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폭력·성폭력 문제는 그 심각성에 비해 우리 사회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2019년 심석희 선수의 성폭력 피해 폭로, 올해 최숙현 선수의 죽음을 거치며 스포츠 폭력·성폭력 문제가 우리 사회의 화두로 떠올랐다. <오마이뉴스>는 최근 20년 동안의 스포츠 폭력·성폭력 판결문 163건을 입수해 분석했다. 판결문에 담긴 사건의 심각성·특수성, 법관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른 양형사유 등을 여러 차례에 걸쳐 보도한다. 이 기사는 그 세번째다.[편집자말] |
[사건 ①] 중년의 남성이 피해 학생 A(당시 17세)의 머리와 배를 발로 수회 걷어찼다. 약 30분간 엎드려뻗쳐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A가 옆으로 쓰러졌다. A는 그 이후로도 20여 분 동안 엎드려뻗쳐 자세를 더 유지해야 했다. A가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꼬았다. 이렇게 A의 자세가 흐트러질 때면, 머리와 배를 걷어차는 가해자의 폭행도 반복됐다.
이날 구타를 당한 피해자 A는 뇌 손상을 입고 의식 불명에 빠졌다. 피해자를 불구 상태로 만든 가해자는 서울에 위치한 고등학교의 핸드볼팀 코치였다.
2017년 2월 25일 발생한 위 사건 현장에는 중상을 입은 A씨 외에도 5명의 피해 학생들이 더 있었다. 이들도 마찬가지로 머리와 배 부위를 수회 걷어차였다. 하지만 상해 정도는 A씨에 비해 적었다. 위 사건의 1심 판결문에 적시된 가해자의 폭행 사유는 짧았다. 피해 학생들이 본인 험담을 한 것에 화가 났다는 것, 그뿐이었다.
코치의 폭력이 우발적 범행?
가해자는 1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받았다. 위 재판을 맡았던 서울북부지방법원 1심 재판부(재판장 박남천)는 피해자 A의 피해 정도가 중하다면서도 "피고인이 다소 우발적으로 이 사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전까지 핸드볼팀 소속 학생들에게 이와 같은 체벌을 가한 사실이 없다는 이유였다. 이밖에 피고인이 피해자 A의 치료비 일부를 부담한 것, 피해자 A를 제외한 나머지 피해자들이 가해자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 점 등도 고려됐다.
위 사건은 2심(항소심)에서 형량이 추가돼 징역 3년 6개월이 선고됐다. 서울고등법원 2심 재판부(재판장 김대웅)는 "피해자 A의 가족들은 (이 사건으로) 상당한 정신적 고통을 받고 있음에도 당심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피해 회복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면서 "가해자에 대한 적절한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고 했다. 1심 판결을 두고서는 "너무 가벼워서 부당하다"고 비판했다.
언급된 판결은 <오마이뉴스>가 한국여성정책연구원(아래 연구원)의 스포츠 성폭력·폭력 판례 분석 보고서를 바탕으로 입수한 163건의 스포츠계 판결문 가운데, 폭력으로 기소된 43건 중 하나다. 연구원 측은 해당 보고서에서 "스포츠 분야에서 폭력이 발생할 경우, 피해자에게 심각한 신체적 중상해의 결과를 가져온다. (중략) 선수 생명이 끝나는 피해도 초래한다"고 했다. 신체와 직업이 밀접하게 연관된 체육계 특성상 더더욱 폭력이 용인되어선 안된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눈에 띄는 것은 43건의 폭력 기소 판결문 가운데 41건이 지도자에 의한 폭행이었다는 점이다. 보고서는 "선수들이 코치와의 관계가 좋지 못하면 진로 등에 불이익을 입게 될까 걱정해 (폭력을) 훈련과정으로 수인하기도 한다"면서 "단순한 폭행 타박상을 넘어 (중략) 상해나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처럼 중대 상해로 이어질 가능성 높은 스포츠계 내부 폭행이 정작 법정에서는 '훈육'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예컨대 나무몽둥이로 엉덩이를 수회 내려친 교육자의 행위를 두고 '심하지 않은 체벌은 효과적 교육 방법 중 하나'라고 판단했다. 아래는 관련 사건에 대한 피해사실 일부다.
나무 몽둥이는 위험한 물건일까 아닐까
[사건 ②] 고등학교 태권도부 감독인 가해자는 이른바 '정신봉'이라 불리는 길이 약 50~60cm의 나무 몽둥이를 항상 휴대하고 다녔다. 2013년 4월 14일 사건 발생 당일도 마찬가지였다. 가해자는 피해 학생 A가 운동 시간에 지각했다는 이유로 그를 엎드리게 한 뒤, 엉덩이 부위를 약 20여 회 내리쳤다. 피해자는 치료 일수를 알 수 없는 타박상을 입었다.
가해자는 전과자였다. 과거 상해(남의 몸에 상처를 내는 행위) 등으로 벌금 2회 및 집행유예 1회 범죄 전력이 있었다. 가해자는 이번 사건에서 폭행 외에도 본인 학생의 성기를 만지거나, 성적인 언동을 가한 성추행 혐의도 받았다. 이러한 가해자에게 법원이 내린 최종 판결은 집행유예였다.
1심과 2심 모두 성추행에 대해서는 동일한 유죄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폭행에 대한 인식은 달랐다. 당시 1심이었던 인천지방법원 1심 재판부(재판장 김선희)는 가해자의 폭행 행위를 두고 "피고인은 나무 몽둥이로 피해자에게 심각한 손상을 줄 수 있는 신체 부위가 아닌 엉덩이 부위를 때렸다"며 아래와 같이 판단했다.
"정도가 심하지 않는 체벌은 대상 학생에게 학습의 효과를 높여주고, 질서가 유지된 상태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다른 학생들의 학습권을 보호할 가능성이 있다. 교사는 체벌을 효과적인 교육 방법의 하나로 여길 소지가 있다... 체벌 도구인 나무 몽둥이가 '위험한 물건'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
1심 재판부는 가해자가 이 사건 전까지 고등학교 태권도부 발전을 위해 노력해온 점도 유리한 정상으로 고려했다. 사건 발생 이후 태권도부가 해체되고, 가해자가 사직서를 낸 것도 양형사유에 포함됐다. 1심은 가해자에게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2심(항소심)이었던 인천지방법원 2심 재판부(재판장 김도현)는 이러한 판단을 엎고 가해자의 행위를 "폭행"으로 간주했다. 2심 재판부는 "피고인이 사용한 나무 몽둥이는 그 길이와 사용빈도, 횟수 등에 비추어 봤을 때 피해자를 비롯한 고등학교 학생들이 상해 위험을 느꼈을 것으로 본다"면서 "증거 사진에 나타난 피해자 상처 정도를 보면 실제로 상해를 입은 것으로 보기에 충분하다"고 판시했다.
하지만 2심에서도 집행유예 선고는 유지됐다.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 형이 나왔다. 이후 대법원은 "항소심이 (나무 몽둥이를) 위험한 물건이라고 판단한 것에 법리를 오해한 게 없다"면서 판결을 확정했다.
또한 체육 지도 과정에서 벌어진 성추행도 '지도하는 과정에서 이뤄진 것'으로 판단한 사례도 있었다. 쇼트트랙 실업팀 감독이 훈련을 지도하던 도중 엉덩이와 허벅지, 골반 등을 만지거나 뒤에서 껴안는 등 여러 차례 추행을 한 사건이었는데, 당시 해당 사건의 항소심을 맡았던 서울고등법원 2심 재판부(재판장 이광만)는 "일부 범행의 경우 피고인이 훈련 중 자세교정 등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이뤄졌다"고 판단했다.
'운동선수는 버텨야 한다'라는 잘못된 프레임
테니스 코치 김은희씨는 <오마이뉴스>와의 만나 "일반 폭행 사건과 체육계 폭행 사건에 대한 민감도 차이가 너무 크다"고 지적했다. 김씨는 초등학생 때 당했던 코치의 성폭행을 폭로하고 죗값을 받도록 했다. 그는 '체육계 미투 1호'로도 불린다. 그의 말이다.
"똑같은 야구 방망이라 하더라도, 어느 누가 맞았느냐에 따라 사건 정도가 달라진다. 폭행사건은 살인 미수까지도 가는데, 정작 비슷한 사건이 체육계에서 일어나면 '그 정도는 넘어가야 하는 거 아니냐'는 식이다. 손발로 맞는 건 마사지하는 수준이고, 물건 정도를 들고 때려야 폭행의 기준에 포함된다."
이런 문제가 내부 폭력·성폭력 문제를 고발하기 어렵게 만든다고도 했다. 그는 "스포츠인이라는 프레임 탓에 대부분 운동선수들이 '이 정도는 버텨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이런 생각을 체육계 기관 종사자들마저 하고 있다는 게 문제"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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