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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라디오 '김경래의 최강시사'
KBS 라디오 '김경래의 최강시사' ⓒ KBS
 
"말이 모호해지면 시험을 보면 돼요. 박정희 대통령 파묘해야 됩니까?"

지난 17일 이준석 전 미래통합당 최고위원이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 김남국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향해 던진 비아냥 섞인 질문이다. 고 백선엽 장군의 국립 현충원 안장에 대한 반대 여론이 친일파 파묘 논쟁으로 비화하자, 이 위원이 김 의원을 몰아세우기 위해 일격을 가한 것이다. 김 의원은 "저보고 대답하라고요?"라고 묻고는 "이미 공적 기준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거기에 따라서 하면 된다"고 피해갔다.

김 의원은 그 순간 왜 멈칫했을까. 이 위원의 질문 요지는, 백선엽과 박정희는 둘 다 만주군 위관급 장교로 근무했는데 왜 백선엽만 문제 삼느냐는 거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친일파라는 인정이 야당 정치인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는데도, 친일 청산의 대의를 언급한 여당 의원이 움츠러드는 모양새였다.

지난 광복절 직후 김원웅 광복회장의 기념사를 두고 여론이 들끓었다. 해방 후 이승만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폭력적으로 해체시켰고 친일파와 결탁해 정권을 잡았다는 주장과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를 거론하며 민족반역자가 만든 노래를 국가(國歌)로 정한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는 발언이 도마 위에 올랐다. 알다시피, 위 두 내용은 가감 없는 역사적 '팩트'다.

친일 청산 말만 나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통합당과 보수언론 등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공식 석상에서 이승만 이름 뒤에 대통령이라는 직함을 붙이지 않았다는 등의 질타가 쏟아졌고, 수십 년 동안 불러온 애국가를 버려야 하느냐며 발끈했다. 전가의 보도처럼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망언이라는 이야기까지 서슴없이 나왔다.

정통성 운운하는 걸 보면, 그들에게 대한민국의 시작은 1948년, 곧 이승만으로부터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를 우리 역사로 편입시키는 순간, 정권을 잡기 위해 친일파와 결탁한 이승만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이승만 스스로 1948년을 임시정부가 출범한 1919년을 원년으로 삼아 '대한민국 30년'으로 명시했는데도, 그의 후예들이 대놓고 부정하는 꼴이다.

정부 수립 직후 애국가가 공식 국가로 지정되었다. 작곡가 안익태는 한국을 떠난 지 25년 만에 이승만의 80살 생일 축하곡을 연주하기 위해 초청되었다. 그는 1940년대 일왕 즉위 축하곡을 연주하고,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하는 '만주 환상곡'을 작곡하며 명성을 얻었다. 공교롭게도, 이승만과 그는 각각 미국 하와이와 스페인 마요르카에서 같은 해(1965년)에 죽었다.

친일 청산 실패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이승만과 나치 독일에도 부역한 친일파 안익태를 두둔하고 기리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을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똑똑히 보고 있다. 과거에 집착하기보다 미래를 향해 가자는 그럴듯한 언사는, 친일이 그들의 '원죄'임을 증명할 따름이다. 이승만과 안익태가 그들의 '뿌리'라는 고백에 불과하다.

친일 청산에 대한 국민적 여망

그동안 찬반 사이에서 방황하던 여론도 더 이상 그들의 편은 아닌 듯하다. '국부'는커녕 초대 대통령이라는 위상도 예전만 못하고, 아이들조차 이승만 하면 6·25 전쟁 중 한강철교 폭파와 부정선거 등을 먼저 떠올린다. 또 이번 일로 안익태의 노골적인 친일 행적이 알려지면서 최근 여러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애국가를 교체하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가 독일과 일본 제국주의에 적극 협력했다는 사실을 아이들이 알게 된 건 또 다른 수확이다. 이승만은 교과서에 숱하게 등장하지만, 안익태에 대한 언급은 달랑 한 줄에 불과하다. 더욱이 대부분의 검·인정 교과서에서 그를 일제강점기 활동한 위대한 음악가로 소개하고 있다. 친일 행적과 관련된 내용은 단 한 마디도 없다.
 
"세계적인 반열에 오른 지휘자 안익태는 애국가를 작곡하였는데, 이는 코리아 환상곡에 들어 있는 합창곡이다." (비상교육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328쪽)

때마침 백선엽의 사망은 국립 현충원에 수많은 친일파들이 버젓이 묻혀 있다는 공공연한 비밀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와 그들을 토벌하던 친일파의 묘가 나란히 있다는 건 적이 황당하다. 일례로, 백선엽이 묻힌 국립 대전 현충원엔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과 아들 김인이 안장되어 있다. 또한 김구 암살의 배후로 지목된 친일파 김창룡도 함께 묻혀 있다.

친일 청산에 대한 국민적 여망 앞에 내로라하는 명망가인 이승만과 안익태, 백선엽도 '방패막이'가 돼주지 못하는 형국이다. 역사교육의 무게중심도 전근대사에서 근현대사로 옮겨가고 있어, 친일 청산 문제는 미래에도 현재진행형이 될 공산이 크다. 참고로, 2015 개정 교육과정에 의하면, 한국사 교과서의 총 4개의 대단원 중 3개가 개항 이후의 역사를 담고 있다.

그중 한 개의 대단원은 오로지 일제강점기 35년만 다루고 있다. 이전 교과서에 비해 다양한 주제를 담았고 시의성 있는 자료에다 내용 또한 훨씬 더 상세하다. 장담하건대, 장차 우리 사회의 근현대사에 대한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한국사 교사로서 개정된 교과서를 보고 마음 설레기는 처음이다.

여전히 넘어야 할 산
 
 경북 구미 상모동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앞에 세워진 높이 5미터짜리 박정희 동상.
경북 구미 상모동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앞에 세워진 높이 5미터짜리 박정희 동상. ⓒ 권우성
 
그렇다면,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난 지 75년이 넘도록 해결되지 못한 친일 청산은 과연 시간의 문제일까?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답하지는 못하겠다. 우리에겐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 남았다. 우리 사회에서 이승만과 안익태, 백선엽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거물'인 박정희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친일 청산의 완수를 결코 말할 수 없다.

한때 그는 '반신반인(半神半人)'으로 추앙되기까지 했다. 지금도 그의 고향 생가에는 참배객이 이어지고 그 옆에 세워진 육중한 동상 앞에서 매일 그를 향해 제례를 올리는 이도 있다고 한다. 그가 태어난 11월 14일에는 해마다 지역의 정치인들이 대거 참석하는 대규모의 '탄신제'가 열리는데 적지 않은 예산이 투입된다.

그의 이름 앞에 친일파라는 딱지는 거추장스러운 수식어일 뿐이다. 붙여도 그만, 떼도 그만이라는 이야기다. 그가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자원해서 혈서를 썼다는 사실과 당시 독립군을 토벌하던 만주군의 장교 경력을 모르는 이가 거의 없지만, 적어도 박정희에게만큼은 큰 결격사유가 아니다. 오히려 뭐가 문제냐는 식이다.

그의 정치 이력에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던 좌익 활동 혐의도 말끔하게 세탁되었다. 5·16 군사 정변으로 권력을 찬탈하면서 맨 먼저 내세운 국시(國是)가 '반공'이었고, 미국의 요청으로 베트남 전쟁에 파병하면서 내세운 명분도 공산주의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도 반공을 위한 한미일 집단안보체제의 구축에 방점이 있었다.

반공법을 내세워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하는 한편, 통일 운동과 노동 운동, 학원 민주화 운동을 철저히 탄압했다.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언론을 비롯한 비판 세력의 입에 재갈을 물렸고, 편법 개헌과 유신을 통해 영구 집권을 획책하였다. 야당 정치인의 득세와 시민들의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 고문과 사법 살인도 서슴지 않았다. 그때마다 반공법은 전가의 보도였다.

아이들에게 박정희의 '연관 검색어'는 5·16 군사 정변, 베트남 전쟁, 유신 독재, 10·26 사태 등이다. 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경우라면, 굴욕 외교와 7·4 남북공동성명, 긴급 조치, 인혁당 사건, 전태일 등을 덧붙이기도 한다. 하나같이 박정희를 부정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사건들이고 이름들이다. 모르긴 해도, 기성세대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망각에 맞선 기억의 투쟁

그런데도 박정희를 비판하는데 젊은 국회의원조차 움찔거리는 이유는 뭘까. 역대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 중 노무현 전 대통령과 1~2위를 다툰다는 숱한 여론 조사 결과가 나오는 마당이니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하기에, 이준석 통합당 전 최고위원이 김남국 민주당 의원을 향해 '자신 있으면 건드려 보라'고 내지른 것 아닐까.

우리 국민 뇌리에 박정희는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고도성장을 이룩했고, '새마을 운동'으로 농어촌의 생활 환경을 개선하고 소득을 증대시킨 '서민적인 경제 대통령'으로 각인되어 있다. 요원해진 친일 청산과 한일 청구권 문제, 민주주의의 후퇴와 정경유착, 경제적 양극화, 부동산 투기, 연고주의와 군사 문화 등 그로 인해 파생된 부작용은 곁가지로 치부됐다.

경제만 호황이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 '전통'은 그로부터 시작됐다. 당대의 경제 상황이 정권의 정통성을 판별하는 유일한 기준이 된 것이다. 5·18 광주 학살로 권좌에 오른 전두환이 이른바 '3저 호황'에 힘입어 경제 성장을 이루자 '호시절'을 들먹이며 역사적 죄과를 덮으려는 것도, 이명박이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 카피와 함께 대통령에 당선된 것도 박정희의 유산이다.

이 와중에 먹고 살기도 힘든데, 해묵은 친일 청산 논쟁을 벌일 만큼 한가하지 않다는 볼멘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경제가 어렵다는 보수언론의 호들갑에 과거사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이 발목 잡힌 게 어디 한두 번인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친일 청산의 좌절로 대다수 국민의 삶이 피폐해졌다는 걸 역사가들이 증명해야 한다. 이게 친일 청산의 요체라고 생각한다.

친일 청산 문제는 여론이 추이나 정치 공학으로 접근해서는 곤란하다. 모든 역사가 그렇듯, 망각에 맞선 기억의 투쟁이며 거짓과 어둠을 몰아낼 진실과 빛을 찾아가는 노정이다. 어느덧 입에 재갈을 물린 채 75년이 흘렀다. 세월의 더께는 진실을 시나브로 흐릿하게 만드는 법이다. 이제 사반세기 후면 100년이다. 그때도 지금처럼 친일 청산을 구걸할 텐가.

시인 김수영은 박정희에 맞서 언론 자유를 갈구하며 이렇게 적었다.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 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다'고. 나는 이렇게 단언한다. '박정희 파묘! 친일 청산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다'고. 백선엽이 국립 현충원에 안장될 수 없다면 박정희도 마찬가지다. 요컨대, 이준석 전 최고위원의 질문에 김남국 의원은 이렇게 답해야 했다.

#광복회장 기념사#친일파 파묘#이준석#김남국#김경래의 최강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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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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