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대 초반부터 40대 중반까지 알토란 청춘을 박정희체제에서, 그리고 50~60대의 중장년 황금기를 그의 후계자들이 지배하는 시대에, 민주화운동의 말석에서 허우적 거리며 살아왔다. 해서 군사정권과 유신독재, 신군부의 5공체제가 얼마나 숨막히는 전율의 시대였는가를 온 몸으로 겪어야 했다. 정보기관에 붙들려가 몇 차례 고문을 당하고, 지금은 그 후유증을 힘겹게 견디고 있다. 그렇다고 김재규 장군의 거사에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좁은 소견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과연 "야수의 심장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 장군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이것이 내가 여기서 추구하고자 하는 최종 목표이다. '김재규 장군'이라 표기한 것은 그의 유언에 따른 것임을 밝힌다. [편집자말] |
올해 2020년은 김재규 장군이 독재자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하고 그의 후계자 전두환 신군부가 광주학살을 자행하던 1980년 5월 24일 사형이 집행된 지 40주년이 된다. 첨단 기술문명, 정보화시대라 일컫는 현대의 40년은 과거 농경시대 400년에 맞먹는 긴 세월이다.
'10ㆍ26거사'의 41년이 지나고 그 '주범'이 처형 당한 지 반세기 가깝도록 이 사건에 대한 국민의 인식과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박정희로부터 크게 시혜를 받은 측은 김재규를 '박 대통령 시해범'이라 부르고, 민주인사들은 '독재자를 처단한 의인'으로 칭송한다.
18년간 집권한 박정희가 살해되고 그의 딸이 집권했다가 4년 만에 탄핵되어 수감된 지 3년여가 되어도 그들 '권력의 잔재'는 여전히 막강하다. 잔재 중에는 서울 광화문을 누비는 태극기부대로부터 재임중 각종 시혜로 급성장한 족벌신문, 재벌기업, 수구정치인, 검찰과 사법권력, 각종 연구소, 일부 대형교회 등 이른바 '기득권동맹체제'는 정치권력이 바뀌어도 여전히 대한민국의 '실세권력'으로 작동해 왔다.
그래서 암살된 독재자는 유고→서거→시해의 과정을 거쳐 우상이 되고, 그를 처단한 사람은 처음부터 시해범의 멍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여전히 우상이 된 '사자의 권력'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독재자 출신지역의 자치단체장은 그를 '반신반인'이라 불렀고, 독재자를 신격화하는 조짐은 오래 전에 싹이 텄다.
독재자의 최측근 이후락은 1970년 12월 12일 중앙정보부장 취임사에서 "우리는 모두 박정희교의 신도로서 또 전도사로서 앞장서야 할 것이다"라고 떠들었다. 청와대비서실장으로 200~300억대의 축재로 물의를 빚었던 이후락은 또 "법 이상의 신분을 보장하겠다"고 중정요원들에게 초법적인 지위를 공언했고, 그들은 헌정과 인권을 짓밟는 첨병노릇을 하였다. 그리고 우상은 결국 중정부장의 총격을 받아야 했다. 초법적인 집단을 만들고 유지했던, 역사의 업보였다.
자신의 어깨에 별을 두 개씩이나 얹었던 독재자는 마치 자신이 하늘의 별인 양, 태양인 양 행세했지만, 그의 등장과 함께 4ㆍ19로 밝았던 지상은 다시 어둠에 덮였다.
대한민국은 명색이 '민주공화국'의 간판을 걸고 출범한 나라였으나, 그의 출현으로 민주와 공화는 실종된 채, 그가 만든 정당 이름으로 전용되고, 긴 세월 1인독재의 카키색 장막으로 뒤덮였다.
그것만도 아니었다. 독재자의 사생아 전두환과 노태우로 이어지는 12년과 이명박근혜 9년도 그의 후계세력이었다. 토탈 37년, 일제강점기보다 더 긴 세월을 박정희와 그의 아류들이 집권한 나라가 되었다.
그 변곡점에 김재규 장군이 있었다.
유신체제와 긴급조치에 맞서 1979년 민주화의 열풍이 거세지자 독재자는 잔혹한 방법으로 진압하였다. 제1야당 총재를 국회에서 제명하고 체육관선거를 통해 다섯번째 대통령이 되었다.
부마항쟁이 전개되자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이 말했다.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을 쏴 죽이고도 까딱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폭동이 일어나면 한 100만 명이나 200만 명 처치하는 게 무슨 문제겠습니까? 각하께 불충하고 빨갱이들하고 똑같은 소리나 하는 놈들은 이 차지철이가 탱크로 다 밀어버리겠습니다."
김재규 장군의 10ㆍ26거사가 아니었다면 실제로 그런 참상이 벌어졌을 개연성이 없지 않다. 그동안 독재자의 행적이나 권력욕, 차지철을 비롯 전두환 등 그를 둘러싼 충성분자들의 행위로 보아 그렇다.
역사에서 가정은 부질없다지만, 그날 궁정동에서 김재규 장군이 박정희와 차지철을 살해하지 않았다면, 부산과 마산에서 그리고 서울이나 광주 또는 다른 지역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는 합리적 상상이 가능하다.
역사는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을 의사라 부른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정체성인 민주공화제를 짓밟은 박정희를 암살한 김재규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 우리는 역사의 정명을 찾지 못한 채 어언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10ㆍ26거사로 독재자가 사라진 뒤 수백억 원의 국비와 도비 등으로 그의 기념관과 생가를 호화롭게 짓거나 복원한 데 비해 김재규 장군은 1992년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삼성공원묘지 한 편에 있는 그의 묘 앞에 〈의사 김재규장군 추모비〉가 세워지고, 2019년 5월 국방부의 훈령개정에 따라 역대 지휘관 명단에 그의 이름이 올라가고, 그가 복무했던 육군부대에 겨우 사진이 게시되는 정도였다.
역사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게 되고, 정의란 무엇인가를 거듭 생각하게 한다.
『역사와 진실』을 쓴 Aㆍ샤프가 제시한 "역사인식과 역사적 진실의 객관성"에 대해, 그리고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정의란 구성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그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몫을 받는 것"이라 갈파한 것을 염두에 두면서 김재규 장군의 생애와 인간적 내면 그리고 10ㆍ26 거사 전후의 행동모습을 찾고자 한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박정희를 쏘다, 김재규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