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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어김없이 설은 다가온다. 이제는 9년 차 며느리로서 새삼스레 설날이라고 딱히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는다. 설날에 벌어질 상황을 어느 정도는 미리 전망할 수 있고, 어른들에게 듣게 될 말도 예상할 수 있으니, 사전에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다.

그런데 견디기 힘든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매년 설마다 '복사+붙여넣기' 하듯 똑같이 차려지는 명절 음식들이다. 떡국, 삼색나물, 생선전, 갈비찜. 하나같이 품이 많이 드는 음식이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이 음식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에게 명절은 가족들에게 받는 스트레스에 더해 맛없는 음식까지 먹어야 하는 날인 것이다.

명절 음식을 그리 반가워하지 않는 사람이 나뿐 만은 아닌지, 음식들은 매번 너무 많이 남는다. 어른들은 집에 돌아가는 식구들에게 남은 음식들을 싸서 보내지만, 음식 보따리를 양손에 잔뜩 든 식구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떨떠름해 보인다.

"아이, 안 주셔도 되는데…"

솔직히 말하면 내가 마지못해 두 손 가득 들고 가는 것들은 그대로 음식물 쓰레기가 될 운명이다. 혹은 봉지째 냉동실 깊숙이 처박혀 그대로 잊히거나. 어느 쪽이든 매우 슬픈 일이다. 하루 종일 허리와 무릎을 혹사 시키고 질리도록 기름 냄새를 맡으며 만든 음식들인데 이렇게 버려지다니.

하지만 우리 식구들 중 그 누구도 남은 생선전을 넣고 끓인 '전찌개'를 좋아하지 않으며, 명절 연휴 내내 끼니 때마다 먹었던 나물을 또 먹고 싶어 하지 않는다. 게다가 나물들은 어찌나 빨리 상하는지. 그냥 집에 가서 청양고추 팍팍 썰어 넣고 라면이나 얼큰하게 끓여 먹고 싶은 생각뿐이다.

설날에 먹는 떡국의 의미는 무병장수와 풍요로움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길게 뽑은 가래떡을 엽전 모양으로 썰어 먹는 데 있다. 그렇다면 그게 꼭 떡국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길게 뽑은 가래떡을 엽전 모양으로 썰어 매콤 달달한 떡볶이를 만들어 먹으면 안 되는 것인가. 게다가 나의 시부모님과 친정 부모님을 비롯한 모든 가족들이 떡볶이를 좋아하는데.    

하지만 전통을 중히 여기는 부모님에게 이번 설에는 떡국 대신 떡볶이를 해먹자고 말할 용기가 나에게는 없다. 아쉬운 대로 대리만족을 할 수밖에. 이럴 때 떠오르는 책이 있으니, 이국의 강렬한 향신료 냄새가 가득한 뜨거운 소설, 멕시코시티의 작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이 바로 그것이다.

요리책이자 연애소설이자 성장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민음사(2004)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민음사(2004) ⓒ 민음사
 
이 책을 간단히 설명하기는 정말 어렵다. 이건 훌륭한 요리책이기도 하고, '애정 만세!'를 외치는 뜨거운 연애 소설이기도 하고, 기가 막힌 출생의 비밀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막장 드라마이기도 하고, 수동적이기만 하던 주인공 티타가 드디어 "노(NO)!"라고 외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그러나 감히 장담할 수 있는 것은, 그중 어디에 초점을 맞춰 읽든 재미는 물론 멋짐이 폭발하는 소설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명절 스트레스를 시원하게 날려버리기엔 충분하다는 뜻이다.

엄마 배 속에서부터 양파 냄새를 맡으며 부엌 식탁 위에서 태어난 티타는 가족 중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 음식을 완벽하게 만들어 낼 줄 아는 유일한 사람이다. 비록 바깥 세상의 일에 대해서는 무지하지만 부엌과 텃밭, 과수원에 관련된 것이라면 모르는 게 없는 우리의 주인공 티타. 부엌은 티타를 구속하는 감옥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 그녀는 완전히 자유롭다.

소설 속 12개의 챕터는 독특하게도 1월부터 12월까지 매월 한 가지 레시피와 요리법을 소개하며 시작하는데, 문장을 어찌 그리 맛깔나게 쓰는지, 읽는 내내 향긋한 오레가노와 화사한 장미 향이 코끝에 맴돌며 입안엔 저절로 군침이 돈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궁금했던 음식은 '호두 소스를 끼얹은 칠레고추 요리'다.
 
기름을 약간 두르고 양파를 볶는다. 투명해질 때까지 볶은 다음 고기 간 것과 커민, 설탕을 조금 집어넣는다. 고기가 노릇하게 익으면 복숭아, 사과, 호두, 건포도, 아몬드, 간을 한 토마토소스를 넣는다. 다 익으면 소금을 적당량 뿌리고 국물이 졸아들 때까지 불 위에 둔다. 칠레고추는 따로 구운 다음 껍질을 벗겨낸다. 그리고 나서 한쪽을 열어 씨와 줄기를 빼낸다. (244~245쪽)

호두 소스를 끼얹은 칠레고추 요리는 맛있어 보이기만 한 게 아니라 정말로 맛있었다. 티타도 이렇게 맛있게 요리한 적은 없을 정도였다. 칠레고추의 초록색과 호두 소스의 하얀색, 석류의 빨간색이 어우러져서 칠레고추 요리는 자랑스러운 멕시코 국기의 색깔을 나타내고 있었다. (252쪽)

하지만 '집안의 막내딸은 평생 어머니를 돌봐야 한다'는 집안의 전통 때문에 티타는 결혼은 물론 연애도 하지 못하는 가여운 신세다. 그런 그녀 앞에 '너무나 올바르고, 남자답고, 너무너무 사랑스러운' 페드로가 등장한다.

페드로를 향한 사랑에 애달픈 티타는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게 되고, 그녀가 만든 음식에는 페드로를 향한 그리움과 뜨거운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마술처럼 먹는 이들에게도 전달된다.

이왕 전을 부칠 거라면

9년 전 내가 한창 결혼을 준비할 때, 부엌에서 엄마가 내게 요리를 가르쳐주며 자주 하던 말이 생각난다.

"음식을 만들 때 나쁜 생각을 하면 안 돼. 기분 나쁜 상태에서 만든 음식은 짜고 맛이 없어. 기분이 안 좋거나 몸이 안 좋을 때는 차라리 음식을 안 하는 게 나아. 음식을 만들 때는 항상 좋은 기분으로, 좋은 생각을 하면서 만들어야 돼. 그래야 먹는 사람한테도 좋은 기운이 전해지는 거야."

그래, 이왕 전을 부치고, 부엌에서 지지고 볶고 할 거면 착한 마음으로 손끝에 사랑을 가득 담아보는 거다. 올 한 해도 무탈하길, 가족 모두 건강하길. 소설에서처럼 나의 기도가 음식을 통해 가족들에게 전해질 거라 생각하면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온기가 차오른다.

그렇다고 서운하고 억울한 마음이 완전히 없어지진 않겠지만, 그새 부쩍 늙은 부모님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면 내가 언제까지 시어머니와 친정엄마가 만들어준 음식을 먹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시어머니와 친정엄마가 알려준 대로 아무리 열심히 만들어봐도 나는 결코 그 맛을 내진 못할 것이다. 그러니 떡국 대신 떡볶이가 먹고 싶어도 툴툴대지 말고 두 엄마의 손맛이 가득 담긴 음식을 먹을 수 있을 때 열심히 먹어둬야지. 
 
엄마는 매년 크리스마스 파이를 만들어주시곤 했었다. 엄마……! 엄마가 만든 음식 냄새와 맛이 너무나도 그립다! 음식을 만들면서 엄마와 나눴던 대화, 엄마가 만들어주시던 크리스마스 파이가 너무 그립다! 내가 만든 크리스마스 파이는 왜 절대 엄마 것처럼 나오지 않는지 정말 모르겠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파이를 만들 때 왜 그렇게 눈물이 나오는지도 정말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티타 이모할머니처럼 양파에 민감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티타 이모할머니는 누군가 그녀의 요리법으로 요리를 하는 동안은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259쪽)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민음사(2004)


#달콤쌉싸름한초콜릿#라우라에스키벨#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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