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첫눈 휘날리는 백두산을 백마 타고 올라가는 장면이 16일 북한 언론을 통해 전 세계에 전해졌다. 언론들은 대체로 대미관계의 관점에서 이를 보도하고 있다. 미국에 압박을 가하는 한편, 새로운 대미전략의 가능성을 예고할 목적으로 이런 장면을 연출했을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기상조건이 맞았다면, 김정은의 백두산 등정이 17일에 단행됐을 가능성이 높다. 10월 17일은 북한에서 'ㅌ·ㄷ'의 날이다. ㅌ·ㄷ으로 약칭되는 타도제국주의동맹은 김일성 주석이 1926년 14세 나이로 결성했다고 알려진 항일투쟁 조직이다. 1979년 출판된 <조선전사>에서는 이 해를 현대사의 기점으로 설정했다. ㅌ·ㄷ는 그 정도로 중대 의미를 띠고 있다.
17일자 <노동신문>에 실린 '주체의 붉은기는 높이 날린다'라는 기사는 "인류의 리상(이상)인 사회주의·공산주의를 건설하는 것을 투쟁 강령으로 내세운 ㅌ·ㄷ의 결성은 인민대중의 자주 위업, 사회주의 위업 수행의 새 출발을 알리는 력사적 선언"이었다는 김정은의 발언을 소개한 뒤 "조선혁명, 그것은 ㅌ·ㄷ에서부터 닻을 올린 성스러운 혁명"이라고 보도했다.
백설을 맞으며 백마 타고 백두산에 오르던 날, 김정은은 북한 사회가 당면한 고난을 뚫고 전진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런 메시지는 가급적 ㅌ·ㄷ 날에 발표해야 좋겠지만, 첫눈 내리는 날에 맞춰 하려다 보니 일정을 당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력갱생' 강조... 삼지연군에서 흡족한 성과 나왔나
대다수 언론들은 이번 등정을 대미 투쟁의 관점에서 보도하지만, 국제용보다는 국내용인 측면이 더 강했다고 분석할 수도 있다.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지난 5일 열린 북미 실무협상 뒤에 김명길 외무성 순회대사는 "연말까지 좀 더 숙고해볼 것을 미국 측에 권고했다"고 밝혔다.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도 4월 30일 <조선중앙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연말까지 새로운 계산법을 들고 나오지 않을 경우 원치 않는 결과를 보게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처럼 북한 당국자들은 수차례에 걸쳐 '연말까지'를 언급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을 보다 직접적으로 겨냥한 행동이나 메시지는 연말을 전후한 시점에 나타나리라고 기대하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이번 등정이 국내 여론을 겨냥했다는 것은, 이 일이 김정은 고향인 양강도 삼지연군에 대한 현지지도에 맞춰 일어났다는 점에서도 느낄 수 있다. 16일자 <노동신문> 기사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 동지께서 삼지연군 안의 건설장들을 현지지도하시였다'(삼지연군 기사)에 따르면, 김정은은 이날 도시건설 제2단계가 마무리되는 삼지연군의 건설 현장들을 방문했다.
북한에서는 최고지도자의 현장 방문은 '현지지도', 내각 총리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또는 인민군 총정치국장의 현장 방문은 '현지료해'라고 부른다. '현지료해' 때는 현장 상황만 듣고 지시를 내리지 않는다. 현장 상황을 듣는 데 더해 지시까지 내리는 현지지도와 차별화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김정은 정권 초기에 건설현장 같은 곳은 주로 현지료해의 대상이었다. 공장이나 기업처럼 국민경제와 관련된 곳도 대개 다 그랬다. 2011~2014년 기간의 현지료해를 분석한 진희관·진희권의 공동논문 '김정은 시대의 현지료해 연구'(<21세기 정치학회보> 제25집 제3호)에 따르면, 총리·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장·총정치국장의 현장료해 199건 중에서 30%인 60건이 건설현장을 대상으로 이뤄졌다.
건설현장처럼 국민경제와 직결되는 곳에서 현지지도보다 현장료해가 많았던 것은, 경제문제에 대한 최고지도자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 국내경제가 안 좋은 시기였기 때문에, 김정은의 이미지를 보호할 목적으로 총리·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장·총정치국장이 그런 곳에 대신 나타나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와 관련된 곳에 김정은이 현지지도 하는 일이 많아진다면, 북한 내부에서 경제 전망이 좋아지고 있다고 해석해도 될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김정은이 국민경제와 직결되는 건설현장을 현지지도하는 시점에 맞춰, 그가 백마 타고 백설 맞으며 백두산에 오르는 장면이 북한 국내는 물론이고 전 세계로 방출됐다. 이는 삼지연군에서 만족할 만한 성과가 나왔다는 자체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삼지연군 도시건설에 대해 북한 내부에서 높은 평가가 나오고 있다는 점은 위의 삼지연군 기사에도 잘 드러난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동지의 지난 4월 현지지도 과업을 결사 관철할 불타는 일념을 안고 무비(無比, 뛰어난)의 용맹과 위훈을 떨쳐나가고 있는 건설자들의 영웅적 투쟁에 의하여 삼지연군 읍지구 건설이 기본적으로 결속(結束, 종결)됨으로써, 마침내 하늘 아래 첫동네가 사회주의 조선의 강인한 기상인 양 백두대지를 박차고 한 폭의 그림 같이 아름답고 황홀한 새 모습으로 인민의 리상향(이상향), 산간의 리상도시(이상적 도시)로 눈부시게 솟아올랐다."
백두산 아래 첫 동네인 삼지연군에서 도시건설 제2단계가 마무리됨으로써 사회주의국가의 이상향, 이상도시가 만들어지게 됐다는 것이다. 위 기사는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동지께서는 삼지연군 꾸리기 2단계 공사가 전반적으로 잘 마무리되여 가고 있다고 하시면서 삼지연군 읍지구는 볼수록 장관이라고, 말 그대로 천지개벽이 일어났다고 못내 감개무량해하시였다"고 보도했다. 이어 '노동당 창건 75주년인 2020년까지 공사를 마무리하고 삼지연군을 사회주의 무릉도원으로 변화시키자'는 김정은의 당부를 전했다.
삼지연군 현지지도에서 김정은은 이번 공사를 자력갱생의 모델로 높이 평가했다. 미국의 경제봉쇄 속에서 대외무역을 최소한으로 유지하는 가운데 국내 자원 총동원을 통해 자립경제를 지켜나가는 북한 경제체제의 승리를 반영하는 사건이라고 스스로 평가한 것이다.
김정은이 백설 맞으며 백마 타고 백두산에 오르는 광경을 보여준 데는 이 같은 감격과 자신감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은 17일자 <노동신문>의 기사인 '아, 우리 원수님 백마 타시고 백두산정에 오르시였다!'에도 나타난다.
이 기사는 "위대한 내 조국의 래일을 본다"는 북한 사람들의 감격적 반응을 소개하면서 "삼지연군 건설장에서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동지께서 백마를 타시고 백두산 오르시였다는 소식"을 접한 뒤에 북한 사람들이 그런 반응을 보였다고 설명한다. 삼지연군 건설이 김정은의 경제 성과로 인정되고 있음을 반영하는 보도라고 볼 수 있다.
삼지연군을 자력갱생의 이상적 모델로 평가한 김정은은 백두산에 올라서도 자력갱생과 자력부강을 강조했다. 위 날짜 <노동신문>의 또 다른 기사인 '위대한 백두령장의 준마 행군길 따라 필승의 신심 드높이 앞으로!'(준마 행군길 기사)에 그 점이 나타난다.
이 기사는 "백두밀림에 차넘친 자력갱생의 마차소리가 영원한 진군가로 울려퍼지게 하려는 것은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동지의 확고부동한 의지이다"라면서 "지금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동지께서는 자력경생·간고분투의 투쟁 기풍으로 백두대지에 선렬들이 그려보던 사회주의 리상향(이상향)을 일떠세우기 위한 투쟁을 현명하게 이끌고 계신다"라고 칭송했다.
이처럼 김정은의 백두산행은 그의 주도 하에 진행 중인 자력갱생의 성과에 대한 감격과 자신감에 기초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삼지연군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북한 주민들에게 널리 홍보하는 한편, 주민들이 자력갱생에 더욱 박차를 가하도록 권면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북한 주민과 미국 정부에게 던진 중의적 메시지
북한은 자국 언론보도에 대한 외부세계의 과도하리만치 열렬한 관심을 잘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국내용 언론보도 속에도 대외용으로 해석될 만한 메시지를 집어넣곤 한다. 이번 백두산행 보도 역시 그랬다.
위의 삼지연군 기사에 따르면, 김정은은 "지금 나라의 형편은 적대세력들의 집요한 제재와 압살 책동으로 의연 어렵고 우리 앞에는 난관도 시련도 많지만, 우리 인민은 그러한 시련 속에서 더 강해졌으며 시련 속에서 자기가 걸어갈 발전의 길을 알게 되었고 시련 속에서 언제나 이기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또 위의 준마 행군길 기사에 따르면, 그는 "혁명의 승리는 사상과 정신력의 승리, 담력과 배짱의 승리이다. 지금 적대세력들은 우리의 자주권과 생존권, 발전권을 말살하려고 악랄하게 날뛰고 있다"면서 "원쑤들과의 첨예한 대결전에서 사소한 양보나 후퇴는 곧 자멸의 길이다"라고 강조했다.
이런 발언들은 미국의 제재정책에 맞서 양보나 후퇴 없이 자력갱생을 밀어붙이자는 의미로 읽힐 수도 있는 동시에, 지금 진행 중인 북미 협상에서 북한이 양보하지 않고 미국을 압박할 것이란 의미로도 들릴 수 있다.
이는 김정은이 삼지연군 현지지도와 백두산 등정을 통해 북한 주민과 미국 정부에 다중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북한 주민들을 상대로는 자력갱생을 권면하는 한편, 미국 정부를 상대로는 새로운 계산법을 빨리 갖고 오라는 중의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은 삼지연군 현지지도로 얻은 자신감을 기초로 자력갱생의 성과를 홍보하고 이를 재촉하기 위한 의도로 첫눈 내리는 날을 잡아 백마를 타고 백두산에 올라가면서, 북한 주민과 미국 정부 양쪽에 통용될 수 있는 다중적인 메시지를 던졌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