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피아노계의 대모이자 바흐 연주의 권위자인 타티아나 니콜라예바는 젊은 시절, 선배의 조언을 들었다.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가면 카라얀이라는 젊은 지휘자의 연주를 꼭 들어봐라. 그는 지금 젊은 토스카니니라고 불리고 있는, 가장 주목할 만한 떠오르는 신인이야."
잘츠부르크에 도착한 니콜라예바는 당장 그의 연주회 티켓을 구했다. 카라얀의 연주를 볼 마음에 들떠 무슨 곡을 연주하는지, 협연자가 누군지도 알아보지 않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연주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그런데,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러 무대 위로 나온 피아니스트를 본 순간 충격에 빠졌다.
"협연하러 나온 피아니스트의 몸은 구부정하게 뒤틀려 있었고, 회색빛 머리카락은 온통 헝클어져 있었다. 막상 연주가 시작되자 지휘자의 존재는 내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내 눈에는 피아니스트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가 피아노 위로 손을 올리자 곧 내 두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내가 들어 본 그 어떤 연주보다도 뛰어난 최고의 모차르트였다. (중략) 연주가 끝날 때쯤에는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그녀에게 감동한 상태였고, 지휘자 카라얀마저도 그녀에게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나는 그때 음악의 진실을 접했다." - 노태헌 지음, <20세기의 위대한 피아니스트> 중에서
연주장에 나타난 클라라 하스킬(1895~1960)은 백발 마녀 같은 모습에 등이 심하게 굽어 있었다. 그녀는 굽은 등을 펴기 위해 보조기구를 착용한 채 연주했고, 손가락은 마디마디 굽어 있어 한 음 한 음 소리를 내는 것조차도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이런 악조건에서도 그녀의 연주는 완벽 그 자체였다. 사람들은 하스킬을 일컬어 "신이 모차르트를 대신해서 보낸 대리인" "모차르트의 모차르트"라고 찬사를 보냈다.
카라얀은 클라라 하스킬을 언급하며, 솔리스트라면 저 정도 수준은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그녀와 연주하면 어떠한 희망 사항도 남겨 놓지 않는 완벽한 느낌을 받는다. 통상 연주 전 지휘자와 솔리스트가 주고받는 템포와 뉘앙스, 프레이징에 관해 의견을 교환한 후, 미처 나누지 못한 대화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하스킬과 함께라면 그 모든 문제가 자동으로 풀려간다"라고 말했다.
모차르트에 버금갈 천재, 클라라 하스킬
클라라 하스킬은 1895년 루마니아의 수도인 부쿠레슈티에서 태어났다. 스페인계 유대인 가정에 태어난 그녀는 4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의 손에 자란다. 하스킬의 천재성에 관한 이야기는 모차르트에 버금갈 정도로 많다. 다섯 살의 하스킬은 집에 방문한 지인이 연주하는 모차르트 소나타를 듣고 그 자리에서 똑같이 연주한 다음, 조를 바꿔서 다시 연주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 자리에 있던 친척이 하스킬의 손을 잡고 빈으로 데려가 지휘자 조지 셀의 스승으로 유명한 리하르트 로베르토의 지도를 받게했다. 10살에 뵈젠도르프 협회에서 솔로 리사이틀로 데뷔했고, 11세에 파리 음악원에 입학해 알프레드 코르토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코르토는 3개월 만에 더는 가르칠 게 없다고 선언할 정도로 하스킬은 뛰어났다. 입학 4년 만에 피아노와 바이올린 두 부문을 수석으로 졸업하는 기염을 뿜으며,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 바이올리니스트 외젠 이자이와 2중주를 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엄청난 연주 실력에 미모까지 겸비한 하스킬은 단박에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인생이 시작되는 나이, 겨우 18세의 나이에 엄청난 시련을 맞닥뜨린다. 온몸의 근육이 뼈와 신경에 엉겨 붙는 '다발성 경화증'에 걸린 거다.
통증은 말할 것도 없고 그녀의 몸은 비틀리고 쪼그라들었다. 순식간에 정상적인 생활도 사라지고 음악과도 멀어졌다. 설상가상이라고 그녀를 지켜주던 어머니마저 숨을 거두었다. 온몸을 깁스로 돌돌 말고 지옥 같은 시간 속에 무참하게 내던져졌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하스킬은 폭탄이 떨어지는 소릴 들으며 절망 속으로 침잠했다.
20대의 나이에 하스킬은 다발성 경화증의 후유증으로 백발이 되어버렸고, 등은 굽어 새우등이 되었다. 병은 하스킬에게 모든 것을 앗아갔다. 하스킬은 이에 굴하지 않고 몸을 일으켜 피아노 앞에 앉았다.
비틀리고 굽어진 손가락 하나하나를 펴서 건반 위에 올려놓았다. 처절하게 외롭고, 철저하게 고독한 시간이 흘렀다. 운명은 그에게 재능을 선물하고는 일순간에 다 거둬버렸다. 하지만 이런 운명과 정면승부를 건 하스킬은 1921년, 거짓말처럼 모차르트로 다시 무대에 돌아왔다.
하스킬은 재기에 성공했고, 1924년부터는 미국, 캐나다, 영국을 누비며 활동했다. 그가 다시 무대에 자리를 잡아갈 무렵 다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유대인 핏줄인 그는 나치를 피해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나치가 파리를 점령하자 그는 마르세유로 피신하는데, 이 과정에 엄청난 스트레스로 인해 뇌졸중이 왔다. 게다가 뇌에 종양까지 생겼고, 이 종양은 시신경을 압박해 실명 위기가 왔다. 그의 소식을 들은 유대인 의사가 마르세유로 와서 그를 집도했고, 가까스로 눈과 목숨을 구했다.
전쟁이 끝나고 하스킬은 마지막 연주 열정을 불태운다. 하스킬은 26살 연하의 바이올리니스트 아르투르 그뤼미오와 팀을 이뤄 연주하는데, 둘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선율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마침내 1947년, 52세가 돼서야 처음 녹음이 이뤄졌다. 그 첫 번째 곡은 런던 필과 협연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이었다.
1956~1958년, 하스킬과 그뤼미오는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과 모차르트 소나타 중 몇 곡을 녹음했다. 이때 녹음한 음반 중 모차르트 소나타는 세계 여러 음반 중 가장 뛰어난 음반으로 알려져 있다.
자신의 연주에 엄격했던 하스킬은 "지금 모차르트 KV. 271과 KV. 466을 들었는데 모두 너무 실망스럽다. 아마 내 평생 진정 만족할 만한 음반은 하나도 못 만들고 죽을지 몰라"라고 평했다. 자신에 대해 그토록 혹독한 평가를 했던 그이지만, 모차르트 소나타 KV. 304와 슈만의 아베크 변주곡, 숲의 풍경은 스스로 괜찮은 음반으로 평가했다.
그도 괜찮다고 평가한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KV. 304는 모차르트가 22살에 어머니를 보내고 슬픔에 잠겨서 쓴 단조곡이다. 모차르트의 슬픔이 하스킬의 손을 통과하면서 만들어내는 선율이 듣는 이의 마음을 통째로 흔들어버린다. 굉장히 시리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 나는 이 곡이 마치 모차르트가 그를 위해 남겨 놓은 곡이란 생각이 든다.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주고받는 대화가 모차르트가 하스킬에게 위로를 건네는 느낌이랄까.
오케스트라(모차르트)는 피아노(하스킬)에 주저앉지 말고 일어나라고 독려하고, 피아노는 서러운 마음을 쏟아내고, 다시 오케스트라가 그를 위로한다. 하스킬이 음악으로 시련을 극복할 수 있었던 힘이 느껴지는 곡이며, 그가 왜 '모차르트의 모차르트'인지를 알게 하는 연주다.
가혹했던 인생에도 "저는 행운아였습니다"
하스킬은 공연하러 온 브뤼셀역에서 현기증으로 실족하여 쓰러지고 말았다. 병원으로 급하게 옮겨지고 정신이 돌아온 그는 동생에게 "그뤼미오 씨에게 내가 함께 연주회를 계속하지 못해 얼마나 미안해하는지 전해주거라"라는 말과 함께 "그래도 손은 다치지 않았잖니!"를 유언으로 남기고 눈을 감았다. 1960년, 12월 7일이었다.
가혹하다는 말도 무색한 인생이었다. 그는 화려한 기교를 앞세우지 않고 내면 깊은 곳의 울림을 전하는 진솔한 연주자였다. 고통에 굴하지 않고 때마다 분연히 일어서는 예술가의 영혼은 시대를 넘어 우리에게 무한한 위로와 깊은 울림을 전한다.
평생 혼자 몸으로 고양이 한 마리와 온기를 나눴던 그가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항상 벼랑 모서리에 서있었어요. 그러나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인해 한 번도 벼랑 속으로 굴러떨어지지는 않았지요. 그래요, 그건 신의 도우심이었습니다." - 지식채널e 클라라 하스킬 편에서 인용
참고서적
<20세기의 위대한 피아니스트> 노태헌, 살림.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 2> 박종호. 시공사.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인천 투데이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