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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도연맹원 학살
보도연맹원 학살 ⓒ 진실위 자료사진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50년 6월 15일을 기점으로 그해 8월 초까지 우리나라 헌병과 경찰은 자국민인 마산지역 보도연맹원 500여 명을 영장 없이 불법 체포한 후 집단학살한다. 이것이 바로 마산·창원·진해 국민보도연맹사건이다. 왜? 어떻게? 이승만 정권은 자국민을 그렇게 불법적으로 무차별 학살한 것일까? 그리고 이승만이 그렇게 대량으로 학살한 국민보도연맹원이란 무엇일까?

국민보도연맹은 "(좌익)전향자를 계몽·지도해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써 받아들인다"는 목적을 표방해 1949년 4월 20일 이승만 정권에 의해 결성되었다. 국민보도연맹 중앙본부 간부진을 보면 당시 내무부장관이 총재를 맡았고 법무부차관, 내무부차관, 대검찰청 차장이 부총재를 맡았다. 따라서 국민보도연맹은 이승만 정권 주도하에 만들어진 관변단체였다. 1949년 9월 20일부터 보도연맹은 지방지부 조직에 착수해 도내 각 경찰서 단위로 하부조직을 편성했다.

1949년 12월 7일 마산시 부림극장에서 마산보도연맹 '결성선포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 검찰지청장이 위원장을, 경찰서장이 이사장을 맡았고, 위원은 시장·군수·형무소장·경찰서 사찰계장이, 상임지도위원은 차석검사·간사장이 맡았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이 의도했던 만큼 보도연맹의 조직 확대가 쉽지 않았다. 그러자 이승만 정권은 전국 읍면동 등 일선 행정기관에 보도연맹원의 인원수를 늘리라고 강제로 할당했다. 그래서 각 경찰과 행정기관은 할당된 인원을 채우기 위해 지역주민을 상대로 비료와 밀가루 등 배급을 미끼로 가입을 유도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빨갱이로 몰린다'며 주민을 협박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좌익 활동과는 전혀 무관한 주민들이 강제로 보도연맹에 가입되는 어이없는 일이 일어났다.

이와 같은 보도연맹 가입과정은 국회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1950년 2월 11일 제11차 국회 본회의에서 민주국민당 민경식 의원은 장경근 내무부차관을 상대로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신분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협박까지 일삼아 좌·우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까지 강제로 가입되고 있다"고 질의해 보도연맹 가입과정에 무리가 있었음을 지적했다.

경찰 말만 믿고 집결한 보도연맹원들은 모두 학살

마산시내 보도연맹원 및 예비검속 대상자들은 1950년 7월 15일 마산시민극장에 소집되어 마산형무소에 구금 중 학살되었다. 1950년 7월 15일 마산시민극장으로 일제히 소집된 예비검속 대상자들의 상황은 <몽고식품 100년의 발자취>(2008)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아는 사람에게 우연히 도장을 찍어주었다가 보도연맹에 가입하게 된 김홍구는 1950년 7월 15일 자신의 집으로 찾아온 경찰의 "시민극장에서 시국강연회가 있는데 참석한 보도연맹원은 탈퇴한 걸로 간주하고 선처할 방침"이라는 말을 듣고 따라나섰다.

그리고 김홍구는 마산경찰서를 거쳐 마산시민극장으로 이송되었는데 경찰은 예비소집 대상자들에게 소집·연행단계에서 거짓말을 했다. 김홍구가 시민극장에 도착해 보니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인근에서 온 농민들이었다. 김홍구는 현장에서 지인의 도움으로 탈출해 학살을 면했다. 그러나 경찰의 말만 믿고 순진하게 극장에 집결한 보도연맹원들은 모두 학살되었다.

김영상(당시 30세)은 지난 2008년 필자가 몸담았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아래 진실위)에서 1950년 당시 상황을 이렇게 진술했다.

"한국전쟁 발발 후 진전지서로 진전면 보도연맹원이 소집되었는데 약 70여 명이었고 우리 마을 곡안리는 15명이었다. 소집된 사람들은 경찰의 인솔로 트럭에 실려 마산형무소에 구금되었다. 마산형무소에 도착해 약 5~6일 정도 마당에 구금되었는데 마당은 붙잡혀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구금 중 사복을 입은 사람들(경찰인지 육군특무대인 방첩대인지 알지 못함)이 고백서를 작성하라고 했다.

나중에 풀려 나와서 생각해보니 나처럼 백지를 낸 사람은 나오고 뭔가 활동내용을 쓴 사람은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 형무소 마당에서 5~6일 정도 지낸 후 감방으로 입감되었다. 입감 약 10여 일 후 곡안리 15명 중 10명이 한꺼번에 불려 나갔는데 그 뒤 소식이 없다. 그날이 8월 23일이었다고 한다. 마산형무소에 구금 중 나는 재판을 받지 않았으며 불려 나간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은 풀려 난 뒤에 알았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마산형무소 계호과에 근무했던 김영현은 2009년 진실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한국전쟁 발발 후 헌병이 마산 보도연맹원을 마산시민극장에 집합시켜 놓은 후 차를 이용해 마산형무소로 이동시켰다. 마산형무소에서 방첩대(CIC)가 보도연맹원을 A, B, C로 분류해 A는 감방에 수용하고 B, C는 운동장에 수용했다. 감방에 있던 A가 밤에 없어지면 B가 입감되었는데 B도 밤에 없어졌다."

"마산 앞바다에 수장시켰다"
 
 보도연맹원 학살
보도연맹원 학살 ⓒ 진실위 자료사진
 
한국전쟁 발발 당시 마산형무소 계호과에 근무했던 황재익은 2008년 진실위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한국전쟁 발발 후인 1950년 7월 마산형무소의 일반 잡범들은 석방하고 창원군 진전·진북·진동면과 마산시내의 보도연맹원들이 마산교도소에 수감되었다. CIC가 보도연맹원을 조사한 후 여러 차례 트럭에 싣고 나갔는데 마산 앞바다에 수장시키고 진전면에서도 사살했다는 소문이 났다."

마산시 창포동 해안가에서 보도연맹원들이 LST(전차양륙함)에 실려 나가는 것을 목격한 윤봉근(당시 20세)은 이렇게 증언했다.

"나는 당시 철도병원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한국전쟁 발발 후 한 달 정도 지나서 아침 출근길에 만난 친구에게 '오늘 시민극장에 모여 띠 매고 군대에 간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뒤 약 20여 일이 지난 후 어느 날 점심 무렵 트럭 열 몇 대 정도가 사람들을 가득 싣고 창포동 해안가로 오는 것을 보았다.

트럭에서 짚으로 만든 벙거지를 쓴 사람들이 내렸는데 모두 손이 뒤로 묶였고 앞뒤 사람의 허리에도 로프가 묶여 있었다. 이때 LST 두 척이 왔는데 트럭에서 내린 사람들이 옮겨 탔다. 나중에 들으니 그들은 괭이바다에서 총살된 후 수장되었다고 한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괭이바다에서 학살된 이들의 시신이 해안가로 밀려온 것을 발견한 동네 주민들이 마을 인근에 시신을 가매장했다.

진전면 보도연맹원 등 예비검속 대상자들은 1950년 7월 15일, 진전지서의 소집통보를 받거나 경찰관에게 직접 연행되거나 면사무소의 소집통보를 받아 스스로 집결했다. "이렇게 모인 예비검속 대상자들은 진전지서를 거쳐 마산형무소에 구금 중 학살되었다"고 2008년 희생자 유족들은 진실위에서 진술했다.

"밤마다 몇 사람씩 호출된 후 학살되었다"

1950년 학살희생자 심을섭과 같은 마을 주민 조용이(당시 13세)는 2009년 진실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1950년 음력 6월 어느 날 아침, 진전지서 경찰관 1명이 마을로 와서 논일을 하고 있던 심을섭 등 마을사람 4~5명을 데리고 진전지서로 갔다. 그 뒤 그 사람들을 마산형무소에 감금 중 마산 괭이바다 물속에 빠뜨렸다고 하는데 그중 문또출이 암초에 걸려 포박을 풀고 살아 돌아왔고 나머지는 모두 희생되었다. 문또출한테 (자신이) 경찰서에 구금되어 있을 때 밤마다 몇 사람씩 호출되어 밖으로 나갔으며 그 이후 소식이 전혀 없었고, 자신은 호출되지 않아서 살아 돌아왔다고 전해 들었다."

1950년 7월 24일 진북면 보도연맹원 등 예비검속 대상자들은 진북지서로 소집되어 마산형무소에 구금 중 학살되었다. 소집은 경찰관 또는 사복을 입은 사람들이 이들에게 수갑을 채운 채 끌고 가거나 이들이 소집통보를 받고 스스로 진북지서로 갔다.

진북면 추곡리 희생자들의 유족 오재일(당시 26세), 임차임(당시 2세, 집안어른들에게 들은 이야기) 등은 추곡리 내추마을에 사는 오씨들이 1950년 7월 24일 진북지서의 소집명령을 받고 출두한 후 학살 당했다며 2008년 진실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이들은) 소집될 때 경찰은 '소집에 응하는 사람은 모든 의혹에서 풀려 제약에서 벗어난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자진 출두했다. 그러나 이들은 (경찰의 약속과는 다르게) 마산형무소에 구금된 후 마산 앞바다에 수장되었다."

1950년 7월 15일 진동면 보도연맹원 등 예비검속 대상자들은 진동지서 경찰관에게 연행되어 진동지서를 거쳐 마산형무소에 구금 중 학살되었다. 예비검속 대상자들은 진동지서 순경에 의해 연행된 뒤, 진동지서 옆 공회당 창고에 구금되었다가 다시 마산형무소로 이송되었다. 희생자 임지훈의 동생 임상열(당시 16세)은 2008년 진실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면사무소 직원이던 형 임지훈이 한국전쟁 발발 후 모심기를 할 때쯤 진동지서로 소집되어 마산형무소에 구금 중 희생되었는데, 같은 마을 전천수가 마산형무소에서 풀려나와서 알게 되었다."

학살희생자 이효임의 조카 안승일(당시 21세)는 2009년 진실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경찰이 보도연맹원을 상남지서로 오라고 호출해 지서로 갔다. 경찰이 집으로 보내주지 않고 상남면 면사무소 창고에 감금시켰는데, 새벽에 CIC사람들이 이들을 트럭에 태워 가려고 하자, 지서주임이 그중에도 갈 사람이 있고 가지 않을 사람이 있다고 해 호명을 한 사람은 차에서 내리고, 호명하지 않은 사람은 그대로 트럭을 타고 갔고, 진해 가는 중간 산골짜기에서 총살 당했다."

학살희생자 안용택의 부인 김수가(당시 25세)는 2008년 진실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남편이 1950년 8월 15일 상남지서로 소집되어 구금 중 8월 17일 트럭에 실려 아리송골로 끌려가서 희생되었다. 남편과 함께 트럭에 실려 가던 사람이 자신이 가는 방향에 대해 길거리 사람들에게 소리를 쳐서 희생 장소를 알게 되었고 시신을 수습했다."

한편, 봉림리 주민 김훈배는 1950년 8월 1일 헌병에게 연행된 후 고문으로 희생되었다.

"줄을 당기자 시신이 줄줄이 엮여서 나왔다"
 
 보도연맹원 학살
보도연맹원 학살 ⓒ 진실위 자료사진
 
1950년 7월 하순 웅남면 보도연맹원 등 예비검속 대상자들은 웅남지서로 소집되거나 연행된 후 상남면 남산리 성주사 골짜기에서 학살되었다. 희생자 허원의 부인 문원수(당시19세)는 2008년 진실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남편이 1950년 7월 30일 구장의 연락을 받고 웅남지서를 거쳐 상남지서로 이송되었는데 이송되는 것을 내가 보았고 면회를 했다. 면회 다음 날인 1950년 8월 6일 성주사 골짜기로 끌려가서 희생되었다. 먼저 시신을 수습한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그곳에 가보니 큰 구덩이가 두 개 있었는데 줄을 당기자 시신이 줄줄이 엮여서 나왔다."

희생자 임재규의 아들 임호섭은 2008년 진실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순경이 어느날 집으로 와서 웅남지서로 가자고 했고, 모친은 가지 말라고 말렸으나 지은 죄가 없으니 웅남지서에 가서 말을 하고 오겠다고 한 뒤에 행방불명이 되었다."

한편, 희생자 손갑수는 웅남지서에 구금 중 고문을 못 이겨 도망쳤으나 1950년 9월 23일 성주지서 경찰관에게 붙잡혀 학살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마산·창원·진해 국민보도연맹사건 학살희생자들의 소집·연행·학살과정을 정리하면 이렇다. 마산시내 거주자와 창원군 진전·진북·진동면 거주자 중 일부는 1950년 7월 15일 마산시민극장으로 소집·연행되어 마산형무소에 구금 후 마산 앞바다에서 학살되었다.

창원군 각 면 거주자들은 관내지서로 소집되거나 연행되었는데 상남면 희생자들은 창원군 웅남면 아리송골에서, 대산면 희생자들은 김해시 진영읍 창고에 구금 후 김해시 생림면 나밭고개에서 학살되었다. 한편 진해경찰서로 소집·연행된 희생자들은 진해시 여자동 가마니골과 내서면 진동고개에서 학살되었고 나머지 주민들은 진해 앞바다 등지에서 학살된 것으로 진실위는 추정했다.

1960년 4.19 혁명 후 마산 피학살 유족회 간부 김용국은 경남도지사실에서 열린 국회 양민학살 특위 위원장의 "(학살 희생자들이) 보련(보도연맹원)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변했다.

"보련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습니다. 그 당시 민보단(1948년 5·10 총선거 때 조직되어 1950년 봄까지, 경찰의 하부·지원조직으로 활동한 단체)이니 경찰 이런 사람들이 자기들이 과거부터 좋지 않게 평가한 사람들은 모조리 다 불러나간(학살한) 것입니다."

진실이 밝혀지기까지 70년

지난 2009년 진실위는 보도연맹원들이 영장 없이 불법으로 체포·감금된 후 희생됐다고 진실을 규명했다. 또한 진실위는 당시 이 사건의 가해주체를 마산지구 CIC와 마산육군헌병대 소속 군인 그리고 마산·진해경찰서 소속 경찰로 확인했다. 아울러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 대상자들을 소집·연행해 학살하게 된 데에는 마산·진해경찰서 소속 경찰관과 이들의 지휘를 받은 지역 단위의 민보단, 우익청년단체원, 구장 등이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진실규명했다.

더불어 진실위는 이 사건이 "한국전쟁기에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국민의 생명을 빼앗거나 인신을 구속하는 처벌을 할 경우 합당한 이유를 가지고 적법한 절차에 따라 해야 한다. 그러나 이 사건의 가해자인 마산지구 CIC, 마산육군헌병대, 마산·진해경찰서 경찰은 정당한 재판절차를 거치지 않고 예비검속 한 사람들을 불법 살해했다. 이는 인도주의에 반한 것이며 헌법에서 보장한 국민의 기본권인 생명권을 침해하고 적법 절차 원칙과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한 불법행위이다"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진실위의 진실규명을 근거로 지난 2013년 유족들은 창원지법 마산지원에 이 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했다. 그리고 지난 14일 창원지법 마산지원은 재심에서 학살희생자들에 대한 무죄를 선고했다. 한국전쟁 당시 좌익으로 몰려 영장 없이 불법으로 체포·감금당한 뒤, 군사재판에서 사형당한 민간인들이 70년 만에 무죄판결 받은 것이다. 

이날 무죄판결 직후 김경수 경남도지사는 "마산·창원·진해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민간인 희생자에 대해 재심 무죄판결을 환영한다. 진실이 밝혀지기까지 70년이 걸렸다. 국가폭력으로 발생한 고통이 이번 무죄판결을 계기로 조금이나마 치유되길 기원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억울하게 죽은 자들은 지금도 아무 말이 없다.

#보도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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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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