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릴 수 있었는데 못 살렸기 때문에, 모든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된 거예요."
봉준호 감독이 연출한 영화 <기생충>과 더불어 제92회 미국 아카데미에서 한국 최초로 단편 다큐멘터리 후보에 지명된 영화가 있다. 이승준 감독이 연출한 세월호 참사 다큐멘터리 <부재의 기억>이다.
<부재의 기억>은 세월호 참사가 처음 시작됐던 2014년 4월 16일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영화는 처음 배가 기울었을 때 배 안의 승객이 119 상황실에 전화를 거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승객은 다급하게 "배가 바다에 가라앉고 있다, 이 배의 이름은 세월호다"라고 말한다. 119 상황실에서는 신고를 한 승객에게 배의 위도와 경도를 물어본다. 세월호 참사의 시작이다.
<부재의 기억>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시점부터 시간 순서대로 꼼꼼하게 '국가의 부재'를 보여준다. 아이들이 선내에서 찍은 영상이 나오고 민간 잠수사들이 세월호 선내에 진입하는 과정이 나온다. 거기에 국민을 보호해주리라 믿었던 국가는 없다. 대신 영화에는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는데 그렇게 구하기가 어려운지"를 묻는 대통령이 나온다.
이 영화는 기존에 나왔던 세월호를 다룬 많은 영화들처럼 진실 규명을 시도하는 영화는 아니다. 이승준 감독은 "치유되기 힘든 사회적 참사로 인한 고통의 근원을 들여다보자는 생각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 '고통의 근원'에는 "구할 수 있었는데 구하지 못했다"는 감정이 남아있다.
"국가의 부재 때문에 살릴 수 있었는데 못 살렸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거기서부터 시작됐다. 그래서 가슴이 꽉 막히도록 고통스러운 거다.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사고가 아니라는 게 극명하게 드러난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기리는 상징색인 노란색 털실로 만든 나비를 스웨터에 달고 온 이승준 감독은 간혹 대답을 하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22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수동 인근에서 그를 만나 영화 <부재의 기억>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인터뷰 당일 세월호 유가족들이 이 감독의 사무실을 찾아 선물과 편지를 건넸다고 한다.
"노미네이션 되고 싶었다"
|
▲ 한국 다큐 최초 아카데미 노미네이트 오른 ‘부재의 기억’ 외국 관객의 반응은?
|
ⓒ 유성호 |
관련영상보기
|
<부재의 기억>을 포함해 아카데미 단편 다큐멘터리 후보에는 총 다섯 편이 올라갔다. 이 중 네 편은 미국 작품이다. 세월호 참사 다큐멘터리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지만 단편 다큐멘터리 중 미국 작품 외에 후보 지명된 유일한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뜻 깊다.
이승준 감독에게 한국 최초로 아카데미 단편 다큐멘터리 후보에 지명된 소감을 물었다. 담담한 답이 돌아왔다.
"지난 2018년 9월에 영화를 완성하고 세월호 유가족들 앞에서 상영회를 먼저 열었다. 영화 속에서 배가 나오니 한 두 분씩 상영회장을 나가시더라. 힘드니까.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유가족 한 분이 '세계에 좀 많이 알려주세요. 그거 하나 바랄게요' 그러시더라. 아시아에서 만든 작품을 노미네이션(후보 지명)시켜줄까 싶었기에 예상하지 못했다. 노미네이션 되고 나서 좋았던 건 그 약속을 지켰기 때문이다. 쇼트리스트(예비 후보)에 올랐을 때는 정말 (최종 후보로) 노미네이션 되고 싶었다. 차이가 크다. 훨씬 더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더 알려진다. 다행이다 싶다. 다행이다."
어쩌면 <부재의 기억>은 아예 다른 주제로 만들어질 뻔했다. 이 감독은 2016년 말 미국 다큐멘터리 제작단체 '필드오브비전'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촛불집회와 관련된 단편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그는 같이 일하는 감병석 프로듀서와 논의한 끝에 세월호 참사 다큐멘터리 제작을 역제안했다. 세월호 참사와 촛불정국이 긴밀하게 연결돼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프로듀서가 세월호 참사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다큐멘터리로 많이 만들어졌지만 그것과 별개로 계속 말해야 한다고 말이다. 고통이 있고 그 고통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고. 필드오브비전에서 제안이 온 뒤에 세월호유가족협의회를 만났고 협의회에서도 사고가 일어났던 때를 담담하고 차분하게 바라보는 작품을 찾고 있었다. 다행히 결이 맞았다."
이 감독은 2014년 4월 16일 참사 당일, 자신이 무얼 하고 있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다큐멘터리 편집 작업에 한창이었다. 다큐멘터리를 만들던 동료들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진도로 갔지만 그는 뉴스를 보는 것조차 힘겨웠다. 당시 중학생이던 딸 때문인지 교복 입은 애들만 봐도 견디지 못했다. 진도까지 가서 카메라를 들고 가족들을 찍을 자신도 없었다. 그는 당시 세월호를 기록했던 416기록단에 참여하지 못한 데 대한 "마음의 빚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이 감독은 다시 한 번 2014년 4월 16일로 돌아가보고자 했다. 그는 처음부터 고집스럽게 사고가 났던 시간과 영상을 정확하게 일치시키고자 했다. "처음 생중계를 본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보는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세월호 생중계를 보면서 국민들이 안타까워하고 힘들어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자꾸 잊는 것 같다. 잊어버리고 기억하지 못한다. 한국 분들에게도 영화를 보여드릴 기회가 있었는데 많이 본 그림이고 모르던 사실이 나온 것도 아니었기에 반응이 뜨겁진 않았다. 아마도 익숙해서 그런 것 같다.
반면 미국 관객들이 있는 상영회를 가면 명확한 반응이 나오는 장면이 있다. 세월호 선장이 먼저 배에서 탈출하지 않나. 그러면 웅성웅성댄다. 한국어로 하면 '어? 저거 어떡해?' '미친 거 아니야?'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중간 청와대에서 계속 세월호 영상자료를 요구한다. 그럴 때도 웅성웅성댄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행위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불을 켜면 외국 관객들은 훌쩍대고 눈물을 닦고 눈이 빨개져 있다. 끝나고 나서 내 손을 꼭 잡으면서 '우리도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국가가 기능을 제대로 못해서 국민들이 죽기도 하고 고통받는다. 그건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가 아니다. 혹자는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인데 국외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느냐고 묻는다. 이건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란 거다. 고통이 국가의 부재에서 비롯됐고 이는 세계 어디서든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 공통의 이슈로 볼 수 있다. 그 아픔을 잘 공감해주시는 것 같다."
국내외에서 약 240만 명이 영화 <부재의 기억>을 봤다. 이 감독에게 좀 더 긴 영화로 만들어 한국 극장에서 개봉할 생각은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개봉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영화가 짧기 때문에 세월호 유가족 분들이 간담회에 가실 때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이 영화를 보여주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잘 활용되고 있구나 싶었다"라며 "긴 버전을 만들면 아예 다른 영화가 되기 때문에 계획에 없다"고 덧붙였다.
이승준 감독은 아카데미 회원들에게 영화 <부재의 기억>을 홍보하기 위해 1월 마지막 주 미국으로 출국한다. 제92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은 다음달 9일에 열린다. 현재 <부재의 기억>은 유튜브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