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 4‧11민주항쟁은 4‧19혁명의 첫날입니다."
올해 60주년인 마산4‧11민주항쟁 기념일을 앞두고 창원마산 거리 곳곳에 홍보물이 설치되었다. 육교, 가로등에도 펼침막이 걸리고 광고탑도 세워져 있다.
올해는 3‧15의거와 4‧11민주항쟁 60주년이 되는 해다. 3‧15의거는 이승만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부정선거에 저항해 일어난 시민항쟁이다.
1960년 3월 15일, 그날 3‧15의거에 나섰다가 행방불명되었던 김주열(金朱烈, 1943~1960) 열사가 마산 앞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시신으로 떠오른 날이 그해 4월 11일이다.
이에 시민들이 다시 들고 일어났던 것이다. 이날을 '마산 4‧11민주항쟁' 내지 '3‧15 2차의거', '김주열 시인인양일'이라 부른다. 이날은 이승만정권을 무너뜨린 4‧19혁명의 첫날이자 기폭제가 된 것이다.
(사)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는 해마다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 김주열 열사 시신인양지에서 '기념식‧추모식'을 열어왔다. 기념식 때는 해마다 김주열 열사의 고향인 남원에서도 학생과 시민들이 참배하기도 했다.
사업회는 오는 11일 "제60주년 4‧11민주항쟁 기념, 3‧4월혁명열사 추모식"을 준비해 왔다. 그런데 코로나19 사태 속에 추모식을 예정대로 열 수 없게 되었고, 이에 축소‧변경해서 치르기로 한 것이다.
올해 3월 15일 '3‧15의거 기념식'은 취소되었다.
사업회는 행사를 예정대로 열지 않고 '드라이브 스루(차량 참배) 헌화 추모식'을 열기로 했다. 코로나19 선별진료소 검사처럼, 추모객들이 차량을 타고 와서 내리지 않고 국화를 받아 전달하는 방식이다.
사업회는 4월 혁명 과정에서 순국하신 188명(3‧15의거 희생자 14명 포함)의 영정을 모셔 놓고 헌다례를 올릴 예정이다.
김영만 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 상임고문은 "코로나19를 빨리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야 한다. 추모식 취소를 생각하다가 회원들이 '드라이브 스루 헌화 추모'를 해보자고 제안을 해서 준비하게 되었다"고 했다.
김영만 고문은 김주열 열사와 옛 마산상업고등학교(현 용마고) 입학동기다. 김 고문은 김주열 열사 추모사업을 다양하게 벌여왔고, 2011년 7월 김주열열사 시신인양지가 '경남도 문화재 기념물'로 지정될 때 앞장서기도 했다.
김영만 고문은 "아마도 '드라이브 스루 헌화 추모'는 세계에서 처음일 것"이라며 "60년 전 4‧19혁명의 첫날을 이렇게 해서라도 기념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다음은 김영만 고문과 나눈 대화다.
- '마산 4‧11민주항쟁이 4‧19혁명의 첫날'이라고 한 이유는?
"1960년 3월 15일은 제4대 대통령, 제5대 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일 이었다. 당시 이승만 자유당정권의 무지막지한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마산3‧15의거가 일어났고 당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 중 남원에서 마산으로 유학 온 김주열이라는 학생이 행방불명이 되었다가 27일만인 4월 11일, 마산중앙부두 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이에 마산시민들의 분노가 화산처럼 폭발하여 엄청난 규모의 항쟁이 사흘 동안 계속되었다. 이 항쟁의 불길이 전국으로 번져 마침내 4‧19혁명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래서 4‧11민주항쟁을 4‧19혁명의 첫날이라고 하는 것이다."
- 추모 행사를 준비하는 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는?
"올해 추모식이 21회니까, 사업회가 만들어진 게 21년이 되었다. 저는 지금 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의 상임고문을 맡고 있고 60주년을 기념하는 이번 행사의 기획을 맡고 있다. 이 단체 초대 회장을 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저와 김주열 열사는 마산상업고등학교 입학 동기다. 그리고 3‧15의거와 4‧11항쟁에 참가한 학생이었다."
- '3‧4월혁명'이라고 하는 이유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명칭은 '4‧19혁명'이다. 그 혁명의 시작은 창원마산에서 그해 4월 11~13일 사이 사흘 동안 일어난 시민항쟁이었다. 그 뒤 서울에서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이 시위에 나섰다. 그날 '정치깡패'들로부터 기습폭행을 당해 많은 부상자가 생겼고 다음날 '피의 화요일'이라고 하는 4‧19가 일어난 것이다. 100명이 넘는 사망자가 생겼고, 4월 25일 교수단 시위가 있었다. 끝내 4월 26일 이승만이 하야했던 것이다.
평소 우리들은 4‧19라는 특정일에다 그 이전 과정을 포함해 '4월혁명'이라는 용어를 자주 써왔다. 4‧19혁명도 마산 3‧15의거가 시발이었고, 사실상 4월혁명의 씨를 부린 게 3‧15의거다. 그래서 한꺼번에 묶어 3‧4월혁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 3‧4월혁명과 관련한 열사들이 많죠?
"마산 3‧16의거 관련한 14명을 포함해 4월까지 전국에서 188명이 희생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3‧4월혁명 188명의 영정을 모셔다 놓고 추모 헌다례를 하려고 한다.
- '드라이브 스루 헌화'가 생소한데?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3‧15의거 행사는 올해 취소되었다. 아쉬움이 컸다. 그래도 4월 11일쯤 되면 코로나19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학생들은 아직 등교도 못하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키느라 국민들 스스로 각종 행사를 취소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처음에 저희들도 역시 행사를 할 수 없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올해 4‧11 행사 때는, 김주열 열사의 고향인 전북 남원시와 창원시가 기념삭 현장에서 자매결연식을 가질 예정이었다. 이는 몇 년간 준비해온 일이다. 그런데 코로나19 때문에 이 행사부터 두 시에서 합의하여 취소하게 되었다. 행사를 준비해온 저희들로서는 허탈감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에 추모식을 드라이브 수루 방식으로 하면 되지 않느냐는 제안이 나왔다. 이 아이디어를 실행하기 위해 여러 차례 현장에 나가 꼼꼼히 둘러보니 난관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여러 회원들의 지혜와 힘을 모아 문제를 해결했고, 드라이브스루 코스를 완성했다. 행사진행을 위해 여러 차례 수정하고 보완해 가며 ㅈ금은 행사계획을 완료한 상태다."
- '드라이브 스루 헌화'를 하는데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이었는지?
"지형상 난점이었다. 승용차가 행사장까지 들어 올 수는 있지만 출구가 없었다. 차량 출구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관련 기관의 협조와 양해를 구하고 장비를 동원하여 새 길을 텄다. 그리고 원천적으로 추모식 현장까지 승용차로 찾아 들어오는 길이 안내 없이는 매우 힘든 코스다. 그러다 보니 자원봉사자가 많이 필요하여 상당 인원을 보충하기로 했다. 뿐만 아니라 코로나19 확산 방지에 최대의 신경을 쓰다 보니 평소에는 상상도 못한 각종 장비와 물품들을 챙겨야 했다."
- '드라이브 스루 헌화'는 어떻게 진행되는지?
"오는 11일 오전 11시부터 낮 12시 30분까지 1시간 30분간 진행한다. 차량은 250대 정도, 참여인원 500명 정도 예상하고 있다. 차량 한 대의 헌화 시간을 대략 20초 정도로 계산하고, 대당 탑승인원을 평균 2명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가족 단위로 오시겠다는 분들이 많아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