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서울시장이 3일 오후 7시 국회에서 열린 토크쇼에서 내년 총선 이후 연정 수립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박 시장은 이틀 뒤 라디오 방송에서도 이 얘기를 또 했다.
듣는 사람들 입장에서 '생뚱맞은 얘기'였던 것은 틀림없다. 서울시장은 정치인이기보다는 행정가로 받아들여지고, 그런 사람이 여야가 날카롭게 대치하는 분위기에서 연정 얘기를 계속 꺼냈으니 말이다.
미리 밝히자면, 기자는 박 시장이 연정이라는 화두를 언젠가는 던질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 시점이 이렇게 빠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박 시장은 그냥 행정업무를 챙기려고 서울시장이 된 사람이 아니다.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열망이 그를 시민운동으로, 더 나아가 정치에 발을 담그게 했다. 그런 사람의 눈에 앞으로 가지도, 뒤로 빠지지도 못하고 '꽉 막힌' 국회 상황이 얼마나 답답하게 보였겠는가?
최근 박 시장은 독일 기독교민주당-기독교사회당 연합(아래 기민당)이 사회민주당(사민당)과 2013년 총선 뒤 체결한 합의문을 입수했다. 양측이 4년 임기 동안 할 일을 나열한 합의문은 경제와 복지, 교육, 노동, 에너지, 사회통합, EU, 그리고 연방정부의 운영방식까지 240페이지(한국어 번역본 기준)에 걸쳐 세세한 부분을 짚어냈다.
"2022년까지 독일의 마지막 원전을 정지할 것"이라는 탈원전 담론부터 2015년부터 적용되는 최저임금(시급 8.5 유로)과 근로자파견법 확대 등등 다양한 이슈들이 정리되어 있다. 계약서 만들어놓고도 '문구 해석'으로 날 새우는 식의 싸움은 안 하려는 독일식 합리주의가 묻어나온다.
"의회 내에 설치되는 각종 위원회에서 연정의 참여노선과 의결 사항에 반하는 의사 표명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대목도 눈에 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식의 연정을 시행하려고 하면 당장 '연정독재'라는 반발에 부딪힐 것이다.
어쨌든 이 정도로 깊이 있는 합의를 한 독일식 연정이 박 시장은 꽤 인상적이었던 듯하다. 그가 이 문건을 읽은 사실을 언급하며 '총선 후 연정' 얘기를 꺼낸 이유다.
박 시장이 감명받은 독일의 대연정
2013년 합의문은 "약 50년 전 이루어진 첫 번째 대연정이 당시에 직면한 경제적 도전에 대한 대책으로 경제안정법과 성장법을 통과시켰다"고 기록했다. 양쪽 모두 이득을 본 과거의 경험이 지금의 만족스러운 '대연정 협상'을 이뤄냈다는 평가인 셈이다.
독일 대연정의 역사는 1966년 11월 28일 서독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민당 쿠르트 키징거 총리가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와 칼 실러를 부총리 겸 외무장관과 경제장관에 각각 기용하는 등 내각의 알짜배기 요직들을 내놓기로 한 것이다. 기민당은 전통적으로 중도노선의 자민당을 연정 파트너로 삼아왔는데, 자민당이 예산 문제에 대한 이견으로 연정을 탈퇴하자 정국 안정을 위해 '적과의 동침'을 선택한 것이다.
우리 신문들은 '서독 대연정'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4.19 이후 의원내각제로 정체를 바꿨다가 1년 만에 실패하고 대통령제로 회귀한 상황에서 대연정은 '너무 먼 얘기'로 들린 듯하다.
독일(서독) 정치는 우리나라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편 가르기'와 이념 갈등은 이곳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1875년 4월 22일 창당된 사민당은 "모든 '합법적인 수단'을 활용하여 자본주의를 전복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마르크스주의 강령으로 무장했다. 마르크스주의를 증오했던 히틀러가 집권하자 사민당 당원들 상당수가 유대인과 함께 척결 대상으로 지목돼 모진 박해를 받았다.
나치 독일이 패망한 후 반(反)히틀러 노선의 콘래드 아데나워가 우파의 새로운 기수로 기민당을 이끌었지만, 좌파정당 사민당과의 보혁 대결 구도는 그대로 이어졌다.
전후 두 번째 총선(1953년)에서 아데나워의 기민당은 표면상 마르크스주의를 철회하지 않은 사민당을 겨냥해 "모든 마르크스주의자의 길은 모스크바로 통한다"고 공격했다. 선거 때마다 색깔론 공격을 견디다 못한 사민당은 아데나워 집권 10년 만에 '생산수단의 사회화' 같은 마르크스주의 강령을 벗어던졌다.
기민당은 미국의 지원(마셜 플랜)과 세계 경제의 호황에 힘입어 장기집권했지만, 히틀러 집권 시절 나치의 편에서 좌파를 탄압하거나 수수방관한 우파라는 이미지를 불식시키지 못했다. 1953년 연방의원에 당선된 509명 중 129명이 나치당에서 활동한 이력이 있었다.
'1966년 대연정'의 두 주인공을 디트릭 올로 교수는 <독일현대사>에서 이렇게 소개했다.
"젊고 야심 찬 직업 외교관이던 키징거는 1933년 나치당에 가담했다. 제3제국 시기 외무부의 선전 부서에서 일하는 동안 그는 명목상 당원 자격을 유지했다. 반대로 빌리 브란트는 10대에 나치 독일에서 도망쳤고, 2차대전 시기 노르웨이와 스웨덴에서 망명하는 동안 나치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일제 강점기 해외를 떠돈 좌파 독립운동가와 전직 친일 관료의 '야합'이었지만 이들은 서로의 과거나 노선을 묻어두는 길을 택했다.
개성이 강한 두 지도자의 연합은 오래 가지 못했다. 3년 뒤 총선(1969년)에서 빌리 브란트의 사민당이 중도파 자민당과의 연합해 의회 과반수를 얻게 되자 키징거의 기민당은 다시 야당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대연정의 경험이 헛수고는 아니었다.
물과 불의 조화... 한국에선 왜
1982년 새 총리에 오른 기민당 헬무트 콜 총리는 TV에 나와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계승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념이 다른 정파가 권력을 잡으면 전 정권의 성과를 일체 부정하고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악순환'을 벗어나는 선택을 한 셈이다.
앙겔라 메르켈이 기민당을 이끈 최근 14년 동안에는 원내 1당과 2당이 연합하는 '대연정'이 세 차례(10년)나 성사됐다. '조정의 달인' 메르켈의 개인기 덕이겠지만, 대연정은 큰 잡음 없이 순항했다(대연정 유지에 비판적인 사민당 새 지도부가 최근 등장하며 메르켈은 이들과 재협상을 해야 할 처지가 됐다).
독일인들은 대연정을 '물과 불의 조화'라고 지칭한다. 여야의 긴장 관계 속에서 권력의 감시와 균형을 이루는 의회민주주의의 본질을 거스른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독일의 경험을 복기해 보면, 거대 양당의 연합 정치가 불필요한 감정 소모전을 상쇄시키고 분단 독일이 통일로 가는 분기점이 된 것은 분명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연정(1998년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DJP)은 있었지만 '대연정'은 실현된 적이 없다. 그러나 두 차례의 중요한 시도가 있었다.
2005년 7월 28일 오전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한나라당에 선거제도 개편을 고리로 한 대연정을 제안한 것은 유명하다. 당시 여당 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린 '깜짝 제안'이었다. 그해 8월 29일 경남 통영에서 열린 연찬회에서 유시민·윤호중·이목희·정청래·조경태 의원은 대연정을 지지했지만, 강기정·김영춘·문학진·송영길·우원식·이은영·임종인 의원 등은 반대했다.
노 전 대통령은 "한나라당이 권력을 통째로 내놓으라면 검토해 보겠다"며 구애했지만, 키를 쥔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청와대 회담 자리에서도 "안 된다"고 쐐기를 박았다. 잇따른 재보선의 승승장구로 정권 탈환을 확신하고 있던 한나라당은 노 전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을 '꼼수' 정도로 치부했다.
박근혜 대표와의 회담 다음날 UN 총회 참석 및 중남미 순방을 위해 출국한 노 대통령은 전용기에서 내리면서 "당분간 대연정 얘기는 하지 않겠다"고 말문을 닫았다. 그러나 대통령이 대연정을 공론화할 기회는 영영 찾아오지 않았다. 대연정을 제안한 노 대통령에겐 "야당 기 살려주고 지지층만 분열시켰다"는 멍에가 씌어졌다.
두 번째 시도는 대중들의 기억에 그다지 선명하진 않지만, 2013년 1월 21일 문희상 민주당 비대위원장 입에서 나왔다. 민주당은 2012년 대선에서 졌지만, 새누리당 박근혜 당선자가 경제민주화와 복지 등에서 진보진영에서도 관심을 가질 공약들을 많이 내놓았으니 박 후보 공약과 민주당 공약 중 합의를 도출할 '대선공약실천위원회'를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다. 양측이 대선공약 실천에 대한 포괄적 합의에 이른다면, 박근혜 정부로서는 국회를 무력화 시킬 정도의 거대 의석(127석)을 가진 제1야당의 도움을 받아 순항할 기회였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이 머뭇거리는 사이 2012년 대선 직전에 터진 '국정원 댓글' 사건은 취임 첫 해의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며 정국을 흔들어놓았다. 2013년 4월 21일 문 위원장은 국정원 댓글 수사중 좌천된 권은희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을 언급하며 "양심선언을 한 '광주의 딸'을 당력을 총동원해 지키겠다"고 정권과의 투쟁을 선언했다. 두 달 가까이 회자됐던 '대선공약실천위원회'도 없던 얘기가 됐다.
박 대통령은 임기 내내 이른바 '경제활성화법'을 국회에서 통과시키려 했지만, 민주당의 벽을 넘지 못하자 2016년 총선에서 '판 갈이'를 시도했다. 박 대통령의 구상은 실패했고, 최순실 게이트까지 터지면서 불명예 퇴진했다.
우린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
촛불 집회의 열기에 힘입어 탄생한 문재인 정부도 현재 힘을 못 쓰기는 마찬가지다. 법을 임의로 통과시킬 수 있는 허들이 150석에서 180석으로 올라간 상황에서 선거법을 고쳐서라도 내년 총선에서는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보겠다는 심산이지만,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게 한국 정치다.
물론 내각책임제에 기반을 둔 '독일식 대연정'을 우리나라에 적용하려면 풀어나가야 할 문제점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정치의 난맥상을 근본적으로 풀어보겠다는 논의가 진행된다면 발화자가 누구든 나는 일단 환영한다.
시민운동 시절에는 '아이디어 뱅크'였던 박 시장이 3선 시장을 거치면서 "기대에 못 미친다"는 얘기가 들리는 요즘이다.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제로페이 등에서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마이뉴스>의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 월례 조사에서 하위권을 맴도는 상황은 안타까움이 들 정도다.
그럼에도 기왕 얘기를 꺼냈으니 박 시장이 정치 분야에서도 전인미답의 성과를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독일현대사:1871년 독일제국 수립부터 현대까지>(미지북스), <2013 독일대연정 합의문>(국회도서관), <위기의 시대 메르켈의 시대 : 앙겔라 메르켈 공인 전기>(한솔수북)를 참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