 27일 시의회 시정질문에서 "정치적 의사의 표현이 탈출구가 있어야 하는 것도 사실"이라며 난색을 표했다.
그런데, 서울시 계획대로라면 2021년 5월에는 지금보다 3.7배 더 넓은 광화문광장을 갖게 된다. 익명의 서울시의원은 "대선 1년 앞두고 광화문광장을 완공하면 광장은 온갖 구호들이 난무하는 '시위 천국'이 될 것이다, 이래서야 광장이 원래 약속대로 시민 휴식공간 기능을 하겠냐"고 반문했다.
광화문광장에 가기 싫은 이유, 집회·시위로 인한 무질서와 소음
지난 27일 오후 서울시청에서 열린 광화문시민위원회 워크숍 분임토론에서도 '광화문광장에 가기 싫은 이유'로 집회·시위로 인한 무질서와 소음을 꼽는 의견들이 두드러졌다.
서울시는 늦어도 내년 1월에는 공사를 시작하겠다는데 같은해 4월 총선을 앞둔 군소야당 우리공화당이 정치선전 공간으로서의 광화문광장을 비워줄 가능성도 희박하다. 한마디로, 우리공화당 하나를 막지 못해서 국가 대표광장 조성 사업이 표류하게 생겼다. 이 정도면 '우리공화당 나비 효과'라고 해도 크게 틀린 해석은 아닐 것같다.
그러나 광화문광장 관리 책임이 있는 서울시도 이 부분에 대해 딱 부러진 해법을 찾지 못한 상태다.
셋째 이유는 정치적으로 예민한 얘기가 될 수도 있다. 박원순 시장은 오래 전부터 광화문광장 재구조화가 서울에 일으킬 변화에 관심이 많았다. 1월 21일 설계공모 당선작을 발표한 날에도 "이것은 광화문 대역사(大役事)"라고 남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과정에서 광장과 GTX 복합역사를 연결하고, 10차선 도로를 6차선으로 줄이는 것도 '보행친화도시 서울'이라는 신념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서울 도심의 노후경유차 운행 제한, 자전거 하이웨이 건설 등의 정책 목표들도 "자동차 중심에서 보행 친화도시로 바꿔야 서울이 산다"는 생각과 맞닿아있다.
서울시가 밝힌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완료 시점이 '2021년 5월'이라는 게 논란점이다. 차기 대선을 1년 앞둔 이 시점부터 여야 주자들의 대선 캠페인이 본격화된다. 같은 해 7월 이후부터는 박 시장이 보궐선거 부담 없이 시장직을 훌훌 벗어던지고 대선판에 뛰어들 수도 있다. 현재는 행정가라는 불편한 외피를 덮어쓰고 정치 활동에 크고 작은 제약을 받지만 이때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여의도 정치권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이 '청계천 복원'의 성과로 청와대 입성에 성공한 것처럼, 광화문광장이 '박원순의 청계천'이 될 것을 견제하려는 기류가 엄존한다.
'여당 시장'인데도 당·정·청 어디도 안 도와줘
자유한국당 김소양 시의원이 "사업을 반드시 2021년 5월에 마쳐야 하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박 시장은 "일부러 늦출 이유도 없다"고 넘어갔다. 그러면서 "청계천광장 (복원) 때 거의 80% 이상이 반대했는데, 청계천 복원은 굉장히 잘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고 덧붙였다.
박 시장이 미처 얘기하지 못한 게 있다. 청계천이 불과 3년 남짓의 짧은 기간에 복원되는 과정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초당파적인 지원이 있었다. 당시 경찰은 공사 과정에서의 교통 혼잡을 핑계로 청계천 주변의 교통 통제를 안 해줄 기색이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2003년 6월 4일 국무회의에서 "이명박 시장이 자신 있게 하겠다고 준비해 왔으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며 고건 총리에게 관계장관회의를 통해 협조하라고 지시했다(이명박 <청계천은 미래로 흐른다>). "야당 대선주자 좋은 일 시킨다"는 불만 기류를 불식시킨 결단이었다.
박원순은 '여당 시장'인데도 돕는 사람이 당·정·청 어디에도 안 보인다. 행여 끼어들었다가 '특정 대선주자 줄서기'로 비칠까 하는 눈치작전만 치열하다. 서울시 일각에서 "(완공) 시기에 구애받지 않겠다", "아무도 안 도와주면 접을 도리밖에 없다"는 얘기가 나오는 배경에는 '혈혈단신' 서울시의 무력감이 깔려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조국 장관 인선과 한일관계·남북관계 악화 등으로 '급한 과제'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서울시와 행안부의 소모적인 갈등을 푸는 것도 중요한 문제다. 한 사람에게 중요한 결정이 쏠리는 게 대통령제의 숙명인데 어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