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비법'이 있어서가 아니다. 특별한 '한 방'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것만이 무조건 맞다는 것도 아니다. 내가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은 엄마의 레시피는 나에게 오로지 하나뿐인 레시피이기 때문이다. 엄마의 일흔살 밥상을 차려드린다는 마음으로 엄마의 음식과 음식 이야기를 기록한다.[기자말] |
두릅을 앞두고 나는 늘 딜레마에 빠진다. 쌉쌀한 맛에 영양도 풍부한 두릅은 봄 채소의 대표격이어서 꼭 먹어줘야 할 것 같지만, 모양새를 보면 썩 내키지 않는다.
두릅 몸피에도 가시가 있지만, 잎에도 가시가 있을 것 같아서 먹기도 전에 입이 껄끄럽다. 가시도 그렇거니와 두릅 다발이라는 것이 마구 엉킨 머리칼 같아서 좀 심난하다. 제멋대로 머리를 싹둑 자른 10대를 보는 것 같다.
가장 만만한 것은 두릅숙회다. 두릅을 적당히 데쳐서 초고추장에 찍어먹으면 한 끼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엄마는 두릅숙회도 좋아하시지만 두릅을 초고추장에만 찍어먹는 게 아까웠는지, 두릅쇠고기꼬치를 생각해냈다.
두릅의 쌉쌀함과 쇠고기의 고소함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게 엄마의 생각이었다. 글쎄 어떨까? 두릅과 쇠고기.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커플의 데이트를 기대하는 심정으로 엄마의 두릅쇠고기꼬치를 지켜보았다.
반항아 같은 비주얼... 이걸 먹어 말어?
일단 두릅을 다듬는다. 몸피를 둘러싼 껍질을 벗기다보면 가시도 자연스레 떨어져나간다. 심난해 보였던 가시도 한꺼풀 벗기니 별 것 아니었거늘 내가 너무 호들갑스러웠구나 싶다. 찌부둥하고 심난했던 문제도 한숨 자고 나면 별 것도 아닌 사건이 되듯 말이다.
팔팔 끓는 물에 소금을 넣고 두릅을 데친다. 기세등등하던 두릅도 풀이 죽고 순해진다. 언제 가시가 있었냐는 듯, 삐죽삐죽 뻗어나가던 잎사귀도 축 늘어져 조금은 측은한 모습이다.
두릅 뿌리 부분에 십자나 일자 모양으로 칼집을 넣어주면 데칠 때 좀 더 수월하다. 단, 너무 무르게 데치지 않는다. 어차피 뒤에 가서 한 번 더 쪄야 하기 때문이다. 길들여지는 두릅의 운명이여. 나무에서 피어날 때는 이럴 줄 모르고 하늘을 찌를 듯 기세등등하고 도도했었다.
착해진(?) 두릅을 잠시 쉬게 하고, 이제 쇠고기를 준비한다. 쇠고기는 기름기가 적은 설도살 부위를 준비해서 꼬치에 꽂을 정도의 길이로 썬다. 쇠고기가 입을 양념장을 준비한다. 양념장은 양조간장과 설탕, 마늘, 파, 참기름, 후추, 통깨.
기세등등한 모습은 어디로 가고
양념장을 살짝 묻힌 쇠고기와 두릅을 꼬지에 번갈아가며 끼운다. 두릅 하나 쇠고기 하나. 그 둘은 사이좋게 서로의 어깨를 나란히 한다. 고기와 채소. 영양가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식재료 둘은 꼬지에 서로의 몸을 꿰어가며 동병상련을 느낄 것이다.
꼬지에 꽂은 쇠고기와 두릅 위로 밀가루 옷을 입힌다. 밀가루를 그냥 묻히면 너무 덕지덕지 요란해진다. 한 듯 안 한 듯 아주 살포시 밀가루 날리는 정도로만 화장해야 한다. 엄마는 밀가루를 체에 걸러서 꼬치 위에 뿌렸다. 밀가루라기보다 파우더 같고, 밤새 살짝 내린 싸락눈 같기도 하다.
파우더 화장을 곱게 마친 두릅과 쇠고기는 이제 뜨끈한 '찜질방'으로 들어가야 한다. 찜기에서 6~7분가량 찌고 난 후, 두릅과 쇠고기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해 나온다. 두릅은 푸릇함을 잃었고, 쇠고기는 핏빛 열정을 상실했다. 10년은 폭삭 늙은 모습이다. '화려한 왕년'의 기억을 간직하는 두 명의 어르신이 어깨를 수굿이하고 서로 의지하는 모습 같다.
두릅을 보니 엄마가 떠오른다. 내 기억 속 엄마의 젊은 시절은 까칠하고 도도했고 차가웠다. 마치 삐쭉한 두릅과 같았다고 할까. 항상 선을 분명히 긋는 성격이셨고, 수다스럽지도 않았으며 잘 웃지 않았다. 우리 형제들이 까르륵 웃어대면, 너무 해프게 웃지 말라고 주의를 주곤했던 엄마였다.
가시는 잃었어도 두릅의 쌉쌀함, 살아 있네~
지금 엄마의 모습은 그 시절과 사뭇 다르다. 엄마도 세월의 찜방에 들어갔다 나와서일까. 주름도 늘었고 머리는 하얗게 세었다. 염색을 하셔서 흰머리가 잘 드러나지 않지만, 칠흑같은 검은 머리칼로 염색도 잘 안 되는 모양이다. 예전보다 웃음도 많아지고 말씀도 많아졌다. 감성도 더 풍부해지고 세상사 궁금한 게 많아졌다. 길을 가다가 잘 모르는 사람에게 말도 잘 건네고 물어보기도 한다. 엄마는 나이 들어 말캉해진 걸까. 아니면 더 단단해진 걸까.
한숨 죽은 두릅을 씹어본다. 뻣뻣함은 온데간데 없고 다른 채소들처럼 연하고 부드럽다. 그 까칠함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소고기의 고소함에 힘입어 두릅의 부드러움은 더욱 그윽한 풍미를 자아낸다.
이게 두릅의 맛이었나 싶지만, 여기서 잠깐. 아직 끝이 아니다. 다 씹어 넘길 때에 입안에 두릅의 쌉쌀한 풍미는 남아 있다. 한 숨 죽었어도, 세월의 찜방에 들어갔다 나왔어도, 두릅은 두릅이다. 푸른 쌉쌀함은 남아 있던 것이다. 이게 두릅이었나 싶다. 두릅, 살아 있네.
따끈하게 찐 꼬치를 간장에 찍어먹거나, 차갑게 냉동한 후에는 달걀 옷을 입혀서 한번 부쳐 먹어도 맛있다. 그래서 데칠 때 너무 무르게 데치지 말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두릅쇠고기꼬치는 그냥 먹을 만큼만 해서 즉석에서 다 먹는 게 좋을 것 같다. 굳이 냉동시켜서 다시 열을 가하고 싶진 않다. 따끈할 때 맛있게 먹어주는 게 두릅의 한풀 꺾임에 대한 '예의'일 것 같다.
젊은 시절, 엄마가 서슬퍼랬던 이유
젊은 시절 엄마는 직장을 다니면서 자식들을 건사하느라 무척이나 고단하셨을 것이다. 얼마나 고단하셨을지 이제야 나는 깨닫는다. 젊은 시절의 엄마는 다른 곳에 신경쓸 여유나 체력이 한 푼어치도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에너지를 가사와 육아, 직장생활에 모두 소진해야 했으므로. 하루하루가 엄마에겐 전쟁이었으므로.
젊은 시절 엄마는 서슬퍼랬다. 그 누구라도 그땐 그럴 것이다. 그 까칠했던 엄마가 이제는 말캉해지셨다. 부드러워지셨다. 하지만 나는 안다. 엄마의 그 까칠함, 엄마의 가시는 다른 형태로 깊숙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다만 드러나보이지 않을 뿐이다. 엄마는 엄마만의 '쌉쌀한 맛'을 잃지 않을 것이다. 엄마는 물컹해진 게 아니라 더 단단해진 것일테니.
정선환 여사의 레시피
1. 두릅은 가시를 벗기고 뿌리 부분은 칼집을 낸다.
2. 끓는 물에 소금을 넣고 두릅을 살짝 데친다.
3. 쇠고기는 설도살 부위로 준비하여 꼬치에 들어갈 정도로 자른다
4. 양념장을 준비한 뒤 쇠고기를 주물주물 양념한다.
(양념장은 양조간장 반스푼, 설탕 반스푼, 마늘 작은술, 파(마늘의 2배), 참기름 작은술, 후추 한꼬집, 통깨)
5. 꼬치에 데친 두릅과 쇠고기를 번갈아가며 끼운다.
6. 찜솥의 열기가 올라오면 두릅쇠고기꼬치를 약 5분간 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