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요즘 한일관계를 생각하면 정말로 '가깝고도 먼 당신'이다. 아베 정권에는 현명하게 대응하되, 민간교류는 성숙하게 이어나가길 바란다. 지금도 충분히 잘 대처하고 있다고 생각지만, 더욱 나아가 역사의 슬픈 이야기뿐만 아니라 따뜻한 이야기도 기억하며, 추모할 줄 아는 품격있는 자세로 시국을 멋지게 이겨냈으면 좋겠다. 지난 편에서는 이케부쿠로에 숨겨진 고마운 분들-후세 다쓰지 변호사와 마쓰오카 미도리 여배우-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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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에서는 가나가와현 쓰루미 경찰서(神奈川県鶴見警察署)의 경찰서장 오카와 쓰네키치(大川常吉, 1877~1940)씨를 소개하고자 한다. 경찰서장 오카와씨에 대한 일화는 쓰루미 역사회(鶴見歴史の会)의 하야시 마사미(林 正巳, 1928년생)씨 인터뷰와 1924년도의 사료(史料)인 나카지마 쓰카사(中島司)씨의 저서 <震災美談(진재미담)>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1923년 9월 1일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일어났다. 불안감에 휩싸인 관동지역에는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타서 일본인을 죽이려고 한다", "집을 불태우고, 재산을 도둑질해 간다", "사람을 죽이고, 부녀자를 강간한다" 등의 괴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죄 없는 수많은 조선인의 소중한 생명이 이유 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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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에서 말하는 관동(関東)이란 법률상 명확한 정의는 없으나 일반적으로 도교도(東京都), 이바라키현(茨城県), 도치기현(栃木県), 군마현(群馬県), 사이타마현(埼玉県), 치바현(千葉県), 가나가와현(神奈川県)을 의미한다. 조선인 대학살의 피해자 수는 한국과 일본의 입장이 다소 차이를 보인다.
<독립신문> 사장 김승학(金承學)은 6661명, 제국 시대 정치학자 요시노 사쿠죠(吉野作造)는 2771명이라고 보도하였다. 3배에 가까운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조사내용이 일치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가나가와현(神奈川県)에서 대부분의 학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김승학 사장은 4106명이, 요시노 학자는 1227명이 가나가와현에서 학살되었다고 하였다.
독약으로 의심되는 액체 직접 마셔보인 오카와 서장
무차별 학살이 자행되던 1923년 9월의 가나가와현. 그래도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쓰루미구(神奈川県横浜市鶴見区)에는 한 줄기 따스함이 존재했다. 쓰루미구는 옛날부터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쓰루미 강(鶴見川)은 바닷물과 섞여서 염도가 높았기에 식수로 사용할 물이 부족해 사람이 살기 적합하지 않은 곳이었다. 그런데 1913년 쓰루미구에는 바다를 매립하여 공장을 세우는 장기 대공사가 진행된다. 그러면서 오키나와, 조선, 중국 등에서 인부를 모집했다.
지진이 일어난 다음 날인 9월 2일. 요코하마에서는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탄다" 등의 괴소문으로 이미 수천 명의 조선인이 목숨을 잃은 상태였다. 그날 점심쯤, 쓰루미역 근처의 우물 주위에서 4명의 남성이 자경단(自警団)에게 포착된다. 그들은 쓰루미구에서 일하는 조선인 인부들도 아니었다. 그중 한 명은 수상한 병을 2개 들고 있었다. 자경단은 그들을 우물에 독을 타기 위해 마을에 몰래 들어 온 조선인이라고 확신했고, 4명의 남성을 경찰서로 끌고 갔다.
오카와 서장은 끌려 온 남성들의 억울한 호소를 듣고, 자경단에게 그들은 요코하마에서 온 중국인 피난민이며, 도쿄로 피난을 가던 길에 우물에서 물을 마셨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자경단은 납득하지 않았다. 그러자 오카와 서장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중국인이 가지고 있던 병에 든 액체를 마셨다.
よし、諸君がそれほど疑ふなら、我輩が此の壜の中味を飲んで見せやう、さうしたら毒薬か否かが判る訳だ
좋다, 그대들이 이토록 의심한다면, 내가 이 병이 든 내용물을 마셔보겠네. 그렇게 하면 독약인지 아닌지 판단이 설 게 아닌가.
- 나카지마 쓰카사(1924) <진재미담> p.40/국문번역: 김보예(필자)
한 병은 맥주였고, 다른 한 병은 중국 간장이었다. 한차례 폭풍이 무탈하게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자경단은 조선인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닥치는 대로 경찰서에 끌고 오기 시작했다. 조선인 중에서는 처자식을 잃은 자도 있었고, 자경단에 의해 목숨을 잃은 자도 속출하기 시작했다. 오카와 서장은 더는 무구한 생명이 희생되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다. 그는 남은 조선인을 총지사(소지지, 総持寺)라는 절로 피난 시킨다.
자신의 목숨 걸고 조선인의 결백함을 증명한 오카와 서장
9월 3일, 지역 주민의 조선인에 대한 반감은 더욱더 격해졌다. '요코하마가 전멸할 정도로 대화재가 일어난 것은 바로 조선인이 저지른 업보이다(横浜が全滅するほどの大火災は主として鮮人の為した業だ)'라는 괴소문까지 돌기 시작했고, 천 명이 넘는 자경단이 쓰루미 경찰서를 둘러싸고 조선인을 내놓으라고 성화를 부렸다.
당시 오카와 서장이 보호하고 있던 사람은 조선인 220명, 중국인 70명이었다. 자경단은 보호하고 있는 조선인이 도망쳐 일본인을 해하면 어떻게 할 거냐고 오카와 서장을 압박했다. 오카와 서장은 광기 어린 자경단을 향해, '자신의 배를 갈라' 조선인의 결백함을 증명하겠다고 했다.
我輩も男だ。若し一人でも此処から逃走した者があつたら、我輩潔く君等の前で割腹して申し訳をする。
나도 남자다. 만약 한 명이라도 여기에서 도주하는 자가 있으면, 내가 미련 없이 그대들 앞에서 배를 갈라 사죄를 하겠노라.
-나카지마 쓰카사(1924)≪진재미담≫ p.46/국문변역: 김보예(필자)-
자경단과의 실랑이가 끝나자, 식량 제공이 새로운 문제로 떠올랐다. 오카와 서장은 여기저기에서 쏟아지는 비난을 뚫고 그들을 피난민으로 승인을 받아내어, 식량을 제공하였다.
오카와 서장은 좀더 안전한 보호를 위하여 9월 9일에 피난민 전원을 요코하마항에 정박 중이던 가산마루(崋山丸)라는 배로 이동시켰다. 그날 이동한 피난민은 301명에 이르렀다. 그동안 보호하는 인원은 조금씩 늘어난 것이다. 배로 이동한 후에는 해군이 보호 전반을 담당하였으며, 소문이 누그러들 때까지 보호하였다고 한다.
은혜를 잊지 않은 조선인들
당시 보호를 받았던 조선인 중 225명은 오카와 서장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지진 재해복구에 참여했다. 그리고 관동대지진으로부터 약 6개월 뒤인 1924년 2월 15일에는 오카와 서장에게 한국어로 적은 감사장을 전달했다.
오카와 서장의 인도적인 대처는 오늘날의 한일 민간교류에 어떠한 메시지를 선사하고 있을까? 그 세세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전하고자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광양시민신문>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