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아래'는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청년 그룹입니다.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한국 사회에 공론화한 '미안해요 베트남' 20년을 맞이하여 <연꽃아래의 진실은 아직 '확인중'>이라는 기획 연재를 진행 중입니다. 이 기사는 해당 기획 연재의 3번째 기사입니다. - 기자말
1980년 8월 4일, 전두환은 일명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를 발표하며 계엄포고 제13호를 발동한다. 포고령 제13호는 불량배와 같은 폭력 사범이나 사회풍토 문란 사범을 순화 교육 시켜 사회에 복귀하게 한다는 명목으로 내려졌으며, 교육 기간에 지정 지역을 이탈하거나 난동을 벌이면 영장 없이 체포 및 구금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계엄포고령 제13호에 이어 '삼청5호계획'을 발표했고, 이는 '삼청교육대' 설립의 배경이 된다. 포고령 13호 하에 설치된 삼청교육대가 내세운 명분은 '상습폭력배를 소탕하고 밝고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한다'였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달랐다. 폐쇄된 공간에서 무자비한 인권 탄압이 일상적으로 벌어졌다. 무차별적 폭력 행위는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를 낳았다. 불량배, 전과자들뿐 아니라 노숙자나, 대학생, 그리고 반군부적인 정치사범들이 끌려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른바 한국판 아우슈비츠인 삼청교육대를 만든 계엄포고 제13호는 지난해 12월 대법원에 의해 위헌 판결받은 바 있다.
박정희 정권부터 청년 운동가로서 활동을 지속해오던 서영수는 1980년 8월 포고령 13호 발효와 동시에 신군부에게 붙잡혔다. 몇 년에 걸친 수감과 모진 고문의 시작이었다.
서영수는 국가폭력의 피해자였다. 모진 고문을 당한 이후, 몸과 마음의 상처를 입고 출소한 그는 굴하지 않고 1988년도부터 진상규명 운동을 시작했다. 군사정권의 피해자들과 연대하여 그는 책을 쓰고, 시민사회 단체들과 함께했으며 다양한 활동을 개진했다.
2004년에는 박정희 정권의 '통일산업단'과 같은 정치깡패와 삼청교육대로 대표되는 신군부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영화 <포고령 13호 삼청교육대>를 제작하고자 하였다. 영화 제작 지원에 따른 양해각서를 포천시와 체결하고, 배우 캐스팅 작업에 들어가며 영화는 순조롭게 준비되고 있었다. 그런데 촬영을 앞두고 <포고령 13호 삼청교육대>의 세트장이 불타는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베트남 전쟁 당시 참전 군인이었다. 유신과 신군부의 잘못을 고발하려는 시도를 막아선 것이 참전군인이라는 사실을 안 서영수 의장은 망연자실했다. 제작비 80억 원 규모의 영화는 개봉되지 못했다.
14년이 지난 2018년이 되어서야 영화는 <암호명 포고령 13호>라는 이름으로 개봉했다. 참전군인 방화 사건 이후 10여 년이 흐른 지금, 뜻밖에도 그는 베트남 참전 군인들과 함께하고 있다. 연꽃아래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지난 8일 월남참전전국유공자총연맹 사무실을 찾았다. 다음은 서영수 의장과의 일문일답 전문이다.
'암호명 포고령 13호', 1980년 그날 이후의 서영수
- 지난해 영화 <암호명 포고령 13호> 제작 발표회 소식을 들었다. 국가 폭력의 피해자이자 진상규명 운동가로서 '국민연대' 활동을 하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6.25를 겪고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정말 많이 죽었고, 나라의 빈곤은 극에 달한 상황이었어. 박정희 유신정권 때 월남에 젊은이들을 파병하고 미국한테 어마어마한 외화를 원조로 받았어. 그 돈으로 경부 고속도로도 깔고, 각 분야에서 산업화에 그 돈이 쓰였지. 당시에도 경제개발에 그 돈이 쓰이고 새마을 운동을 한다, 양철지붕을 깔아준다고 정권이 선전했었고, 지금도 같은 논리로 유신 정권을 옹호하곤 하잖아. 그런데 당시 우리나라가 월남에 청년들을 파병하고 벌어들인 돈은 사실 당시 군부의 권력 유지와 유신 체제에 쓰인 게 대부분이야. 정식적인 파병도 아니었고, 형식은 자원이었지만 차출되거나 군 내부에서 강요되는 일이 허다했지. 군인들 숫자에 따라 무작위로 미국이 돈을 퍼줬으니까. 전쟁 동안 무려 34만 5천 명이 월남에 파병됐어. 거의 인신매매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어.
이분들도 제대로 된 전투수당도 지급받지 못한 국가폭력의 피해 당사자야. 내가 지금껏 펼쳐온 일들의 주인공이 사실 이분들이라는 생각이 들어. 영남 분들부터 시작해서 열심히 설득했어. 같이 해보자고. 주인공인 여러분들이 일어나야 한다고 집회도 강의도 많이 했지. 정말 많은 분의 의식이 전환되고 현재 '국민연대'에서 계속 나와 함께하고 있어."
- 참전 군인들을 모으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1988년 2월부터 진상규명을 위해 싸워왔어. 내가 유신과 신군부를 고발하려고 만들었던 영화 세트장에 불을 질렀던 것도 월남 참전 군인들이었고. 그들과 함께하면서 힘든 일이 참 많았어. 나한테 칼까지 들이대는 참전군인도 있었으니까. 알다시피 당시 월남전에서 피해를 본 군인들이 흔히 '태극기 부대'라는 관제 데모의 큰 주축이잖아. 나는 그들이 그저 안타까워. 그들은 제대로 된 전투수당도 지급받지 못한 국가폭력의 피해 당사자이고 내가 지금껏 펼쳐온 일들의 주인공이 사실 이분들이니까. 영남 분들부터 시작해서 열심히 설득했지. 주인공인 여러분들이 일어나야 한다고 집회도 강의도 많이 했어. 정말 많은 분의 의식이 전환되고 현재 '국민연대'에서 계속 나와 함께하고 있지.
월남 파병군인 분들과 함께 지내면서 정말 많은 소송을 함께 했었어. 전투수당이든, 신체 상해든. 그리고 이들이 귀국하고 '어떻게 전투수당이 이럴 수 있나'하고 내 걸었던 모든 소송이 패소하는 걸 목격했지. 왜인가 했더니 그게 다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악법인 헌법 29조 2항' 때문이야. 박정희가 참전군인들 비롯한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더는 항의 할 수 없게 만들어 놓은 조항이거든 그게. 헌법에 명시되어 있으니 모든 것을 기각한다고. 어떤 노력도 움직임도 다 소용이 없었어. 나는 이게 박정희 정권 이후에도 현재도 잔존하는 유신 악법이라고 봐. 정당한 권리를 막기 위해 사용되고 있잖아. 그래서 여러 월남 참전군인 단체들과 함께 지금도 꾸준히 유신 악법 폐지를 촉구하는 집회를 하고 있어. 이들에게도 정치적 교섭권을 드려야겠다고 생각하니까."
- 유신 정권 당시 만들어진 헌법 29조 2항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듣고 싶다.
"29조 2항은 특수 임무에 종사하는 자, 군인, 경찰과 같은 이들이 파병되든지, 임무를 수행하든 하다가 순직하거나 장애를 입더라도 제대로 된 소송을 진행할 수 없게 하는 내용이야. 유신정권이 이런 내용을 헌법에 넣어버린 거지.
헌법 제 29조를 바탕으로 하는 게 국가배상법 2조 1항인데 군인, 공무원 등 특수 임무에 종사하는 자들, 그들은 국가의 부름이나 명령을 받고 외국이나 나라에서 순직하거나 장애를 입어도 소송을 진행할 수 없다는 내용이야. 이게 참전 군인들의 소송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거야. 참전 군인들의 저항을 두려워한 것이지. 권리를 되찾으려고 하면 막아버리도록 이 악법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어."
*국가배상법 제2조 제1항 단서는 헌법 제29조 제2항에 근거를 둔 규정이다. 군인, 군무원 등 위 법률 규정에 열거된 자가 전투, 훈련 기타 직무 집행과 관련하는 등으로 공상(公傷)을 입은 데 대하여 재해보상금, 유족연금, 상이연금 등 별도의 보상제도가 마련되어 있는 경우, 2중 배상의 금지를 하는 것이 법의 요지이다. 군인, 공무원 등의 국가배상법 또는 민법상의 손해배상청구권 자체를 절대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규정이므로 이들이 직접 국가에 대하여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다.
박정희가 만든 악법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 참전 군인들을 향한 '태극기 부대'의 이미지가 있다.
"나 또한 참전 군인들을 설득할 때 엄청난 저항을 겪었어. 반세기 이상 그분들의 관점을 지배하고 있으니 바꾸기 어려워. 하지만 진실을 가져다 대면 아무도 뭐라 안 해. 상대적으로 거부하고 하다못해 칼을 들이대는 사람도 있었지만 한순간에 그런 것을 넘기니까 의식이 전환되더라. 귀를 열기 시작한 거야. 나는 태극기 집회가 곧 참전 군인이라는 인식이 바뀔 것이라고 봐. 이곳에 진실이 있으니 사람들은 줄어들지 않고 늘어나기만 할 거야."
- 마지막으로 월남 참전군인 문제와 같은 사안에 대해 바람직한 국가의 대처와 사회의 방향을 알고 싶다.
"참전 군인들이 손주를 볼 정도로 시간이 흘렀지. 그 손주의 자식을 보는 입장이니까. 34만 명이었던 참전 군인들의 가족들까지 합치면 정말 많은 사람이야. 참전 군인들의 명예를 찾아주고 싶을 뿐이야. 70~80대의 참전 군인들은 근대가 아니야, 아직 살아있는 현대의 역사야.
그동안 시민사회에는 여러 단체가 만들어지고 도움을 주고 있지. 2018년 3월 30일 광화문에서 집회했더니 1만 명이 모였어. 그게 기점이 되어 더 많은 분이 연대하고 있지. 하지만 국가의 법은 아직도 바뀌지 않았어. 지금껏 여러 정권이 있었고 여러 기회가 있었는데도 바뀌지 않은 거야. 역사를 바꾸려면 실천을 해야 해. 이제는 국가가 '행동하는 양심'으로 실천해주면 좋겠어."
11월 20일 수요일, 서영수는 참전군인들과 다시 한 번 광장에 섰다. 트럼프 미군 주둔 방위비 증액 요구에 대한 규탄시위를 하기 위해서였다. '행동하는 양심'을 강조했던 서영수는 진실을 요구하기 위한 행동을 계속하고 있다. '태극기 집회' 참가자로 늘 분류되었던 참전 군인들이 입을 열고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 파병은 국가 폭력이었다고, 악법을 바꾸어야 한다고. 이들의 이야기가 베트남 전쟁에 대한 우리의 해석을 확장시키길 바란다.
[기획 / 연꽃아래의 진실은 아직 '확인 중']
① 살아있는 학살 증거, 대한민국은 '유죄'다 http://omn.kr/1lez0
② 무덤에서 나온 한국군 탄알, 그 학살의 기록 http://omn.kr/1lgq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