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편집자말] |
"라떼는 말이야(Latte is horse)"라는 신조어가 있다. "나 때는 말이야~"라는 이른바 '꼰대'들의 불필요한 설교를 꼬집는 표현이다. 그런데 이 말을 곱씹어 들어야 할 때도 있다. 몇 년 전 어느 여성 원로 법관의 이야기가 그랬다.
수십 년 전 그가 처음 법복을 입었을 때, 법원에는 여자 화장실조차 없었다. 지금이야 출산 전후 90일 휴가를 법적으로 보장하고 육아휴직도 많이 쓰고 있지만, 산후 한 달을 쉬는 것조차 사치였던 시절이었다. 후배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시절을 넘어, 아니 버텨내, 반 발짝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그들의 최선이었다. 현재 여성 법관은 전체 30%가량을 차지한다. 여자 화장실이 없는 법원 청사는 상상조차 어렵다.
20대 1
그런데 대법원의 시간은 아직 수십 년 전에 머물고 있는 것일까. 억측인가 싶으면서도 10일 공개된 신임 대법관 제청 절차 관련 심사동의자(예비후보자) 명단을 보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조희대 대법관 후임이 될 대법관 예비후보는 모두 21명, 이 가운데 여성은 전현정 변호사 단 한 명이다. 하지만 그는 김재형 현 대법관 배우자다. 아직까지 한국에는 '부부 대법관' 전례가 없다. 이변이 있다면 모를까 다음 대법관은 남성이 유력하다.
법조계 주류가 '서울대 출신 50대 남성(서오남)'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언젠가 한 법원 관계자는 "어쩔 수 없다,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라고 말했다. 맞다. 전현정 변호사가 속한 사법연수원 22기만해도 303명 중 여성은 11명뿐이다. 이 가운데 여성 판사로 법조경력을 시작한 사람은 단 5명이었다. 애초부터 인재풀이 좁긴 하다. 원래 대법관 후보로 추천 받은 55명 중에는 6명이 여성이었지만 전 변호사 빼고는 모두 심사에 동의하지 않은 것도 '20대 1'의 속사정이다.
하지만 대법원은 어떤 곳인가. 잘못된 것을 바로 세우고, 시대의 변화를 읽어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가야 하는 최고법원이다. 사회가 끊임없이 여성, 비법관 출신을 늘려 대법원을 다양하게 구성해야 한다고 요구해온 까닭이다. 김명수 대법원장 역시 2017년 9월 26일 취임사에서 "대법원 판결에 사회의 다양한 가치가 투영될 수 있도록 대법관 구성 다양화를 이루어야 할 것"이라며 공감을 표했다.
여성 대법관의 의미
실제로 김 대법원장은 지금까지 6명의 신임 대법관 후보를 정하며 2명을 여성으로 뽑았다. 그 결과 현직 대법관 14명 가운데 여성은 3명(박정화·민유숙·노정희 대법관)이고, 대법관 4명으로 이뤄진 소부에도 1명씩 여성 대법관이 있다. 현재까지 퇴임 대법관 136명 가운데 딱 네 명만 여성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반 발짝보다 정말 많이 나아갔다. 하지만 충분하지 않다.
여성 대법관의 존재는 어떤 의미일까. '여성 2호' 전수안 전 대법관은 2012년 퇴임사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여성법관들에게 당부합니다. 언젠가 여러분이 전체 법관의 다수가 되고 남성법관이 소수가 되더라도, 여성대법관만으로 대법원을 구성하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전체 법관의 비율과 상관없이 양성평등하게 성비의 균형을 갖추어야 하는 이유는 대법원은 대한민국 사법부의 상징이자 심장이기 때문입니다. 헌법기관은 그 구성만으로도 벌써 헌법적 가치와 원칙이 구현되어야 합니다."
전 전 대법관은 첫 여성 대법관 김영란 전 대법관 함께 진보적 판결로 유명했다. 하지만 이들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성향을 떠나 대법원 내에서 여느 때보다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게끔 노력했기 때문이다. 물론 반례도 있다. 뒤이은 박보영 전 대법관은 쌍용차 해고무효소송에서 노동자 손을 들어줬던 항소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되돌려 보냈다. 김소영 전 대법관은 여성으로선 처음으로 사법행정을 총괄하는 법원행정처장까지 됐지만, 판결로 기억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성비는 중요하다. 남성 대법관 13명과 여성 대법관 1명이 고민하는 현실과 남성 대법관 7명과 여성 대법관 7명이 고민하는 현실은 다르다. 다양한 삶의 경험이 모일 때 토론은 풍부해지고, 더 많은 삶을 아우르는 결론으로 나아갈 수 있다. 최고법원은 이 과정을 거쳐 헌법적 가치와 원칙을 구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20대 1'은 한국 사법기관의 고민이 여전히,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슬픈 숫자다.
서초동 vs. 헬싱키
대법원이 '20대 1' 명단을 발표한 날, 핀란드 의회는 만 34세의 산나 마린 사회민주당 의원을 총리로 공식 승인했다. 핀란드에서 세 번째 여성 총리이자 전 세계에서 최연소 총리인 그는 이날 연립정부 19개 장관직 중 12곳에 여성을 임명했다. 마린 총리를 포함해 내각에서 4명은 30대 여성이다.
지난해 세계경제포럼이 발표한 성 격차지수(Gender Gap Index)에 따르면, 핀란드는 149개 나라에서 네 번째로 성평등하다고 꼽힌 반면 한국은 115위를 차지했다. 두 나라를 단순비교하긴 어렵다. 잘 알면서도 자꾸 서초동을 보며 헬싱키를 떠올린다. 반 발짝이라도 더 따라갈 수 없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