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국내에서 처음 발병한 1월 말까지만 해도 엄마의 일상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늘 하던 대로 아침을 먹고 집을 치우고 밖에 나갔다. 가볍게 공원을 산책하거나 평소 재미로 드나들던 의료기 체험관에 다녀오곤 했다. 우리도 엄마의 외출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대신 마스크는 꼭 챙겨드렸는데 엄마는 그마저도 갑갑하다며 가방에 넣고만 다녔다.
2월 초에 접어들면서 확진자가 하나둘 늘기 시작하자 엄마의 생활에도 조금씩 변화가 찾왔다.
"○○이 졸업식은 취소 안 됐다니?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은 피하라는데..."
엄마는 결국 손녀의 고등학교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기로 했다. "이때까지 손주들 졸업식은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는데" 하고 서운해 하셨지만, 다른 식구들은 감염 예방을 위해서는 최대한 조심하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엄마는 그래도 답답할 때면 가끔 한두 번 외출했다. 마스크를 꼭 쓰고.
엄마의 두문불출
2월 18일 31번 환자를 기점으로 상황이 더 안 좋아졌다. 확진자 수 증가 폭이 두 자릿수에서 세 자릿수로 늘어나더니, 2월 26일 기점으로 국내 확진자가 1000명을 넘어섰다. 정부에서는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해 달라고 당부했다.
모두의 일상이 이전과 달라져야만 했다. 큰언니는 '엄마 절대 밖에 못 나가시게 하라'고 내게 신신당부를 했다. 엄마에게 곧장 전화를 걸었다.
"그러잖아도 오늘은 안 나갔다. 당분간 집 밖에 나가지 않을 거다."
엄마는 정말 집 안에서만 생활했다. 가끔씩 나가던 산책도 딱 끊었다. 하다못해 찬거리를 사러 동네 슈퍼에도 가지 않았다. 있는 쌀과 고추장, 된장, 채소로 식사를 해결했다.
"엄마, 왜 집에서 꼼짝도 안 해? 사람 많지 않은 공원에서 산책하는 정도는 괜찮대."
"나이 든 사람들은 감염되면 위험하다지 않니? 사망자도 대부분 노인이잖아."
겁을 먹은 엄마는 하루종일 TV 앞에 앉아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며 브라운관을 멍하니 바라봤다. TV 보는 것도 지치면 낮잠을 잤다. 시간이 특히 더디 가는 날은 소파에 기대 앉아 긴 한숨을 내쉬고 들이셨다.
내가 "집에만 있으려니까 힘들지?" 하고 물으면 "기운이 없지 뭐" 하고 대답하는 게 끝이었다. 대화를 길게 잇지 않았다. 엄마는 이러쿵저러쿵하지도 않고, 지루하다, 무료하다, 답답하다는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내가 보기엔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엄마는 활기를 잃어갔다. 가끔 엄마를 보러 가면 좀비처럼 푸석한 얼굴과 멍한 눈을 하고 소파에 맥없이 앉아 있었다.
사람이 붐비지 않는 곳에서 밥 먹고 오자고 권해도 "어디서 어떻게 옮을지 모르는데 어딜 가? 그리고 요즘은 나가는 것이 민폐다"라며 거절했다. 그 와중에도 3.1절에 태극기 거는 걸 잊지 않고 챙겼다.
"너 태극기 달았니? 여기 아파트에는 태극기 단 집이 없더라. 너희 아버지 계실 때는 빼놓지 않고 달았는데..."
보름이 넘는 기간 동안 엄마가 외출한 날은 딱 하루였다. 안과 정기검진 날이어서 어쩔 수 없이 다녀온 외출이었다. 그날 엄마는 '이제 슬슬 백내장 수술도 생각해 보세요'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아왔다. 엄마는 벌써 몇 년째 백내장 관련 약을 먹고 있는데, 약만으로는 진행을 막기 어려운 단계에 이른 모양이다.
그 후에도 엄마는 "집에만 있으니 이제 나가는 것도 귀찮아"라면서 계속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외식도, 가까운 나들이도 싫다 했다. 말수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코로나19 사태로 시작된 외출 자제였지만,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사회 분위기에 따른 우울과 무력감, 거기에 수술 소식까지 겹쳐 혹시 우울 증세가 온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엄마의 회복
며칠 후 엄마네 집에 동생네 가족이 온다고 해서 가봤다. 집에서 밥하는 냄새가 났다. 엄마가 나물을 무치고 된장찌개를 끓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표정도 밝았다. 동생이 말했다.
"어제 엄마랑 장 봐 왔어."
아들과 손주들 먹일 밥상을 차리기 위해 시장에 다녀온 것이었다. 엄마의 '철통 자가격리'가 드디어 끝난 것인가. "할머니가 해 준 음식이 제일 맛있어요" 하는 큰 손주의 말에 엄마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동생네가 가고 나서도 내내 웃음 띤 얼굴이었다.
엄마는 동생네가 다녀간 다음 날 1시간 가량 산책을 다녀왔다.
"오랜만에 나갔더니 힘들더라. 다리가 무거워."
몸이 좀 풀리면 붐비지 않는 곳으로 외출도 다녀올 생각이란다. 코로나19 이후로 감쪽같이 사라졌던 엄마의 활기가 그렇게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엄마에게 필요한 건 결국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관계가 끊겨버린 막막한 현실 속에서도 우직하다 싶을 정도로 당국의 지침을 따르며 '코로나 정국'을 잘 헤쳐나가고 있는 엄마가 고맙기만 하다.
"엄마, 사태가 좀 진정되면 우리 꽃구경 갈까?"
"그래, 가자. 어디로?"
기운을 차린 엄마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을 것 같다. 아직은 '어디'보다는 '언제'가 더 관건인 것 같지만.
한편으로 엄마를 보며 느낀 게 있다. 어르신들은 직접적인 감염 위험만이 아니라 그로 인한 공포심과 우울증의 고통이 생각보다 클 수도 있겠다는 점이다. 게다가 감염을 막기 위해 경로당이나 노인복지관도 거의 다 휴관 중이니, 갈 데도 없고 가족도 없는 어르신들은 얼마나 적적하실까. 아마 지금도 어디에선가 외로움과 무서움에 떨며 홀로 이 시간을 견디는 어르신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모두의 일상이 무사히 회복될 그 날을 기다린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의 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