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탄 여장군'으로 불리었던 김명시(金命時, 1907~1949) 독립운동가의 집터에 표지판이 세워졌다.
열린사회희망연대(상임대표 임경란)는 10일 경남 창원마산 오동동 문화광장 옆 화단에 표지판을 세웠다. 표지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백마 탄 여장군. 김명시 집터(1907~1949). 항일독립운동기간 : 1925~1945."
열린사회희망연대는 "오늘(10월 10일)이 김명시 여장군의 기일이고, 사람들이 역사탐방을 와서 엉뚱한 곳에서 헤매기도 하여 표지판을 마련하였다"고 밝혔다. 이 단체는 "오는 11월 27일 '순국선열의 날' 서훈결과가 발표 나기 전에 이것이라도 해서 마음이 한결 가볍다"고 했다.
이날 표지판 제막 행사에는 열린사회희망연대 이순일, 김종연, 백남해 공동대표와 김영만 고문 등이 참석했다. 열린사회희망연대는 올해 초 국가보훈처에 김명시 장군의 서훈을 촉구하는 청원을 하기도 했다.
열린사회희망연대는 지난해부터 김명시 장군의 재조명과 기념사업 필요성을 제기해 왔다. 이 단체는 지난해 12월 4일 창원마산 오동동 문화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김명시 장군의 흉상 건립을 요구했다.
열린사회희망연대는 지난해 말 "사람을 찾습니다. '백마 탄 여장군' 김명시 장군의 형제자매 후손(친족)을 찾습니다"라는 신문광고를 냈고, 친인척들을 찾아 지난 8월 오동동 문화광장에서 '만남' 행사를 갖기도 했다.
김명시 장군은 마산공립보통학교를 나왔고, 조선의용군으로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서 '백마 탄 여장군'이라 불리기도 했다.
김명시 장군은 1925년 오빠(김형선)가 가입해 있던 고려공산청년회에 들어가 활동하였고, 그 뒤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유학생으로 가서 공부하다 1927년에 상해로 파견되었으며, 이후 중국 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섰다. 김명시 장군은 하얼빈의 기차역과 경찰서, 일본영사관을 습격했다.
김명시 장군이 해방 이후 서울로 돌아오자 시민들이 몰려와 "김명시 장군 만세"를 연호했다고 한다. 김명시 장군은 해방 후 좌익계열의 조선부녀총동맹 지도부로 활동했고, 남한 정부 수립 이후인 1949년 10월 부평경찰서 유치장에서 사망했다.
김명시 장군의 5형제 가운데 오빠 김형선(金炯善, 1904~1950), 남동생 김형윤(金炯潤, 1910~?) 선생이 함께 독립운동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