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제는 의회 중심의 민주주의 제도이다. 2016년 말 촛불혁명으로부터 촉발된 시민들의 자발적 움직임이 도리어 행정 권력을 바꾸고 의회 권력까지 바꾸면서 사회 개혁을 추동하고 있다. 다른 방향으로는 블랙 거울로서 작동하고 있는 극우 태극기 집회와 개신교 집회의 물결이 보수 정당까지 휩쓸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세계적인 차원에서 들여다 볼 수 있는 이론틀은 없을까?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정치철학자인 안토니오 네그리와 미국의 정치 이론가인 마이클 하트가 공동으로 작업한 최신작 <어셈블리>(Assembly)는 이 관점으로 우리 정치 현상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는다. 상지대학교 교양대학 김성우 교수가 이 책의 서평을 보내와 싣는다.[편집자말] |
지난해 가을 한국을 뒤흔든 두 개의 대규모 집회가 있었다. 조국 가족 기소의 부당성과 검찰 개혁을 둘러싸고, 극우 집회(광화문)와 촛불문화제(서초동, 여의도)가 맞불을 놓았다.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이 두 집회의 성격 규정은 논란거리였다. 이 둘을 동일하게 의회 정치의 몰락으로 보고 일종의 포퓰리즘이나 파시즘으로 해석하는 양비론이 기성 언론의 주를 이루었다.
우리 지성계의 이론의 빈곤과 관점의 협소함이 드러나고 말았다. '이론이 빈곤하다'는 뜻은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현황에 대한 엄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미 남용되어 이제 생명력이 다한 낱말로 변혁적 운동과 반동적 운동을 명확한 구분 없이 표현했다는 것이다.
'관점이 협소하다'는 것은 두 개의 대규모 집회를 국내적 이슈로만 소비하다 보니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관철된 현재 상태와 이로부터 발생하는 균열과 저항에 대한 거시적인 성찰이 결여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광화문에서 열린 태극기와 기독교의 연합 집회를 미국의 극우 기독교 파시즘과 이를 기반으로 등장한 트럼프 정부, 혐한에 기반을 둔 일본 극우 파시즘 세력에 기반을 둔 일본 아베의 정부, 브렉시트를 이끈 영국의 극우 세력에 힘입은 존슨 정부 등과 연결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세계 곳곳에 등장한 이러한 극우정권과 극우운동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인해 국가와 공권력 약화를 가리기 위한 일종의 블랙 거울로 볼 수는 없는가? 그래서 트럼프와 같은 스토롱 맨(강한 남자)들이 '위대한 나라'에 대한 오래된 향수를 자극하여 극우운동 세력의 인기몰이를 하여 권력을 장악한 것은 아닐까?
그런데 그 민낯이 코로나19 사태를 맞이하여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코로나19 대응과 관련해서 미국 트럼프 정부와 아베 정부의 난맥상은 그들의 위대한 나라에 대한 선언이 초국적 금융자본에 포섭된 국가와 공권력의 부재를 가리고 있던 가면이라는 점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극우운동은 이러한 부재를 기만적 가면으로 메우고자 하는 역사적 반동적 움직임이 아닐까? 잘못된 문제제기로 얻게 된 엉뚱한 답처럼 말이다.
우리의 촛불은 다중의 운동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관철한 촛불혁명과 서초동 촛불문화제는 다중의 운동이다. 부패하고 무능한 행정 권력과 이를 뒷받침한 무소불위의 검찰 권력, 이에 유착한 기성 언론 권력에 대한 다양한 시민들의 '함께 모이기'(어셈블리)로 볼 수 있다.
다중의 운동으로서의 촛불집회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안에서 태생한 저항적 사회운동에만 머무는 것으로 봐서는 안 된다.
사적 소유의 자본에 포획된 기성 권력을 바꾸고 스스로 권력을 잡아 지도자를 전술적으로 내세워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를 건설하고자 하는 전략적 운동으로 볼 수는 없는가? 다중으로서의 촛불 시민이 전략이라는 키를 잡고 문재인 대통령을 지도자로 내세워 권력 개혁과 코로나19에 대한 방어 임무라는 전술적 자리에 배치한 것은 아닐까?
촛불운동은 아직 잠재력이 다 드러나지 않았지만, 결국 자본의 지배와 착취 메커니즘으로부터 공통·공유(the common)를 지향하는 사회경제적 구조로 '거대한 변형'을 지향한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우리나라는 방역의 모범뿐만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 건설의 모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를 위해 주권과 대의 대신에 촛불 다중이 기업가 정신을 발휘해 불안정(precarity)을 삶의 조건으로 만든 기존 세계화가 아닌 협력과 공유에 바탕을 두고 다른 세계화를 만드는 과정으로 보자.
문제 패러다임을 바꾸자!
근대적 주권과 대의제를 거부하자!
다르게 권력을 잡자!
낡은 단어 가져와 새롭게 사용하자!
이 네 가지 선언은 <제국>(2000), <다중>(2004), <공통체>(2009) 3부작으로 유명한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새로운 저작인 <어셈블리>(Assembly)(2017)를 정리해 본 것이다.
이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사회운동에서의 '리더십' 문제를 제기하며 논의를 시작한다. 레닌 식 전위부대로서의 당의 중앙집중형 리더십을 회피하면서도 사회운동의 민주적인 수평적 방식의 지리멸렬함을 극복하는 방안을 모색한다. 이를 위해서 근대적 대의제를 문제삼고 그 기초가 되는 근대적 주권이 아니라 다른 제도를 발전시키기를 원한다.
그 예로 사회적 생산의 협동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정치조직의 연합체를 읽어내고 복수적인 사회 존재론을 창출하고자 한다. 그래서 기존의 권력 통념처럼 더 나은 지도자로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라 불리는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권력 자체의 변형을 시도하려고 한다.
이러한 변형 작업은 현재를 적확하게 읽는 데서 출발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권력 관계가 처한 현재 위기를 위로부터의 관점과 아래로부터의 관점이라는 이중적 관점으로 읽자는 것이다. 2부는 아래부터의 관점에서 다중의 저항과 자본의 권력을 넘어서는 삶형태 및 생산 재생산 형태를 발명하는 방식을 고민한다.
3부는 위로부터의 관점에서 자본과 그 제도가 이 위기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를 고찰한다. 신자유주의적 거버넌스(협치)를 구성하는 착취 메커니즘의 조정과 금융 명령 양태의 발전을 고찰한다. 한마디로 자본이 어떻게 얼굴을 바꾸며 지배하고 있는지를 그려본다. 동시에 이 변화의 중심에서도 어떻게 저항과 투쟁이 발생하는지도 분석한다.
마지막으로 4부는 자본의 이러한 변화의 순환을 끊고 새롭고 지속가능한 민주적 사회 조직, 즉 공유의 군주의 구축에 이르는 저항과 전복적 실천의 경로를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이로써 저자들은 다중 운동을 자생성의 신비화로부터 벗겨내려고 한다. 단순히 '아름다운 영혼'의 낭만적인 예외적 운동이 아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키아벨리의 정치적 현실주의를 정치이성적인 권모술수의 관점이 아니라 진보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사용한다.
아래로부터 본다는 것은 종속되고 착취당하는 자들의 시각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사회운동으로 충분한가? 그렇지 않다. 사회운동의 실체 탐구를 위해 다중의 존재론과 그것의 사회적 뿌리로서의 사회 현실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아래로부터의 관점은 우선 푸코적이다. 종속된 입장에서 권력을 다르게 정의함으로써 기존 지식을 변형하여 훨씬 풍부하게 하는 이점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아래로부터의 관점은 스피노자적이다. 정치적 궤적을 그린다는 것은 다른 제도적 기획을 시도한다는 뜻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아래로부터 위를 향하여 구축하는 정치적 궤적이 다중의 경로이다.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이 경로로부터 민주주의를 자유의 도구로서 해석하는 동시에 자유를 민주주의의 산물로서 제시한다.
다중이 결정하는 자이다
그렇지만 다중의 운동을 포퓰리즘이나 대중 파시즘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문제이다. 마치 우리나라의 촛불운동을 파시즘으로 묘사한 이진우 교수처럼 말이다. 이 경우, 포퓰리즘은 인민을 통일된 형상으로 구축한다.
이는 인민의 대의 요구에 응하는 헤게모니 권력이 작동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인민의 힘에 대해 입에 발린 소리를 하지만 결국 소수 정파들이 통제하고 의사결정을 내린다는 것"이다. 이는 리더십이 전략을 쥐고 운동을 전술적 행동으로 제한하는 태도에 불과한 것이다.
반면에 다중의 운동은 "대중과 리더십, 자생성과 중앙집중주의, 민주주의와 권위 사이에 고유한 관계를 제기하기보다 양쪽의 의미를 바꾸면서 정치 패러다임 전체를 변혁한다." 왜냐하면 "다중의 행위는 더 이상 전술적이지 않고, 근시안적이지도 않으며 사회의 총이익을 보지 못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리더십은 전술적인 도구에 불과하다. 주어진 상황에 따라 사용되고 처분되는 무기인 것이다. 촛불 시민이 전략적 키를 쥐고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전술적 차원에서 활용된다는 뜻이다.
나치 정치철학자인 칼 슈미트의 말처럼 "주권자가 예외를 결정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근대적 주권을 지향하는 리더십은 더 이상 존재하면 안 된다. 리더십이 더 이상 "결정하는 자로서의 일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일자가 아닌 다자가 결정해야 한다.
사적인 것이 불평등의 원천이라면 모두에게 속하고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정치체제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이를 공적인 것이라 부르고 국가가 담당하는 것으로 근대에 현상한다.
즉 국가가 '공통·공유'를 장악하는 것을 사적 소유처럼 전유라 하지 않고 경제적 관리나 정치적 대의라고 불린다. 정치적 대의는 민주주의로 가는 지름길이거나 아니면 장애물이다. 왜냐하면 대의의 문제점도 주권과 마찬가지로 불평등한 권력관계의 산물이라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근대적 주권과 이를 대의하는 제도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왕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개념으로 등장한 주권을 제약하기 위해 사회계약론자들은 두 가지 전략을 구사한다. 첫 번째로 법치를 강조하고 두 번째로 주권의 자리를 왕에서 인민으로 옮긴다.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부르주아지 독재가 가지고 있는 주권 위치를 반전시키려는 전략이다.
그러나 인민, 국민, 프롤레타리아트는 여전히 주권의 일자적 요소(신의 결정)를 가지고 있으므로 다자가 결정할 방법을 발견해야 한다. 다중은 다자이기에 결코 주권자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들은 주인 없이 다 같이 자기를 다스릴 방법을 발견하기를 원한다.
아래로부터 보기 시작하면 근대적 권력 개념이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권력'을 고정불변의 '본질'이나 '실체'로 보는 관점이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다. 또한 기성의 총체성이 파편화된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때 운동이 스스로 혁명의 전략을 주장하기 시작한다.
과연 이 경우 리더십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저자들도 다중 운동에게 전략을 주고 리더십을 전술로 활용하자고 했을 때 이것이 현 단계에서 소망임을 잘 알고 있다. 다중의 역량을 측정할 수 없다고 솔직히 고백한다. 진정으로 다중의 운동이 리더십을 전술적으로 활용해서 조직화를 통해 근대적 주권에 바탕을 둔 대의가 아닌 다른 민주주의의 꿈을 실현할 것인가?
아니면 지젝이 비판하듯이 다중은 절대 민주주의의 현전이기 때문에 정치적인 대의(재현)를 거부한다. 그런데 대의제의 형태를 제거하고 직접적인 투명성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거의 종교적인 꿈과 같이 불가능한 것이다. 세계 차원에서의 직접적이고 투명한 민주주의의 획득은 그 자체로 '전체주의적인 잠재 요소를 지닌 유토피아'인 것은 아닌가?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김성우는 상지대 교양대학 교수이다. 로크와 롤스 등 자유주의 철학과 윤리를 공부하였다. 변증법과 해체론의 접목을 통한 새로운 실천적 존재론과 변혁의 실천 논리를 탐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