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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전 다시 취직하였다. 작년 오월 퇴사 이후, 아르바이트를 하며 백여 통의 이력서를 돌렸고 몇 군데에서 면접을 보았는데 그중 한 곳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모 회사 콜센터였다.

그쪽 관련 경력은 없었지만 주 5일 근무, 연장 근무와 야근 없고, 2년 계약직 이후 정규직 전환의 기회가 있었다. 그간 야간 근무에, 물류 센터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앉아서 9~6시 근무를 한다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십대 여성으로 편모 가정의 가장이다. 딸, 아들 두 자녀가 있고. 이십대 중반 첫아이를 낳은 이후 쉬지 않고 일을 해왔다. 여행사, 사무보조, 학습지 교사, 카페, 식당, 청소, 공장, 물류 등 다양한 곳에서 근무했다.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어디 있든 사람들은 내 남편을 무척 궁금해한다는 것. 남편이 무슨 일을 하는지, 벌이는 어떻게 되는지, 어떤 차를 타는지, 그래서 사는 집은 자가인지 전세인지, 설마 월세인지(설마 월세이다), 무엇보다 아이는 누가 보는지.

면접관이 시작한 질문은 답변 완료 이후, 일이 시작되어도 선배, 동료들에게 계속 이어졌다. 남편이 있을 때는 그럭저럭 대답했지만 남편이 없고 아이들만 남자 불편했던 그 질문들이 더욱 불편해졌다. 솔직해지자면 사람들은 그 이유와 배경을 궁금해했고 사생활을 지키려면 거짓말을 해야 했다.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는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이번 직장에서는 결혼 여부에 대해 사실대로 대답했다. 이곳에서는 면접 때 결혼과 아이 문제에 대한 질문이 없어(거의 유일했다, 사실 면접에서 이러한 질문은 불법이다) 괜찮았지만, 함께 입사한 동기 네 명만 있을 때면 시시콜콜 사생활에 관한 물음이 훅훅 들어왔다. 

잠재적 불행의 생존자인 동시에 2차 가해자

비슷한 또래의 네 명 중 두 명은 기혼, 두 명은 이혼과 비혼이었다. 이상하게 분위기는 기혼은 정상, 비혼은 조금 이상, 이혼은 완전 이상으로 돌아갔다. 기혼끼리도 한 명은 아이의 나이가 어려 엄마가 가장 필요한 나이에 일하러 나왔다는 타박 아닌 타박을 피해 갈 수 없었다.

마음은 점점 미궁에 빠졌다. 삼십 대 후반에서 사십 대 초반의 여성들이 출근한 자리에서 서로의 비정상성을 하나하나 꼬집으며 지적한다는 일이. 각각의 환경이야 다르겠지만 비슷하게 체감했을 사회적 경험에 비혼이든 기혼이든 여성으로서 공감하며 나눌 이야기가 있을 텐데.

예를 들면, 기혼자는 사회생활하며 아이를 양육하는 고충이라든지, 아이 양육은 엄마가 주가 되어야 한다는, 남편의 직업에 따라 지정되는 아내의 사회적 위치 같은 사실이 된 편견까지. 비혼자 역시 결혼에 대한 압박, 결혼하지 않은 이유가 어떤 결함일 거라는 시선, 주변인의 의미 없는 노후 대비 걱정까지.

네 명만 모여도 이렇게 모두 다른데 정상 같지 않은 정상을 기준으로 하여 다름은 하자라 확정 짓는 건, 그리하여 정상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오라고 독려하는 건 왜일까. 그러한 독려는 혐오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닐까?

우리는 저마다 잠재적 불행의 환경과 상황에서 살아간다. 자신이 어쩔 수 없었던, 원하지 않았던 결과를 감수하며 혹은 그 가능성을 타진하며. 다양하고 복잡한 가정사, 신체적 심리적 질병, 밥벌이의 피로. 그리고 아직은 알 수 없는 세상의 갖은 고통. 누가 자기 자리에서 이 모든 필터링에 걸리지 않고 정상 범주에 들 수 있을까.

정상성의 실물이 존재하는 지도 확실하지 않은 가운데 우리는 모두 잠재적 불행의 생존자인 동시에 2차 가해자가 되었다. 네 아이는 아빠가 없구나, 틀렸어, 이 불행한 사람. 타인의 다름을 꼬집어 불행으로 활성화하는 것. 이것은 어쩌면 자기를 정상성에 넣고 싶은, 자신이 내뱉는 낙인으로부터 본인만은 안전하고자 하는 불합리한 욕망의 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삶의 형태가 존재한다

출근하고 사흘째 되는 날의 점심시간, 콩비지를 떠먹을 때 치고 들어온 '어쨌든 아들은 무조건 아빠가 있어야 해'라는 말에 난 버벅거리며 아이들 아빠가 격주에 한 번 아이들을 봐준다고 대답했다. 식당을 나서는데 체증이 났다. 그의 말뿐 아니라 내 대답 역시 몹시 거슬렸으므로. 아빠가 없다면! 나쁜 부모라면! 이 세상의 아빠가 없는, 혹은 선택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항의에 귀가 따끔거리는 듯했다. 그것은 내 항의이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그 말은 아들이 성장함에 있어, 어린 시절에는 같이 스포츠를 즐길, 2차 성징이 시작되면 몸의 고민을 해결해줄, 어른이 되면 같이 술 한잔할 수 있는 성인 남자, 즉 아빠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냐라는 뜻 같았다. 이 말인즉슨, 딸 역시 엄마가 있어야 한다는 말과 같기도 하다. 어린 딸의 옷을 코디해줄, 생리대를 같이 사줄, 팔짱 끼고 취향을 쇼핑할 수 있는.

이는 얼마나 잘못된 젠더 감수성인 동시에 모성과 부성에 대한 헛된 망상인가. 얼마나 많은 부모가 자녀에게 이 망상대로 '완전한' 언덕이 되어줄지는 모르겠지만, 드라마 속 흔히 보이는 저녁 식사 후 티브이 앞에 둘러앉아 오손도손 과일을 먹는 가정은 결코 현실 가정의 표준이 아니다. 부모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 부모가 있든 없든 아이들은 사회의 보호 속에 건강히 잘 자라날 수 있어야 한다.

엄마든 아빠든 있고 없는 것이 자랑이나 흠이 되지 않도록. 우리를 넘어뜨리는 것은 불행의 내용이 아닌 불행하다는 낙인이니. 어떠한 환경과 상황은 선택이 아니며 '불행한' 곳에서도 살아내야 하는 사람에게 '정상성'을 들이미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이다.

"왜 결혼 안 했어요?"
"그래도 결혼은 해야지, 나중에 어떡하려고. 안정적인 사람 골라 결혼해요."
"네 살? 한창 엄마가 필요할 때인데 어떻게 나왔어요?"
"아들 있지요? 아들은 아빠가 있어야 해. 아빠 노릇 못 해도 무조건."
"한 부모 가정이라 혜택 많이 받겠네."
"애가 셋? 뭘 이렇게 많이 낳았어."
(일주일간 직장에서 식사하며 오간 이야기 중 일부)


생각은 자유롭다. 많은 판단과 결정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이 시선이 되고 말이 될 때 주의해야 한다. 내 생각이 정말 내 것인지, 바깥의 막연한 혐오가 기어들어 온 건 아닌지.

세상에는 다양한 삶의 형태가 존재한다. 매일 계획은 어그러지고 매 순간 상상치 못한 사건이 터지는 이곳에서 너는 틀리고 나는 맞다, 나는 완전하고 너는 모자란다 지시하는 손가락이 이토록 검증 없이 난무해도 되는지, 그렇다면 자신은 그 기준에 온전히 부합하는지 나대는 검지를 붙잡고 더 고민해 보아야 할 일이다.

#정상가족#편부모가정#한부모가정#편견#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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