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가 올해 창간 20주년을 맞아 '나의 스무살' 기사 공모를 진행합니다. 청춘이라지만 마냥 빛날 수는 없었던, 희망과 좌절이 뒤섞인 여러분의 스무살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편집자말] |
어머님 추모예배 5주기를 보내고 입춘을 앞둔 날, 집 정리를 하다가 대나무 살을 엮어 만든 작은 상자를 발견했다. 상자 안에는 어머님이 남겨두신 씨앗이 있었다. 씨앗의 모양만 보고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 뿌려봐야 할 일이다.
씨앗도 철이 있으니 운에 맡길 수밖에 없을 터이다. 그래도 완연한 봄이라면, 적어도 새싹이라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싹이 트면 비로소 그들이 어떤 씨앗인지 알 수 있을 터이다. 그러면 그 쌉싸름한 싹을 샐러드로 먹으며 어머니를 추억할 것이다. 혹여라도 운 좋게 철 맞게 싹을 낸 것이라면, 잘 키워서 꽃도 피워 씨앗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의 씨앗 1대, 2대, 3대 이어가게 해야지.
올봄에는 나의 작은 텃밭에 정성을 다해 어머님이 남겨두신 씨앗을 뿌리고, 또 씨앗을 받을 수 있도록 키워낼 것이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은퇴 후, 나의 꿈대로 작은 텃밭이 딸린 집을 짓는다면 나는 이런 것들을 심어 거둘 것이다.
무, 상추, 근대, 쑥갓, 겨자, 시금치, 열무, 양배추, 케일, 당근, 배추, 실파, 대파, 부추, 마늘, 양파, 땅콩, 토마토, 작두콩, 완두콩, 오이, 호박, 파슬리, 브로콜리, 오이, 호박, 들깨, 감자, 당근...
은퇴한 노부부가 살 수 있는 이십여 평 되는 작은 집은 직접 수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 높지 않은 나지막한 집, 지붕도 완만하면 좋을 것이다. 집은 돌담으로 둘러쳐 있고, 돌담 쪽문으로 나가면 이백여 평의 밭이 펼쳐진다. 그 이상이면 나의 능력을 벗어날 것 같고, 그보다 작으면 식탁에 오를 채소의 70% 정도를 자급자족 하고자 하는 나의 꿈을 이룰 수 없다. 밭 한쪽에는 30여 평 정도 되는 온실이나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겨울철에도 푸른 채소를 식탁에 올릴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열거만 해도 시가 되는 삶의 단어
적게 먹고, 소박하게 살면 그리 큰돈을 들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으므로, 자본의 노예가 될 일도 없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연금이 고갈되지만 않는다면, 노부부가 둘이 살 수 있는 최소한의 품위유지비로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하루하루 식탁에 올릴 것을 거두는 것으로 만족하고, 밭에서 나는 것은 이웃들과 나눌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활이 가능하려면 시골이어야 하고, 시골에는 내가 밭에서 키우는 것들은 지천일 수도 있으니, 사랑하는 아이들과 도시에 사는 친구들과 나눠야할 것이다. 내가 먹고 사랑하는 이들이 먹을 것이니, 당연히 화학비료나 농약을 사용하면 안 될 터다. 유기농 농사를 지으려면, 퇴비를 만들어야 할 것이고, 퇴비를 만들려면 남은 음식물이 좋은 재료가 될 터이니 우리 집에는 '음식물쓰레기'라는 단어가 없을 것이다.
몇 가지 빠진 것들이 있지만 다시 한 번 써본다.
무, 상추, 근대, 쑥갓, 겨자, 시금치, 열무, 양배추, 케일, 당근, 배추, 실파, 대파, 부추, 마늘, 양파, 땅콩, 토마토, 작두콩, 완두콩, 오이, 호박, 파슬리, 브로콜리, 오이, 호박, 들깨, 감자, 당근...
이것들은 어째서 열거만 해도 시가 될까? 마치 꽃 이름을 하나하나 적는 것 같다. 꽃의 이름도 적기만 해도 시가 되니까.
노부부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일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물론, 어떤 날은 종일 일을 해야 할 날도 있겠지만, 그런 날은 집에 돌아와 씻고 누우면 단잠을 이룰 터이니 뭐가 문제란 말인가? 그리고 농사일이라는 것이 매일매일 바쁠 수는 없는 것이므로, 채소들이 자라 식탁에 올리기 시작하면 꽤 많은 시간이 남을 것이다.
그 시간엔 아내와 두 손을 잡고 산책을 하며 자연의 소리도 듣고, 감동을 주는 것들을 사진에 담을 것이다. 그리고 조용한 음악을 들으며 독서도 하고, 그 나이에서만 느끼고 알 수 있는 것들을 글로 남길 것이다. 그렇게 살아간다면, 도시에서 퇴물 취급당하지 않고도 품위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틈나는 대로 하는 밭일은 온몸을 움직이는 운동이 될 것이니 별도로 '운동시간'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휴가철이 되면, 아이들이 모여들 것이다. 그러면 그들과 함께 작은 연주회를 열 것이다. 가만 생각해 보니, 지금도 우리 가족이 모여서 다룰 수 있는 악기들이 제법 된다. 피아노, 기타, 베이스기타, 드럼, 팬 플루트, 첼로, 하모니카 연주가 가능하니 손주들도 두어 가지 악기를 가르치면 훌륭한 연주회를 열 수 있겠다. 이 날은 이웃을 초청해서 잔치를 벌여야지.
그리고 은퇴 후, 노년의 삶을 살아가기 전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받아들이는 훈련을 해야겠다. 죽음이란, 여기서 저기로 옮겨가는 것뿐이니 뭐가 그리 두려울 것이 있겠는가?
우연히 발견한 어머니의 유품을 보면서 나도 그렇게 어머니의 나이가 될 것이고, 어머니가 가신 곳을 향해서 갈 것을 생각하게 됐다. 꿈은 꾸지만,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고, 어쩌면 소박한 삶을 빙자한 온갖 풍요를 누리는 삶을 추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꿈은 꾸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의 스무 살 꿈은 터무니없이 크고 막연했다
오마이뉴스가 올해 창간 20주년을 맞아 '나의 스무살' 기사 공모를 진행했다. 왜, 하필이면 20년 전이 아니고 '스무 살'이라고 했을까 원망스러웠다. 왜냐하면, 스무 살 때, 그 인생의 꽃다운 시기에 내세울만한 별다른 꿈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스무 살이었던 1982년, 그때는 1980년 광주를 짓밟은 군부독재가 다스리던 시절이었다.
꿈이라는 것이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안정적인 삶을 살거나, 갑부가 되는 그런 꿈 정도였다. 낭만적인 꿈이라면, 대학가요제에 나가는 꿈이요, 좀 더 대의적인 꿈이라면 '민족통일, 민주화'같은 것이었지만, 당시 군부독재의 서슬 퍼런 감시 앞에서 그 꿈조차도 무기력했었다. 그러니 꿈이랄 것 없는 스무 살 시절이었다.
만일, 1980년 그 스무 살 시절에 '은퇴한 노부부' 어쩌고 하는 꿈을 꿨다면, 아니면 그런 꿈을 누설했더라면 친구나 가족들의 반응이 어떠했을까? 그것도 꿈이냐고 타박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의 스무 살 꿈은 터무니없이 컸고, 막연했다.
그리고 그런 크고 막연한 꿈이 오늘날의 '맘몬(부, 재물이라는 뜻으로 신과 대립되는 우상 가운데 하나)을 숭배하는' 괴물사회를 만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 당시 스무 살이었던 이들이 그 유명한 386세대요, 1987년 6월 항쟁의 주역이요, 요즘 정치판에서 나름 얼굴 알리고 있는 이들이 아니런가?
지금 돌아보면 '스무 살' 시절에 소박한 꿈을 꾸며 구체화했더라면, 은퇴 후 꿈꾸는 삶을 앞당겨서 살았을 터이고, 그런 삶을 살았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인간다운 매력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스무 살 시절에 꾸었던 막연하고, 너무도 큰 꿈에 대한 후회다. 그때는 뭔지도 모르면서 '젊은이여, 대망을 가져라!'를 젊음의 특권으로 알았으니까.
그러나 이제 안다. 꿈은 좀 작아도 되고, 소박해도 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렇게 거창하지 않아도, 맘몬의 유혹만 잘 이겨내면 무궁무진하게 풍요로운 삶이 손짓하고 있다는 것도. 그리고 그것이 그저 낭만적인 생각이 아니라는 것도.
스무 살 시절을 사는 청춘 중에서 이런 씨앗들을 아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무, 상추, 근대, 쑥갓, 겨자, 시금치, 열무, 양배추, 케일, 당근, 배추, 실파, 대파, 부추, 마늘, 양파, 땅콩, 토마토, 작두콩, 완두콩, 오이, 호박, 파슬리, 브로콜리, 오이, 호박, 들깨, 감자, 당근....
'나의 스무 살', 젊기만 했지 꿈다운 꿈을 꾸지도 못하고 살았던 시절이었다. 요즘 스무 살 청춘들도 여전히 다르지 않은 듯해 마음이 아프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 창간 20주년 '나의 스무 살' 공모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