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제(미제국주의)와 대결해서 70년이 넘었다. 싸움은 힘이 강한 사람이 이기게 돼 있다. 힘이 약한 사람이 이기는 법이 없다. 우리는 어떤 힘을 갖고 미제와 대결했나. 우리한테는 단합된 힘이 유일한 무기이고 그것이 승리를 담보하는 것이다."
비전향 장기수 임방규(88) 선생이 강조한 말이다. 임방규 선생이 최근 책 <비전향장기수 임방규 자서전(상‧하)>과 <임방규의 빨치산 전적지 답사기>를 펴내고, 29일 저녁 민주노총 경남본부 대강당에서 강연을 했다.
이날 행사는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경남본부(대표 김영만)와 (사)하나됨을위한늘푸른삼천(이사장 이경희)이 마련했다. 200여석의 객석이 거의 다 채워졌다.
전북 부안 출신인 임 선생은 전주공업학교를 수료하고 한국전쟁이 나자 유격대에 지원했고 1950년 10월 임실 성수산으로 입산했다. 1952년 1월 체포된 그는 사형 언도를 받고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1954년 3월 재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4‧19혁명의 영향으로 1960년 10월 징역 20년으로 감형되었으며, 1972년 7월 만기 출소했다. 또 그는 사회안전법에 연루되어 1977년 10월 재수감되었다가 사회안전법이 폐지되면서 1989년 석방되었다.
그러니까 임방규 선생은 총 32년간 감옥살이 한 것이다. 1977년 4월 결혼했던 그는 '민중탕제원'을 운영했고, 2000년에 통일광장 대표를 지냈다.
광주감옥 생활부터 회상... "조국통일에 기여하는 게 애국"
강연에서 임방규 선생은 광주감옥 생활부터 회상했다. 당시 그곳에서 사형 언도를 받은 200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고, 한 달에 너댓명씩 들어온 순서대로 사형이 집행됐다고 한다.
"폭동을 일으킬까봐 경찰과 군인이 같이 수용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방 안에서 제압하려고 했던 것이다. 우리는 수갑을 다 차고 있었지만, 그들은 수갑을 차지 않았다. 저녁 시간에는 매일 오락을 했다."
임 선생은 "정전협정이 있고 난 뒤부터 2개월 동안은 사형 집행이 없었다. 2개월 뒤부터 한 번에 40~50명씩 두 달에 걸쳐서 학살되었다"며 "학살을 많이 하니까 광주 시민들 사이에서 여론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공동묘지가 하나 더 생기는 것이기에 여론이 분분했다"고 말했다.
이후 재심 등을 거쳐 7명이 살아남았고 그 속에 임 선생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람이 불시에 사고로 죽는다고 하면 모르지만, 수명을 다하고 서서히 죽어 간다면, 어렸을 때부터 살아온 전 과정이 회상된다. 그런데 사실상 죽음 앞에서는 그 전에 옷 잘 입고 쌀밥 먹고 했던 게 하등의 값어치가 없다.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자기 민족과 노동자‧농민들을 위해, 그리고 자기가 몸담고 있는 단체의 발전을 위해 어려움을 극복하고 돌파해 나간 게 아름답게 회상이 되는 것이다."
임 선생은 "노동운동을 비롯해 항상 운동 선상에서 활동하다 보면, 어려움은 노상 있는 것"이라며 "어려움을 올곧게 돌파하다보면 조국과 민족에 공헌할 뿐만 아니라 개개인이 발전하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밟지 않고는 사람이 성장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조상들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사람 3명이 뜻을 합치면 귀신도 이긴다는 옛말이 있다. 세 사람이 하나로 뭉쳐지면 힘이 3개가 되는 게 아니고 10개가 되고 20개도 된다. 그러기에 우리가 단합해야 하는 것이다."
3년 전 서울에서 열린 '노동자대회' 때 했던 발언을 떠올린 임 선생은 "생산에 직접 참여하는 노동자, 농민이 일손을 놓고 사흘 동안만 지내보자. 그러면 세상이 바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분명히 우리한테 힘이 있다. 그런데 그런 힘을 한데 모아 내지 못하니까, 거대한 힘으로 발전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지난 70년 동안 단체를 만들어 놓으면 해체되고 하나로 되지 못했다"고 했다.
"어떤 경우라도 우리 힘을 하나로 모아 나가야 한다. 그것이 이루어지면 우리가 이기는 것이다. 70년 동안 생각의 차이가 있을 수 있고, 전략과 목표가 다를 수 있다. 외교권이 침해 받지 않고 자주적으로 통일되는 것을 열망하고 있다. 우리의 투쟁과 활동이 통일과 연결되어야 한다. 일제 때는 일본을 이기기 위해 싸웠듯이, 분단된 조국에서는 통일에 기여하는 게 애국이다."
임방규 선생은 "작은 것이라도 서로 폭넓게 포용하고 사랑해야 한다. 노동자, 농민의 충실한 아들딸로서 사는 것이, 먼 훗날 자기가 살아온 과거를 돌아보면 흐뭇하게 생각될 것이고, 우리를 한없는 기쁨으로 충만하도록 만드는 원천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얼마 전 한 장기수 선생과 산책하다 나눈 대화가 생각난다. 서로 '우리는 잘 살았다'고 했다"고 말했다.
"담양 출신의 빨치산 친구가 있다. 그는 애인과 같이 입산했다. 산에서 애인의 손을 잡고 가슴에 댔더니,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고 한다. 그런데 애인이 포탄을 맞아 가슴이 없었다고 한다. 그때 손을 빼면 애인의 마음이 아플까봐 그대로 만져주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 언제 죽을지 모르는 빨치산 투쟁을 정리하고 애인을 데리고 내려가서 살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고 한다. 그 뒤에는 잠시이기는 하지만, 당시 왜 그런 못된 생각을 했는지 자기비판을 했다고 한다."
"일할 수 있을 때 조국을 위해 마음껏"
임방규 선생은 "일할 수 있을 때 조국을 위해 마음껏 일하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저는 제 나름대로 노력했다. 광주감옥에 있을 때 동지들과 했던 약속을 지켰다. 당시 사형 집행 받으러 가던 동지들이 나중에 누군가는 살아남아서 자기들의 이야기를 기록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책을 냈다"며 "많이 부족하다. 좀 더 기억했어야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고 했다.
<태백산맥>과 <남부군>을 언급한 임 선생은 "빨치산에 관한 책이지만 알맹이가 빠져 있다"는 말도 했다. 그러면서 임 선생은 "정세가 많이 좋아지고 있다. 4‧19, 6‧10항쟁이 있었지만 그 뒤에 '그들이' 뒤집어버렸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며 통일운동을 강조했다.
김영만 대표는 "우리가 살아가며 많은 사람을 만난다. 지위가 높거나 권력이 있는 사람, 대중에 인기가 있는 사람도 만나고, 투쟁 현장에서 동지들도 만난다"며 "저는 오늘 임방규 선생을 뵙고 말씀을 듣게 된 게 개인적으로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김 대표는 "책 서문을 읽으면서 가슴이 아프고 감동을 받았다. 광주감옥에서 호명을 당해 나가서 처형당한 분들의 소원이 제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 분들은 1년 아니 반년만 더 살 수 있다면, 총살을 당할 게 아니라 조국을 위해 온 몸을 바쳐 싸우는 게 소원이었다고 한다"고 했다.
그는 "사람을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하는 방법, 내가 진짜인가 가짜인가를 뒤돌아보며 생각할 때가 있다"며 "그것은 단결의 관점과 태도를 보면 안다고 했다"고 말했다.
이경희 이사장은 "벅찬 가슴을 안고 왔다. 한반도와 민족의 역사에서 정말 가슴 아프고 고통의 근대사를 온몸으로 겪으며 살아오신 임방규 선생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게 새해 벽두부터 축복이다"며 "올해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자주‧평화‧민주‧통일운동을 더 열심히 하자고 손을 잡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고 했다.
출판사에서는 이날 가져온 책이 모두 판매되어 추가 주문을 받았고, 임방규 선생은 책에 서명을 해주기도 했다. 노래패 '맥박'이 공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