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1980년 무슨 사태'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지난 9일 모교인 서울 성균관대 근처 분식집 앞에서 어묵을 먹으며 대학 시절을 회상하던 중에 나온 발언이다.
"그때 2000 ··· 아, 1820 아, 1980년, 그때 하여튼 무슨 사태가 있었죠? 1980년 ··· 그래서 학교가 휴교되고 이랬던 기억도 나고 ···"
1820년은 헛 나왔지만, 1980년은 정확한 인식 하에서 나온 얘기라고 생각한다. '1980년' 바로 다음에 '그때'라는 단어가 나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1980년'과 '그때'라는 구체적인 단어들을 거론한 뒤, 그는 불분명한 단어들을 연달아 내보냈다. '하여튼', '무슨' 같은 말들이 나왔다.
그러더니 또다시 구체적이고 명료한 단어가 나왔다. '사태'가 바로 그것이다. '취중'이 아니라 '어묵 먹는 중'에 일어난 일이다. 황교안 대표가 1980년 광주 항쟁을 '1980년 무슨 사태'로 표현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이어졌다.
'1980년 광주 사태'를 말하려던 것이 맞다면, 이는 5·18 광주 항쟁에 대한 폄하의 뜻을 담는 것이나 다름 없다. 발언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그는 법적 대응을 거론하며 이렇게 해명했다.
"본래 학교 휴학이 있었어요. 휴교령이 내려졌다고 ··· 내가 그 얘기를 한 거예요."
본인이 언급한 '1980년 무슨 사태'는 휴교령을 지칭한다는 해명이다. 하지만 "1980년, 그때 하여튼 무슨 사태가 있었죠?"라고 한 뒤 "그래서"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래서 학교가 휴교되고 이랬던 기억도 나고"라고 말했다. '1980년 무슨 사태'의 결과로 학교가 문을 닫았다고 언급한 것이다.
그가 말한 '1980년 무슨 사태'가 1979년 10·26 사태 이후의 민주화 시위인 '서울의 봄'을 지칭하는 것 같다는 언론보도도 있다. 당시 전두환 신군부는 서울의 봄을 억누르기 위해 1980년 5월 18일 새벽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확대 선포한 뒤 이를 기초로 새벽 1시에 휴교령을 선포했다.
그래서 개념적으로 본다면 황교안이 말한 '사태'는 광주 항쟁보다는 서울의 봄이나 비상계엄 확대 선포, 그 중에서도 후자에 더 가깝다. 하지만 당시를 경험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사태'는 서울의 봄이나 비상계엄 전국확대보다는 광주 민주화운동에 좀 더 가깝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광주 사태'라는 표현이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평가하자?
이번 논란 이후 황교안 대표의 과거 발언도 떠올랐다. 그가 표명한 역사 인식에서는 국민대중의 기본 인권보다는 국가권력의 정권 안보를 우선시하는 사고방식이 엿보이는 듯하다. 2018년에 펴낸 <황교안의 답>에서 박정희에 대해 이렇게 서술했다.
"제게 리더십의 비전을 보여준 분은 박정희 대통령입니다. 어느 대통령이든 공과가 있고 호불호가 생기기 마련이지요.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잘못이 있다고 해서 성과마저 폄하하거나 없던 일로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나라가 피폐하던 시절, 경제를 살리고 먹고살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고 밤낮없이 나라를 생각하며 산업화를 이룬 것은 필히 성과로 평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공은 공대로 평가하고 과는 과대로 평가하자고 했다. 그가 말한 '과'는 박정희가 국민을 억압하고 불법 독재를 자행한 사실을 가리킨다. 그런 문제를 단순한 호불호의 문제로 평가했다.
국민과 대통령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임자인 대통령이 위임자인 국민에게 의무를 다하는 일이다. 박정희는 이 지점에서 비판받을 부분이 많다. 그가 억압과 착취의 결과로 경제적 이익을 뽑아낸 점만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황교안은 본인이 몸담았던 박근혜 정부에 대해서도 매우 후한 점수를 줬다. "박근혜 정부는 한마디로 개혁 지향 정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라고 위 책에서 단호히 평가했다. 촛불혁명으로 박근혜가 수감된 상태였다.
그의 인식은 이전에 쓴 책에서도 드러났다. 2009년에 펴낸 집시법 해설서 <집회 시위법 해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서 4·19 혁명을 '혼란'으로, 5·16 쿠데타를 '혁명'으로 표기한 사실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기도 했다. 강제철거와 불법진압으로 인한 2009년 용산참사의 원인을 농성자들의 불법·폭력에서 찾은 일도 지적을 받았다.
황교안은 '1980년 무슨 사태' 발언으로 비판을 받는 중에도 또다시 입길에 올랐다. 이승만 저택인 서울 종로구 이화동의 이화장을 방문했을 때 쓴 방명록 때문이다. 대학로 동쪽인 이화장은 지난 9일 어묵을 먹은 성균관대 앞에서 약 1킬로미터 정도 떨어져있다. 화요일인 11일 이화장을 방문한 그는 이런 글을 남겼다.
"이승만 대통령께서 모진 고초를 넘어 국민들과 함께 세우신 자유 대한민국, 뜻 받들어 굳게 지켜내겠습니다."
이승만은 1960년 대한민국정부 대통령 때뿐 아니라 1925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 대통령 때도 쫓겨났다. 1925년에는 정식 탄핵을 받고 추방됐다. 그렇게 이유 중 하나는 직무 불성실이다. 1919년 취임 이래 단 6개월만 임시정부 청사에 체류했을 뿐 아니라 그 기간에도 집무실을 지키지 않고 툭 하면 여행을 떠났다. 모진 고초를 겪었다고 평가하기엔 어려운 측면이 있다.
'동시대인'으로서 황교안의 윤리
옛날 한국인들은 입에 담긴 힘든 참혹한 사건을 언급할 때 모(某)라는 단어를 쓰는 일이 있었다. '아무 일' 혹은 '무슨 일' 같은 모호한 표현으로 끔찍한 사건을 언급하곤 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참혹한 죽임을 당한 뒤에도 그랬다.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도 사도세자의 죽음이 '모년 모월의 일'이나 '모년화변' 같은 표현으로 언급됐다. 모년화변은 '아무 해 사태'나 '어느 해 사태' 등으로 바꿀 수 있는 표현이다. 끔찍한 사건을 이렇게 표현한 것은 참혹한 느낌을 최대한 억제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억울한 죽임을 당한 희생자에게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황교안 대표는 광주 학살 혹은 광주 항쟁을 '무슨 사태'로 표현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조선 후기 사람들과 같은 의도에서 '무슨'이란 표현을 썼다면 모르겠지만, 광주항쟁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에 그랬다면 이 부분 역시 문제가 될 수 있다. '사태'라는 표현도 문제가 되지만, '무슨'도 해석에 따라서는 지적받을 만한 표현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두고 '모년화변'으로 지칭한 것은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 사건이 부각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1980년 광주 학살은 앞으로도 더 많이 파헤쳐지고 더 많이 언급돼야 할 사안이다. 진상규명과 피해자 배상이 아직 완전하지 않은 사안이다. '모년의 일'로 대충 언급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라 국민적 역량을 기울여 파헤쳐야 할 일인 것이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1980년 무슨 사태'로 지칭한 것이 맞다면, 황교안 대표는 광주 희생자 및 유족들뿐 아니라 국민 전체를 상대로 큰 실수를 범한 것이다. 단순히 그가 국민 세금을 지원받는 공당의 대표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역시 이 시대의 아픔을 함께하는 동시대인이다. 그런 사람이 동시대 사람들의 상처와 아픔을 외면하고 가벼이 발언했다면, 제대로 사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