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처음 만난 건 쌍용차 정리해고 반대 총파업이 한창이었던 쌍용차 평택공장이었다. 쌍용자동차 경영진은 2009년 5월 8일 어버이날 정리해고를 노동부에 신고했고 한 달 뒤인 6월 8일 해고 통지서 노란 봉투가 비수처럼 각자의 집으로 배달되었다. 문화부장이었던 나는 조합원들이 해고통지서를 받은 뒤 느낄 상실감과 분노를 투쟁의 기운으로 모으기 위해 공장 안에서 촛불집회를 준비했다.
2600여 명의 조합원이 직접 받은 해고통지서를 준비한 관 6개에 넣게 하고, 그 관을 끌고 공장 뒤편에 미리 종이박스로 만들어 놓은 건물 2층 높이의 정리해고 탑과 함께 불태우며, 관과 정리해고 탑이 활활 탈 무렵 '함께 살자'는 절박한 불 글자가 나오는 정말 손이 많이 가는 블록버스터급 집회를 기획했다.
간담 서늘케 한 김진숙의 말
그날 집회가 하나의 흐름으로 가기 위해선 상징의식도 필요했지만, 조합원들의 마음을 다잡는 발언이 특히 중요했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임원들도 훌륭하지만 살아 있는 이야기를 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무수한 이름들이 오갔고 백기완 선생님,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하 김 지도) 중 한 분이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 일단 두 분에게 연락을 돌려 두 분 중 한 분이라도 섭외가 되면 좋고 안 되면 다시 회의하기로 했다. 백 선생님은 당시 지부장이었던 한상균 동지가, 김 지도는 담당자인 내가 연락을 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했으나, 당시 김 지도는 그날 제주도에 일정이 있어서 참석이 어렵다고 이야기했다. 단박에 거절 당하는 것 같아 아쉽고 아쉬운 소리를 주저리주저리 했었다. 그러자 김 지도위원은 제주도 일정을 조절할 수 있는지 다시 알아보겠다고 했고, 첫 발언이면 참석이 가능할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지도 발언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난 첫 발언을 약속했고, 기분 좋게 그날 집회를 준비해갔다. 그런데 백 선생님도 참석할 수 있다고 연락이 왔다는 것 아닌가. 두 분 다 섭외하기 어려워서 한 분만 가능하면 좋으리라 생각했는데 두 분 다 참석할 수 있다니 집회로만 보면 좋은 일이었지만, 담당자인 나는 굉장히 곤욕스러웠다. 백 선생님이 오시면 관례상 집회 첫 발언을 하는데, 담당자인 내가 덜컥 김 지도에게 첫 발언을 약속해 자칫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날 집회가 시작되기 30분 전쯤 도착하신 백 선생님에게 김 지도의 다음 일정 때문에 먼저 발언을 해도 괜찮냐고 양해 말씀을 드렸는데, 그런 이야기는 난생처음 듣는다는 표정으로 날 한참을 쳐다만 보셔서 엄청 졸였다. 다행히 선생님이 양해를 해주신 덕분에 집회는 예정대로 무사히 시작될 수 있었다.
난 그렇게 말 잘하는 사람이 있는 줄 몰랐다. 입을 떼자마자 모두를 집중시키는 목소리, 쌍용차 노동자들이 느낄 법한 마음을 툭툭 건드리는 단어들, 안정된 목소리톤, 기승전결이 있는 발언 등 모든 것이 완벽하게 느껴졌다. '선동이란 저런 것이구나' 고개를 주억거렸다. 발언하는 사람을 보고 눈을 못 떼기는 처음이었다.
"조합원들이 스스로의 싸움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지금 무대 앞 관에 들어 갈 것은 상징의식으로 넣을 해고통지서가 아니라 쌍용차 노동자들일 것이다. 함께 싸우지 않으면, 이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면 누군가가 죽어 갈 것이다. 함께 싸워서 반드시 이기자"라는, 모골이 송연할 정도의 처연한 그의 선언은 슬프게도 꼭 들어맞았다.
그 뒤 쌍용차 해고자와 가족들의 죽음이 몇 번째 죽음으로 불려질 때마다 김 지도의 발언이 불현듯 떠올랐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한 번 이기고 지는 것이 아니라 전부를 잃지 않으려는 각오가 필요한 것이라는 다짐도 함께 떠올랐다.
희망버스
2011년 1월 6일, 김 지도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구조조정을 막기 위해 85호 크레인 고공농성 투쟁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함께 투쟁하던 이창근 동지가 심각한 목소리로 '김 지도 고공 소식을 들었냐'며 장탄식을 해댔다. "85호 크레인은 한진중공업 김주익 지회장이 고공농성을 하다 열사가 된 곳 아니냐"며 "이러다 김 지도도 잘못 되는 것 아닌지 걱정"이라고 걱정했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 구조조정을 이유로 단식투쟁까지 했던 터라 걱정은 더 커져갔다.
한동안 하늘을 쳐다보는 게 습관이 되었었다. 오늘의 날씨는 어떤가,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햇볕이 강하면 강한 대로 걱정과 우려의 나날이었다. 영도에 우뚝 서 있는 85호 크레인이 무사하길 기도했다. 희망버스투쟁은 이러한 바람과 우려와 걱정이 만들어낸 '마음의 결정체'였다.
상급단체의 지침이 아닌 오직 스스로의 의지로 김진숙을 만나고,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부당한 해고를 막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영도로 떠나는, 이름만은 촌스러운, 하지만 다른 무엇으로도 바꿔 부를 수 없는 '희망버스'를 탑승했다.
버스에 타 각자의 이름과 하는 일,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내려가는지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이 이동 중인 버스 안에서 이뤄졌다.
"사실 오늘 저는 한진중공업 담벼락을 넘고 싶어요. 2009년 쌍용차 평택공장에서 느꼈던 고립감과 외로움을 김진숙 지도와 한진중공업 동지들이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다 같이 담벼락을 넘어서 그들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웬걸, 내 생각과 달리 한진중공업 담벼락은 쌍용차와는 달리 높고 튼튼해 보였다. 전국 각지에서 왔다고 하는데 버스도 많지 않았고, 버스에서 내리는 동지들도 꾸부정하니 지쳐 보였다. 한진중공업 앞을 막고 있는 용역과 경찰들만 쌩쌩해 보였다.
'오늘은 그냥 쌍용차 평택공장 앞에서 소리를 질렀던 사람들처럼 나도 밖에서 소리만 지르고 가겠구나' 생각했는데 갑자기 영화처럼 사다리가 내려왔다. 물론 다 계획대로 일을 진행하는 것이었겠지만, 참으로 신나는 광경이었다. 경찰도 우왕좌왕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동지들이 조금씩 담벼락을 넘어갔다.
그날 오전 담벼락을 함께 넘자며 입바른 소리를 했으나, 실상 나는 담벼락 넘는 걸 망설였다. 영화 같은 순간이었지만, 내 영화는 법정영화로 흘러갈 것만 같았다. 2009년 쌍용차 투쟁을 하다 수십 가지의 죄목으로 구치소에 가고 집행유예 선고를 받은 나로선 당연한 고민이라고 자위했다. 고령의 백기완 선생님, 문정현 신부님이 담벼락을 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무거운 다리를 옮겼다.
사다리를 넘자 커다란 덩치의 용역들과 마주했다. 용역은 현장 노동자들을 감시하고 돌아다니며 겁을 주는 일을 했었다. 쌍용차에서도 겪었고, 한진중공업 노동자들도 겪는 공포였다. 용역들은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욕을 하면서 공장 안으로 들어오는 이들에게 겁을 줬는데, 점점 늘어나는 희망버스 탑승자들을 보더니 소화기를 난사한 뒤 한발 물러섰다. 경찰도 반드시 일벌백계 하겠다는 경비과장의 방송이 끝이었다. 2009년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던 쌍용차 평택공장에서의 고립과 공포를 한 번에 씻어 내리는, 갈라진 마음에 단비가 내리는 기분이었다.
마침내 한진중공업은 희망버스와 노동자들의 해방구가 되었다. 우리는 밤새 이야기하고 춤을 추고 웃고 노래했다. 지쳐서 잠들 때까지 웃고 떠들었다. 가끔 이야기한다. 그날 밤 담벼락을 넘어간 이들의 삶의 궤적은 넘지 못한 이들과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고. 연대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고 스스로를 구하는 것이라고, 희망버스는 나를 비롯한 많은 이에게 다른 삶으로의 변곡점이 되었다.
이후 수없이 많은 연대와 투쟁, 한진중공업 노동자들과 김 지도의 목숨을 건 투쟁으로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는 철회되었다. 하지만 김 지도는 한진중공업 복직자가 되지 못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김 지도가 스스로의 복직을 위해 단 한 번도 목소리를 높인 적이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혹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인지 김 지도의 복직은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복직하고 싶다"
"김 지도님 저 이번에 복직하게 됐습니다. 그동안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김 지도님 덕분이에요. 근데 기쁘지는 않아요. 정우형도, 충렬이형도 이번에 못 들어갔거든요."
2009년 쌍용차 공장에서 쫓겨나 투쟁한 지 8년 만에 복직하게 된 날, 김 지도에게 조심스레 복직 소식을 알렸다. 그는 담담하게 '축하한다, 복직하더라도 아직 복직 못한 동료들을 잊지 말라'는 당부를 전했다.
쌍용차 정리해고로 인해 동료와 가족들의 장례를 서른 번이나 치르고 이뤄낸 복직이었기 때문일까. 단계적 복직이라는 미덥지 못한 합의와 더 복직이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를 담은 축하인사를 담담하게 주고받았다. 그래도 내심 기뻐해주고 축하해줄 것이라는 약간의 기대와는 다른 담담함이 마음에 걸렸다.
잠시 뒤 나의 복직 소식을 알리는 그의 SNS를 보고 한참을 멍했었다.
'해고 31년, 나도 돌아가고 싶다.'
그도 30년이 넘었을 뿐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은 해고자였다. 한진중공업과 수 많은 교섭 속에서 요구안으로만 남은 김진숙 복직에 대한 안건은, 다른 이들은 복직해도 김진숙 만큼은 안 된다는 사측 고집에 더 좋은 단체협약으로 바뀌었고, 더 나은 타결조건이 되었다.
조합원들에게 좋은 합의란 김진숙 복직을 갈아 만든 합의였고, 35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홀로 해고자로 남아 있다. '복직하더라도 아직 복직 못한 동료들을 잊지 말라'는 당부가 스스로를 관통하는 당부임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도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은 그 뒤로도 쌍용차 해고자들이 복직할 때마다 메아리처럼 계속 생각났다. 그리고 35년, 이제 그는 정년을 앞둔 나이가 되었다.
35년이라는 시간동안 그가 해야만 했던 일들은 동료의 해고를 막는 것이었고, 죽지 않는 안전한 일터를 만드는 것이었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함께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죽어간 이들을 생각하며 한겨울에도 찬 바닥에서 잠을 청했고, 싸우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 용기가 되어주고, 스스로를 불태워 동료를 지키고 죽어가는 마음들을 다시 살려내었다.
우리는 그에게 몸과 마음의 빚이 있다. 김 지도가 35년 동안 단 한 번도 포기 하지 않았던 꿈, 현장 복직의 요구를 우리가 함께 나눠지길 기대한다. 김 지도가 아닌 용접노동자 김진숙. 그의 이름을 다시 찾을 때까지 그가 살아왔던 것처럼은 아닐지라도 각자의 선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다 하면 좋겠다. 김 지도가 정년이 되기 전에 다시 용접노동자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가 동료들과 함께 만들어 낸 배를 보고 싶다.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
한진중공업 35년 해고자 김진숙님의 복직을 응원합니다. 함께 해주세요.
1. "현장으로 돌아가자!" 복직 응원 기자회견
7월 28일(화) 오전 11시 / 여의도 산업은행 앞
참가자 준비물: 그동안 연대해왔던 여러 희망버스의 상징물(각종 수건, 티셔츠, 버튼 등)을 갖고 와주십시오.
모든 참여자가 함께 만드는 기자회견입니다. 단체, 개인 누구라도 자유롭게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기자회견 공동주최자가 되어주세요.(연명기간: 7월 26일(일) 밤까지)
2. 김진숙님에게 보내는 응원의 편지
김진숙님에게 전하는 편지를 남겨주시거나 아래의 주소로 편지를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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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메일 편지 : jinsook2020h@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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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SNS에 많이 알려주십시오. 해쉬태그는 #김진숙복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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