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토니아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던 헤인즈 발크 씨는 놀라운 이야기를 하나 전해주었다. 몇 년 전 퇴역 군인 한 명이 발크 씨를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다며 박물관으로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뭔가 개인적으로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그는 러시아 출신 에스토니아인으로 탈린에 거주하고 있었고 발트의 길 당시 레닌그라드에서 전투기 조종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발트의 길이 열리는 날짜에 맞추어 상트페테르부르크(옛 레닌그라드) 공군비행장에서 대기하고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발트의 길이 열리면 폭격기들이 바로 그 위로 아주 낮은 저공비행을 하면서 사람들을 위협할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 정도면 행사의 와해뿐 아니라 사람들의 청각에도 영향을 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지상 몇 미터의 저공비행은 전투기 자체도 사고가 날 수 있는 확률이 높았다. 그렇게 사고의 위험을 감수하면서라도 발트의 길을 방해할 계획이 있었음을 알게 됐다. 만약 정말 그런 일이 발생했다면 아찔한 상황이 연출됐을 것이다.
당시 탈린에 살고 있었다는 그 전직 조종사는 발크 씨에게 자신의 연락처를 주었으나 안타깝게도 발크 씨는 이를 잃어버렸고, 그래서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 없어서 아쉬웠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얘기를 상당히 자세하고 논리적으로 기술해주었기 때문에, 그가 한 이야기들은 충분히 신뢰할 만하다고 발크 씨는 전했다.
그것 말고도 탱크 진입 가능성, 군사적 도발을 우려할 만한 첩보나 정보 역시 많이 입수됐다. 그래서 인민전선 내부에서는 '발트의 길'이 1968년 '프라하의 봄'이나 1956년 '헝가리 혁명'처럼 비극적으로 진압될 우려가 역시 상당히 커져 있긴 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크렘린(러시아 궁)은 그들이 벌이는 '작당 모의'에 놀랄 정도로 관심이 없었다. 고르바초프는 휴가 중이었고 에스토니아 KGB는 모스크바에 계속 정보를 전달해 줄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모스크바에서는 이런 작은 공화국에서 기획하는 행사가 별다른 큰 변화를 가져다줄 것이라곤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던 것으로 여겼던 모양이라고, 발크 씨는 고백했다.
발크 씨는 소련의 군사적, 정치적 해이가 그런 극악한 계획이 실행되는 것을 방지했을 가능성이 컸다고 전해주었다. 고르바초프는 군대 예산도 삭감했다. 당시 경제 상황으로는 모든 가게가 물건들이 하나도 없이 텅텅 비었고, 비행기는커녕 자동차를 운전할 휘발유조차 살 수 없었다. 루블화의 가치도 폭락했고 일반 생활 수준이 매주 눈에 띄게 급격히 떨어졌다. 그러므로 무기 구매조차 불가능했으며 군인 월급도 지급 못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에스토니아 KGB(비밀경찰 및 첩보조직)는 비교적 극단적인 단체가 아니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일에 앞장서던 정보 기관이었다. 발트의 길과 관련된 사람들의 도청 등 명목상 감시활동을 하긴 했으나, 이들을 정치범 명목으로 체포하거나 직접적인 방해는 하지 않았다.
도리어 에스토니아 KGB는 탈린에서 1989년 6월부터 사람들이 모여서 합창을 하며 독립에의 의지를 천명하던 '노래하는 혁명'에 대해서 모스크바에 보고할 때는 '이미 발트의 독립을 저지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고 보고했다고 한다.
당시 내무부 장관도 인민전선 계획을 후원해 주었다. 모든 사거리마다 경찰들을 배치해 주기로 하였다. 외지에서 와서 길을 모르는 기사들에게 방향을 알려주었다. 교통체증이 발생하는 지역을 파악해서 우회할 수 있도록 무전기도 제공됐다. 마치 내비게이션처럼, 빠르고 편하게 갈 수 있는 거리와 방향도 알려주었다. 교통경찰만으로는 부족한지, 탈린 현지 주민도 교통통제를 거들곤 했다. 안전요원 사이에서 네트워크를 도와주는 특별버스가 다니기도 했다.
정보기관 불려 다니던 그... 첩보요원이 건넨 뜻밖의 말
발트3국 모두 현지 라디오 생방송 주파수를 사용하여 실시간 현장 소식을 공유하기로 하였다. 각 라디오 스튜디오마다 지부장이 근무하며 각 지역으로 전화를 받아 추가 배치가 필요한 지역을 실시간으로 알려 사람 수를 균일하게 배치하고자 하였다.
1980년대 말까지 KGB는 실질적으로 에스토니아의 모든 인구를 통제했다. 예술가에 대한 검열이 특히 심했다. 예술연맹비서관으로 근무하던 발크 씨는 KGB로 갑자기 불려 다니기를 밥 먹듯이 했다.
발트의 길이 끝난 다음 날이었다. 그는 탈린 구시가지에서 KGB 요원을 마주치게 됐다. 그 요원이 발크를 보자마자 갑자기 자기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발트 씨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리라 생각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반대였다. 그 요원은 다가와서는 어깨를 두드리며 '어제 행사(발트의 길)를 조직해줘 감사하다'라고 말했다고 했다. KGB도 이미 마음속으로는 인민전선과 그들의 펼치는 독립운동을 응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에스토니아 관할 KGB 안에는 에스토니아어를 구사하는 현지 출신 요원들이 필요했다. 이에 기반해 추정해볼 때, 에스토니아 출신 요원들 사이에도 내부 저항이 발생하고 있던 것은아니었을까. 이렇듯 아이러니하게도 KGB의 묵인과 일부의 내부 저항이, 당시 발트의 길 행사가 성공적으로 조직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모든 분야에서 계획처럼 당국과의 협조가 원활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다음 기사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