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아이의 봄방학을 맞아 경북 안동으로 휴가를 다녀오는 길이었다. 원래는 대만에 갈 예정이었지만, '코로나 사태'가 터진 후 항공 수수료와 호텔 숙박비를 물어내고 여행을 취소한 터였다.
이미 잡아 놓은 휴가 일정까지 되돌리고 싶지는 않았다. 북적이는 관광지 대신 안동의 조용한 시골 마을에 자리 잡은 고즈넉한 펜션에서 재충전을 했다. 다시금 활기찬 일상을 시작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러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스마트폰으로 대구에서도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진자가 나왔다는 기사를 읽었다. 나는 그 소식을 운전 중인 남편에게 알렸고, 우리는 "사태가 수그러들지를 않네"라며 약간 걱정이 섞인 대화를 주고받았다.
딱 그만큼이었다. 이미 한 달 넘게 지속된 코로나 사태인데 뭐 그렇게 달라질 것이 있나 싶었다. 아이는 대구에 도착하자마자 학원으로 갔다. 나와 남편은 집에 도착해 아무렇지 않게 짐을 정리했다. 그로부터 3시간 뒤, 우리의 일상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대구 도착 3시간 뒤 무너진 일상
수업이 끝나는 시각에 맞춰 아이를 데리러 학원에 가려던 참이었다. 학원 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어머니, 지금 차로 여기 오실 수가 없어요. 저희가 데려다 드릴 테니 출발하지 마세요. 이쪽이 다 통제됐어요. 학원 바로 옆 병원에서 확진자가 나왔대요."
가슴이 철렁했다. 학원에서 돌아온 아이는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구급차에 병원 환자들을 태우고 있었고, 도로가 일부 차단됐다고 알려줬다. 학원에서 마스크를 벗지 않았고 손 소독도 여러 번 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얼마 후 문자 메시지가 연이어 왔다. 아이가 다니는 다른 두 군데의 학원에서도 모두 '임시휴원' 한다고 알려왔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내가 일하는 상담센터들에서도 연락이 왔다. 3월 첫 주까지 모든 상담을 중지한다고, 내담자들에게도 연락을 취할 테니 출근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지자체에서도 여러 차례 '안전 안내 문자'를 보내 ▲ 집단모임 금지 ▲ 외출 자제 ▲ 부득이한 외출 시 마스크 착용 등 코로나 대비 생활 수칙을 보내왔다. 저녁에는 3월 2일로 예정돼 있던 아이들의 개학이 일주일 연기됐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천주교 대구대교구청에서도 3월 5일까지 신자들이 참여하는 모든 미사와 행사를 중단한다고 공지했다. 코로나 사태가 한국에 터진 후 성당에선 성수를 치우고, 마스크를 쓴 채 미사를 드려왔었다. 미사를 전면 중지한다니, 가톨릭 신자로서 느끼기에 이건 초유의 사태였다. 위기감이 몰려왔다.
목요일 저녁에 단둘이 만나기로 했던 이웃도 "지금 이 상황에선 안 만나는 게 좋겠다"고 알려왔고, 봄방학 때 한번 모여서 놀자던 아이 친구 엄마들도 "무사히 잘 나고 봅시다"라고 카톡(카카오톡 메시지)을 보내왔다. 남편은 어쩔 수 없이 마스크를 낀 채 출근은 했지만, 딱 필요한 업무만 하고 귀가했다. 회식도, 회의도 모두 취소됐다.
황량한 도시, 위축되는 마음
이렇게 우리의 일상은 대구에 첫 확진자가 나온 지 하루 만에 모두 중지됐다. 우리 가족은 만약에 대비해 되도록 외출을 삼가고 집에서만 생활하기로 했다.
학원에 가지 않는 아이는 모처럼 집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만끽하기로, 출근을 하지 않게 된 나는 읽고 싶었던 책이나 실컷 읽자고, 휴가라고 생각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은 어느 것도 여유롭게 누릴 수 없게 했다. 책을 읽어도 머리에 들어오질 않았다. 아이는 지루함에 금세 짜증을 냈다.
문제는 우리 집 냉장고에 식재료가 얼마 없다는 거였다. 며칠간 집을 떠나야 했기에 여행 전 이미 냉장고를 다 비워둔 상태였다. 김치와 몇 가지 채소 외에는 밑반찬을 해먹을 재료가 없었다. 나는 온라인으로 장을 보기로 했다. 평소 이용하는 한 대형마트의 온라인쇼핑몰에 들어가 장바구니를 열심히 채웠다.
배송 버튼을 클릭하는 순간 나는 놀라고 말았다. 5일치의 배송 예약이 모두 마감된 상태였다. 고객센터 픽업 서비스라도 신청하려고 했지만, 이 역시 모두 마감된 상황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트 외출마저 꺼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때 친한 이웃에게 메시지가 왔다.
"어제 내가 마트 가보니까 두부, 계란같이 자주 쓰는 식재료들은 다 나가고 없더라고. 자기도 얼른 사다 놔. 라면이라도 쟁여놔야지."
마치 전시 체제에 돌입한 느낌이었다. "전 이참에 배달음식 골고루 먹어볼까 봐요." 농담 반, 진담 반 답장을 보냈다. 그랬더니 "배달 음식도 위험하지. 그거 만든 사람이 어디 다녀온 사람인지 알 수 없잖아"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불안감이 또 한차례 내 마음을 휩쓸고 지나갔다.
결국 나는 남편과 함께 마스크와 손소독젤로 무장을 하고 마트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길거리의 풍경이 황량했다. 자동차 통행량도 현저히 줄었고, 지나가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마트 주차장도 평소와 달리 한산했고, 직원들은 모두 마스크와 위생장갑을 끼고 손님들을 맞았다. 장 보는 사람들 역시 모두 마스크를 썼고, 일부는 비닐 장갑을 끼고 장을 보기도 했다. 맛있는 냄새로 사람들을 유혹했던 시식 코너도 중지 상태였다.
다행히 우리 가족에게 필요한 식재료와 생필품은 모두 있었다. 2~3주는 버틸 수 있을 만큼 넉넉히 장을 보고 돌아왔지만, 삭막한 풍경들에 마음은 더 위축됐다. 재난영화의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단 며칠 만에 도시의 풍경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어떤 마음들
가뜩이나 위축된 마음은 인터넷으로 코로나 관련 뉴스를 볼 때마다 더 움츠러들었다. 대구의 코로나19 관련 소식들을 전하는 기사마다 이런 댓글들이 달렸다.
'대구 KTX 무정차 해라.' '대구 봉쇄해야 하는 거 아니냐.'
나는 댓글들을 볼 때마다 내가 대구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민폐 끼치는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주말에 스키장을 예약해뒀다는 이웃도 조심스레 고민을 털어놨다.
"아무래도 가면 안 되겠지? 우리가 어디 가서 대구 사투리 쓰고 다니면 사람들이 꺼림칙해 할 거야."
대구에서 일하며 주말마다 집이 있는 부산으로 가곤 했던 동료 역시 당분간은 내려가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민폐를 끼칠 수는 없다며 말이다.
나 역시 민폐를 끼치지 않고자 2월 말 예정된 서울에서의 약속과 행사 참여를 모두 취소한 터였다. 예약했던 서울의 숙박업소에서는 환불 기한이 지났는데도 "대구에서 간다"는 한 마디에 즉시 전액 환불을 해줬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자괴감이 들었다.
부디 이겨낼 수 있기를
하지만 이런 가운데에서도 늘 어두운 표정으로만 지내는 것은 아니다. 우리 가족처럼 제한된 생활을 하고 있는 대구의 이웃, 동료, 친구들과 수시로 나누는 카톡과 전화가 일상의 답답함을 덜어주고 있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우리 힘내요'라고 주고받는 격려의 말들 덕분에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따뜻하고 든든한 기분이 든다.
대구가 아닌 지역에 사는 가족, 친구, 동료들의 안부 전화도 무척이나 큰 힘이 되고 있다. 1년 넘게 카톡 한번 안 했던 친구들 몇 명과도 이번 사태로 통화를 하며 다시금 서로의 우정을 확인했다. 치매를 앓고 계신 외할머니로부터 연락을 받았을 때는 울컥하기도 했다. 걱정해 주시고, 안부 물어주시는 분들의 따뜻한 마음 덕에 놀라고 움츠러든 마음이 조금씩 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어제(22일) 놀라운 풍경을 발견했다. 마스크를 쓴 채 반려견과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돌고 오는 길이었다. 우리 집 앞 매화나무에 꽃이 활짝 핀 것이 아닌가. 그 어느 때보다 삭막하고 황량한 겨울이었지만, 봄이 오고 있었다.
여전히 위기감이 팽배하지만, 이 겨울이 가고 있듯 언젠가 코로나19의 여파도 지나가질 않겠는가. 부디 더 큰 아픔 없이,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고 이 사태를 이겨낼 수 있기를. 그래서 다가오는 봄엔 따사로운 햇살을 만끽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의 개인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와 브런치(https://brunch.co.kr/)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