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색 사람이 뛰어가는 모습에 불이 들어와 있는 비상구 유도등은 어느 건물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안전 설비이다.
비상구 유도등은 화재나 지진 등 긴급 상황에서 비상구의 위치와 대피로를 안내하며, 특히 정전 및 연기로 인해 시야확보가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비상전원으로 점등 상태를 유지하며 사람들은 비상구로 안내하는 '생명 지킴이' 역할을 한다. 이렇게 중요한 비상구 유도등이 가장 안전해야 할 학교에 제대로 설치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2000년대 이후 준공된 비교적 신축 학교의 경우, 소방 규정에 의거하여 학교 곳곳에 비상구 유도등이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2000년대 이전에 준공된 비교적 노후 학교의 경우, 준공 당시의 소방 규정이 적용되어 비상구 유도등이 설치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노후 학교 건물, 비상구 유도등 대신 야광 표지판?
2000년대 이전에 지어진 수많은 학교는 비상구 유도등이 아닌 비상구 축광 유도표지가 설치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비상구 축광 유도표지란, LED나 형광등을 이용하여 점등되는 비상구 유도등과 달리, 빛을 축적하였다가 주위가 어두워졌을 때 빛을 발산하는 일명 '야광' 형태의 비상구 표지판이다.
비상구 축광 유도표지는 화재로 인하여 연기가 발생할 경우, 연기에 가려져서 전혀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고, 선명도와 조도가 유도등보다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에 표시면 식별에 어려움이 있다.
특히 수많은 인원이 상주하고 있는 학교 시설에서 재난 발생 시 비상구가 쉽게 식별되지 않아 신속한 대피가 어려울 수 있으며, 인명피해로도 이어질 수 있다.
낡은 축광 유도표지, 제 기능 못 해
비상구 축광 유도표지가 노후할 경우, 변색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하며 축광 (야광) 성능이 저하된다. 특히, 학교의 경우, 유도표지의 표시면이 물품 운반 등의 과정에서 파손되거나, 벽면 청소를 하는 과정에서 유도표지의 축광 성능이 저해되기도 한다. 심지어 변색이 심해 바탕색이 황토색에 가깝게 변한 유도표지도 있었다.
학교는 화재예방, 소방시설 설치·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 제 25조 등 법령에 따라 매년 소방점검을 진행한다. 점검 시 점등여부와 비상전원 정상여부를 정기적으로 확인하는 비상구 유도등과 달리, 축광 비상구 유도표지는 육안 점검 외에는 구체적인 점검 방법이 규정되어 있지 않아서, 점검 시에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유도표지가 지적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법적으로 내구연한이 규정되어 있어서 10년이 지나면 의무적으로 교체해야 하는 소화기와 달리, 축광 유도표지는 내구연한 규정이 없어서 20년이 넘게 방치되어 있어도 법적으로 제재할 방법이 없다. 실제로 노후 학교 곳곳에 부착된 비상구 축광 유도표지의 상당수는 20년이 넘은 노후 제품이며, 현재는 식별 용이성 문제로 생산되지 않는 글자 형태의 비상구 축광 유도표지도 종종 찾아볼 수 있었다.
노후 학교에 설치된 축광 유도표지 상당수 미검정품
소화기나 완강기 등의 소방안전용품은 재난 상황에서 적절한 성능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하기에, 한국소방산업기술원(KFI)의 형식승인을 받고 판매하여야 한다. 형식승인을 득한 소방용품의 경우 KFI 또는 KC 등 국가검정 합격표시가 부착되어 유통된다.
하지만 노후 학교 곳곳에 설치된 축광 유도표지 상당수에 부착된 합격표시는 KFI나 KC 또는 한국소방검정공사 (현 한국소방산업기술원)의 국가검정 합격표시 대신 '자체검사필'이라고 쓰여 있는 정체불명의 합격표시가 부착된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자체검사필'은 한국소방산업기술원의 제품검사를 거쳐서 형식승인을 득한 제품이 아니라, 제조사의 자체 검사만을 통과하여 제품승인서만 발급받아 유통되는 제품이라는 의미이다.
제조사의 자체검사필만 부착되어 판매되고 있는 일명 '미검정품' 축광 유도표지는 조도 및 발광 지속시간 등 성능을 보장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미검정품은 형식승인 제품보다 가격이 저렴하여 학교 준공 당시 학교 곳곳에 부착한 경우가 많다. 또한 추후 교체 시에도 별다른 법적 제재가 전무하다 보니 형식승인 제품보다는 미검정품이 경제적 효율성을 고려하여 설치되는 경우가 많다. 경제성을 안전보다 우선시하고 법적 최소기준만 맞추려 하다 보니, 검증되지 않은 안전시설에 학생들의 안전을 맡기고 있는 것이다.
개선은 언제?
일부 노후 학교에서는 안전한 학교 환경을 만들기 위해, 또는 학교 환경개선사업과 연계하여 비상구 축광 유도표지를 비상구 유도등으로 교체 설치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전체 유도표지를 모두 교체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만 교체하는 학교도 많으며, 예산 등의 문제에 가로막혀 비상구 유도등으로의 교체 공사 자체를 시작하지 못하는 학교도 많은 것이 학교 안전의 현주소이다.
또한 일선 학교 현장에서는 재난 대비 시설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점검 시에도 법에 저촉되는 사안이 아니라는 이유로 문제점을 언급조차 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도 다반사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비상구 유도등과 같은 재난 대비 안전시설의 개선 사업은 학교에서 실시하는 벽면 도색이나 화장실 개선과 같은 평소 그 효과를 체감하게 되는 다른 사업보다 우선시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세월호 참사 등 한국 사회의 안전 불감증은 수많은 '인재'를 불러왔고 소중한 생명을 수도 없이 잃었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앗아가는 재난으로부터 학교 또한 예외가 아니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재난 속에서 소중한 생명을 지키기 위해 안전 시스템을 원점에서 재점검하고 문제가 있는 시설들은 즉시 시정해야 할 것이다.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성장하는 장소인 학교는 더욱 철저히 안전 관리에 힘써야 할 것이다. 아이들의 안전을 지키는 일은, 세계의 미래를 지키는 일이다.
빠른 시일 내에 학교에 설치된 비상구 축광 유도표지가 비상구 유도등으로 교체되기를, 그리고 경제 논리에 아이들의 안전이 밀리지 않는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