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는 지리산권 지역에 필요한 작은 변화를 이끌어내는 사람들과 공익활동을 지원하고 있는 민간 지원단체로, 아름다운재단과 사회적협동조합 지리산이음이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개소 3년차를 맞아 지리산권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 모임, 공간, 네트워크를 소개하는 글을 싣습니다.[기자말] |
경남 산청군에서 지역의 변화를 만들기 위해 사람들이 모이고 움직이는 지역활동 거점을 꼽으라면, 산청에서 다시 '산청'이라 불리는 산청읍, '원지'라고 불리는 신안면 일대, 그리고 '덕산'. 이 세 곳을 꼽을 수 있겠다.
그 중 '덕산'은 삼장면과 시천면을 아울러 부르는 이름인데, 산청 내에서도 고유하고 독특한 분위기를 가진 곳이다. 덕산의 안 쓰는 공간을 임대해 지역민들을 위한 대안공간 '모하노'로 꾸민 유훈정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누구나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공간
"덕산에는 양봉과 곶감 생산에 종사하는 분들이 많으세요. 그래서 보통의 다른 농촌들보다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분들도 많고, 젊은 분들도 많아요. 그래서인지 경제활동이 무척 활발하고, 상업적인 구조도 탄탄하게 이루어져 있고, 주민들간의 결속도 견고한 것 같아요. 덕산 특유의 분위기와 삶의 방식도 있고요.
외지에서 온 사람이라면 한동안 적응하기가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어요. 어쩌면 도시보다 더 각박하다고 느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저는 그런 특성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것이 덕산 사람들에게는 큰 자부심이에요. 여긴 그만큼 정말 열심히, 성실히, 바쁘게 사는 분들이 많이 계세요. 그런 에너지가 모이고, 지역의 변화를 만드는 일로 발산된다면 덕산이 산청의 중심지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유훈정씨는 도시에서 논술학원을 운영하며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는 일을 하다가 7년 전 이곳으로 왔다. 산청에 와서도 학교뿐 아니라 어딘가에서 늘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지만, 농사도 짓고, 꿀을 생산하기 위해 벌도 기른다.
"아는 분이 이 공간에서 학원을 운영하다가 그만둔다고 할 때 놀러 와봤어요. 피아노 학원, 공부방으로 쓰이던 곳인데 보나마나 또 학원이 될 것 같더라고요. 제가 학원을 운영해봤고 강사도 해봤는데 아이들에게 제일 불필요한 게 이런 학원식 교육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덕산에 학원은 충분히 많으니까, 다른 공간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한동안 코워킹 스페이스, 공유공간 같은 것이 유행한 적 있잖아요. 남편과 저의 사무실로도 사용하고, 누구에게나 열어놓는 공유공간으로 사용하려고 했어요."
2019년 5월, '모하노'라는 이름으로 공유공간의 문을 열었다. 모임이나 강좌가 열릴 수 있도록 책상과 의자는 물론, 프린터, 팩스, 컴퓨터 등의 사무집기와 문화활동과 모임을 위한 빔 프로젝터와 스크린, 책, 보드게임에 간단히 음료와 간식을 준비할 수 있는 공간까지. 사람들이 모이고 싶을 때 필요한 것이 웬만큼 다 갖춰져 있었다.
정말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모하노를 지켜보거나 찾아온 사람들이 함께 공간을 채워갔다. 얼마 후에는 '양심가게'라 불리는 셀프매점 형태의 부엌과 누구나 그림을 그리거나 색칠하며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그림터'가 마련됐다. 그때쯤이었을까.
'친' 청소년 공간 혹은 '찐' 청소년 공간
"열어뒀더니, 이 자리에 청소년들이 자리를 잡게 됐어요. 어른들은 카페에도 갈 수 있고, 소속된 단체의 사무실에 갈 수도 있잖아요. 관계성이 없으면 사실 이런 낯선 공간에 오기가 쉽지 않죠.
그런데 청소년들은 학교 끝나면 항상 갈 데가 없는 거예요. 카페 가는 것도, 편의점에 가는 것도 하루이틀이죠. 갈 데가 없어서 쉼터처럼 여기며 오는 친구들도 있고요. 제가 숲속새마을작은도서관 운영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그곳이 봉사활동 인증 기관이라 청소년들이 있었어요. 또 제가 학교에도 수업을 나갔으니까, 그렇게 소식을 들은 아이들이 찾아왔어요."
얼마든지 가르칠 능력이 있고, 심지어 학원을 운영해 본 경력도 있는데, 이곳이 학원이 되지 않길 바랐다고 하니, 아이들에게도 분명 평범한 선생님은 아니었을 것이다. '훈정쌤'과 좀 만나본 아이들이라면 이 공간에 좀 더 쉽게 마음을 열었을 것이다. 적어도 '어른들 눈치'보며 앉아 있어야 할 곳은 아니라는 것을 감지했을 것이다.
지금은 자연스럽게 청소년들이 모하노의 터줏대감이 됐다. 아마 이곳이 또다른 학원이 됐다면 아이들은 지금과는 다른 표정으로 이 공간을 마주했으리라. 공간이 주인을 제대로 찾은 느낌이다.
"지금은 거의 책임과 안전의 문제만 제가 해결하고 있고, 아이들이 모하노의 주인인 것이나 다름없죠. 청소년들이 이 공간이나 시스템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 같이 의논하고 도와주기도 해요. 같이 재미난 일을 기획하기도 하고요."
무언가 하지 않아도 좋지만, 무언가 하고 싶어지는
모하노를 열 때는 무언가 할 만한 공간이 필요한 사람들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그런데 상상 밖에 있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 필요했던 청소년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청소년들은 이 공간에 마음을 열면서 점점 할 일을 찾기 시작했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순서다. '아, 이렇게도 공간이 채워질 수 있구나!'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뭐라도 할 수 있는 모하노.
심지어 앞세우는 조건도 없다. 사용 계획서도 필요 없고, 결과 보고서를 제출할 필요도 없이 말이다. 이런 너그러운 공간을 가장 필요로 했던 사람들이 찾아온 게 아닐까.
모하노를 스스로 둥지로 만든 청소년들은 이곳에서 꾸준히 토론 동아리, 그림 동아리, 레트로(옛날 감성을 즐기기) 모임 등을 만들어 활동하거나 보드게임을 즐기기도 하고, 때때로 1일 카페를 운영하기도 하고, 콘서트나 장터같은 행사를 기획해서 열기도 했다.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청소년들이 스스로 무언가 하고 싶게 만드는 공간이 된 비결이라도 있을까. 유훈정씨와의 대화에서 몇 가지 힌트를 얻은 것 같다.
"제가 무한정 재화를 투자할 수 없으니까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지원사업을 연결해주기도 했어요. 그런 활동을 통해서 사람(청소년)을 키웠다는 점이 좋았던 것 같아요."
"산청읍에서 청소년자치공간 '명왕성'을 운영하는 김한범 선생님과도 이야기했어요. 아이들은 심심해야 한다고, 어른들의 시선을 거두어주어야 한다고요."
"물론 아이들의 숨어 있는 유익을 찾아주기 위해선 어른다움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평소엔 특별히 어른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저도 그냥 구성원이라고 생각해요. 반영하는 객체 정도요. 시범과 권유를 하기도 하지만 강압적이지는 않아요. 제가 배우려는 자세를 취하면 아이들이 가르쳐주면서 스스로 배우는 것 같아요. 아이들은 누군가를 가르칠 때 더 많이 배우는데, 너무 많이 배움 당하는 것 같아요."
"이용자들이 스스로 여기서 할 일을 찾고, 공간의 정체성을 만들어갈수록 제가 할 일은 점점 더 줄어들어요."
그저 자리를 내어준 것뿐인데, 이렇게 활발히 자기 존재를 펼치고 있다니. 우리가 청소년들에게 '그저 자리를 내어주는 것'도 못하고 있지 않은가 돌이켜보게 된다. 지금의 모하노는 구석구석 청소년들의 손길이 가득 느껴진다.
그러나 모하노는 여전히 모두의 것
이렇게 자리잡은 마당에, 청소년 공간 모하노로 쭉 밀고 나가는 편이 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유훈정씨는 청소년들이 누리면 청소년 공간으로, 또 필요한 누군가가 나타난다면 그 필요대로, 자연스러운 흐름대로 모하노의 정체성이 언제든 바뀔 수 있다고 했다.
"더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공간지기의 자리를 내어줄 생각도 있어요. 같이 으쌰으쌰할 수 있는 분이라면 누구라도 좋을 것 같아요. 이곳을 필요로 하는 분들과의 인연에 따라서 모하노가 어떤 곳인지 계속 만들어질 것 같아요. 뭐라도 될 수 있는 곳이에요. 백지 같은 곳. 아직도 모하노가 무슨 공간인지 궁금해하는 이웃들이 많은데… 딱히 저도 해줄 말이 없어요."
올해 초 코로나19 감염 확산으로 휴식기를 가졌던 모하노가 다시 슬슬 기지개를 켠다. 이번엔 그림터를 조금 늘리고, 공간을 분리해 공부방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한다. 책을 나누는 공간, 꼭 필요한 사람에게 물건이 돌아가도록 하는 나눔공간을 만들어볼까 하는 상상도 하고 있다고.
"어른이든, 청소년이든, 이 공간이 필요하면 눈치 보지 말고 이용하시면 좋겠어요!"
'하나로 딱 결정된', '눈에 띄게 분명한', '똑 떨어지는' 것이 더 편안하고 익숙한 우리들에게 '이래도 되고 저래도 돼' '네 것도 아니고 내 것도 아냐, 모두의 것이야' '이럴 곳일 수도 있고 저런 곳일 수도 있어'라는 모하노의 소개가 답답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런 활짝 열린 표현 자체가 낯설어서일까. 진정으로 함께 만들고, 공유해본 경험이 없어서일까. 문이 닫힌 동안 모하노의 첫 생일이 지나갔다. 마음 속으로나마 초를 켜고 축하를 전하며 모하노가 내어준 공간이 얼마나 큰 자리인지에 대해 생각해 본다.
모두의 것도 울타리 치고 내 것, 우리 것이라 우기는 시대에, 자신의 것을 모두의 것으로 내어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 귀한 자리에 더 큰 변화를 꿈꾸는 에너지와 재미난 일들이 가득 모이고 펼쳐지길 바란다.
글 | 정푸른
사진 | 임현택
기획/진행 | 누리
Author 정푸른
내 이름도 별명도 살고 싶은 모습도 '푸른'. 나는 따뜻하거나 뜨거운 사람. 어린이의 벗 되어 살고 싶다. 어린이 해방을 꿈꾸며 산청에 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인터뷰는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홈페이지와 아름다운재단 블로그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