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사회학자 대니얼 벨(Daniel Bell)은 1960년 자신의 저서 '이데올로기의 종언'에서 미래에는 이데올로기의 중요성이 사라진다고 내다봤다. 그의 주장대로 마르크스주의는 1990년대 공산주의 국가들의 몰락과 함께 종언을 고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는 여전히 살아 있다.
많은 사람들이 보수와 진보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사용하고 있듯이 지식인들조차 공산주의 반대가 자유주의나 민주주의로 알고 혼동하고 있어 이같은 언어의 개념부터 명확히 정립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공산주의 반대말은 자본주의다. 나아가 '사회주의↔자유주의', '독재주의↔민주주의', '사회주의독재↔자유민주주의' 이렇게 상반되는 용어로 이해하면 된다.
지구상에 독재와 사회주의는 사라지고 자유민주주의가 계속 빛을 발하고 있는데 한반도는 언제까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서 '이데올로기의 섬'으로 남아있을까? 대한민국 국기인 태극기의 태극은 음과 양, 둘로 나누어져 음양이 서로 커지고 작아지는 것을 무한히 반복하는 의미로 해석하는 동양철학이 남북분단의 이념적 대치를 지속 시켜 주는 것인가? 그것도 남북(태극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음)이 미국·러시아·중국·일본 4대 강대국(태극기 4괘로 볼 수 있음)에 둘러싸여 냉전의 싸움터로 말이다.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정치철학'을 내놓은 이진우(포항공대 석좌교수) 철학박사의 입장을 들어보자.
이진우 교수는 "탈(脫)이데올로기 시대에 여전히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 같은 냉전적·대립적 시각으로 현실을 본다면 변화의 현실과 의미가 제대로 파악될 수 있겠는가? 세계화는 우리의 현실인데도 여전히 식민주의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과연 미래의 방향을 올바로 설정할 수 있겠는가? 정당 간 이념적 간격, 그리고 지지층이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는데도 기존 집단과의 이해관계에 묻혀 편 가르기를 일삼는다면 정부 정책에 대한 자발적 참여가 과연 가능하겠는가"라고 반문한다.
요컨대 대니얼 벨 교수의 '이데올로기 종언'과 이진우 교수 '탈이데올로기론'에도 불구하고 남북한은 물론 남한조차 '좌빨'(좌파 빨갱이), '우꼴'(우파 꼴통)하면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방위적 생활 속에서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남한도 이념적으로 통일되지 않는데 어떻게 정상적인 남북통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
종교적 이념과 이데올로기는 구분해야
이제는 소모적 이념논쟁에서 완전히 벗어나 그야말로 우리는 '내 편' '네 편'이라는 이분적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이기심을 버리고 인류의 보편적 사랑으로 하나로 만나야 한다. 인류의 시작과 마지막까지 문제가 되는 종교의 가르침도 결국 인간과 신(神)에 대한 '사랑'이다. 불교의 대자대비(大慈大悲), 기독교의 십자가 사랑과 구원, 유교 덕목인 경천애인(敬天愛人)도 하늘을 경외(敬畏; 공경하면서 두려워함)하고 인간(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들 모두의 교훈은 "서로 사랑하라"로 집약된다. 경천애인(敬天愛人)이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敬天),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愛人)하라는 예수 그리스도 율법의 대강령과 상통한다. 넓고 커서 끝이 없는 부처의 자비, 대자대비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도 인간은 서로 사랑하기는커녕 왜 종교전쟁을 벌이며 서로 죽이는 극단적 자기모순에 빠져왔는가? 이는 으뜸(宗)이 되는 가르침(敎), 즉 종교적 이념과 이상을 실천하기보다는 이같은 신앙과 신념을 자신들이 유리한 대로 이데올로기화(化)해 이기적 욕망에 사로잡힌 결과로 보인다.
당파싸움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 "식민사관"
조선 시대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던 배불숭유(排佛崇儒) 정책도 첫 출발은 순수했다. 조선이란 왕조에 유학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한 정도전은 요순시대처럼 임금과 신하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왕도(王道) 정치를 전면적으로 표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 중기와 후기, 사림(士林)들이 붕당(朋黨)을 지어 서로 정권을 잡으려고 싸우면서 계속된 당파싸움이 동인(東人)·서인(西人), 남인(南人)·북인(北人), 노론(老論)·소론(少論) 등 사색(四色)으로 갈라졌다.
물론 동전에 양면이 있듯이 조선시대 '사색당쟁'(四色黨爭)의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다. 역기능은 관료와 지식인들이 대를 물려가면서 대립하는 양상으로 결국 나라를 망국으로 몰고 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극작가 신봉승은 '조선 정치의 꽃, 정쟁' 저서를 통해 "조선에 대한 식민사관이 당파싸움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는 인식을 확산시켜 많은 사람이 비판 없이 받아들이게 했다"고 지적했다.
신 작가는 "일본은 조선 침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은 망할 수밖에 없다는 불가피성을 역설할 필요가 있었고, 아울러 열등하다는 인식을 심어놓아야 했기에 조선왕조는 이씨 성을 가진 부족국가에 불과하다는 의미에서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이 엄연히 있음에도 조선을 '이씨 조선'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필자는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망한 것이 아니라 마치 당파싸움 때문에 망했다는 식민사관을 정당화한 국내 역사학자와 지식인들에게 그 책임을 묻고 싶다.
당쟁의 순기능에 대해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한국인의 당파싸움 체질은 한국 사회의 다양성 존중을 반영하는 동시에 다양성 진작에도 크게 기여했다. 물론 다양성을 나쁘게 말하면 분열주의지만, 분열하지 않고 어떻게 다양해질 수 있겠는가. 한국만큼 다양한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나라는 이 지구상에 거의 없다"고 주장했다.
조선은 세계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500년이나 지속된 나라다. 이는 오히려 사색당파와 같은 견제와 균형 시스템이 작동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은 현대 정치판에도 적용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나라든 당파와 당쟁은 있게 마련이다.
21대 국회, 말로는 '협치' 외치지만...
대한민국 정치판을 보더라도 더불어민주당과 미래통합당 양당 중심으로 당론과 이해관계를 앞세우며 치열하게 싸운다. 조선 시대 기호학파(畿湖學派)는 이번 21대 총선 결과 경기(수도권)와 호남에서 거의 싹쓸이한 민주당이, 기호학파와 쌍벽을 이룬 영남학파는 대구·경북에서 싹쓸이한 통합당이 그 명맥을 각각 이어가고 있다고 하면 해묵은 '지역주의 프레임'에 갇히는 논리일까?
문제는 국민이 뽑아준 국회의원들이 모여 이룬 정당 간 싸움이 '당쟁'(黨爭)이든 '정쟁'(政爭)이든 정치는 '협치'(協治)가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한다. 즉, 협치를 도외시하는 정치는 정당과 현 정부의 소모적 독재에 불과할 뿐 아니라 국민은 애당초 거기에 없다. 협치가 무엇인가? "힘을 합쳐 잘 다스려 나가는 것"이다. 무언가를 결정하기에 앞서 '협의'와 '공감대'부터 조성하는 것이다. 여당과 야당이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협력해 중요 현안들을 처리하는 정치를 말한다. 그러나 21대 국회는 어떠한가? 말하지 않아도 국민이 더 잘 알기 때문에 여기서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다.
다시는 그와 같은 국회의원을 선출해서는 안 된다고 해놓고 이번에 다시 그러한 정치꾼을 뽑은 국민에게 책임을 다시 돌리는 것도 무의미한 짓이다. 아직까지 영호남 지역주의와 민주당-통합당, '빨갱이'-'파랭이' 같은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민초(民草)는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김수영 시인의 '풀'(시 제목)이 아니던가!
강준만 교수는 "그런 삶의 구조하에선 남 잘되는 꼴을 죽어도 못 보는 사람들이 많다. 배가 아프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자신도 죽으라 하고 노력해야 한다. 한국인은 그렇게 해왔다. 그래서 성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삶은 더할 나위 없이 피곤하고 만족은 영원한 신기루가 되고 만다. 한국인의 행복지수가 매우 낮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당파싸움, 적당히 하면 좋겠다"고 피력했다.
우리가 쓰는 '빨갱이'와 '파랭이'라는 말의 의미를 따지고 들어가면 양파 껍질 같은 것이다. 확실한 것은 빨갱이가 아니어도 총 맞으면 붉은 피가 나오는 법이다. 대한민국 태극기 태극 윗부분이 빨강이고, 아랫부분은 파랑이다. 태극의 위 빨강을 '북한의 좌빨'을, 아래 파랑을 '남한의 자유'로 각각 상징한다고 하면 견강부회(牽强附會)일까?
좌파와 우파의 기원
좌파와 우파의 기원은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혁명 과정에서 소집된 국민의회는 의장석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왕당파를, 왼쪽에 공화파의 자리를 각각 배치했다.
공화파가 왕당파를 타도한 뒤 구성한 1792년의 국민공회에서는 오른쪽에 온건 개혁 세력인 '지롱드'가, 왼쪽에 급진 개혁 세력인 '자코뱅'이 앉았다. 이후 우파는 대체로 온건한 개혁 세력을, 좌파는 급진적인 개혁 세력을 지칭하는 말로 통용돼 왔다. 반면 이들이 앉아 있는 자리를 기준으로 보면 좌우가 반대가 되니 좌파와 우파는 보는 시각에 따라 180도 달라지는 상대적 개념이다.
역사학자 전우용은 "시민혁명 시대에 뒤이어 계급혁명 시대가 도래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주창하며 좌파를 자처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 내부에도 좌파와 우파가 있으며, 부르주아 진영도 좌파와 우파로 갈린다고 보았다. 좌파와 우파는 이념이나 계급이 아니라 태도와 관련된 개념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를테면 어제의 여당이 오늘의 야당이 되고 오늘의 야당이 내일의 여당이 될 수 있다. 나아가 어제의 진보는 오늘의 보수가 되고 오늘의 보수는 내일의 진보가 될 수 있다. 시대에 따라 보수와 진보는 왔다갔다하고 나라(장소)에 따라 진보와 보수는 다르다. 우리가 보기에 보수 성향이 강한 나라에서 진보는 진보 성향이 강한 나라에서는 보수로 보일 수 있다.
이렇듯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는 시대와 장소(국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상대적 이념으로 받아들여야지 이를 절대화하는 순간부터 이데올로기와 흑백논리에 사로잡히게 된다.
더불어민주당-국민의힘 공통 강령 '국민이 행복한 대한민국'
흔히들 여당은 보수적이고 야당은 진보적이라고 한다. 진보적 성향을 보인 더불어민주당이 여당이 되었으니 이제 민주당이 지키고 보호하려고 한다. 반면 여당에서 야당이 된 국민의힘(구 미래통합당)은 여당 시절과는 달리 여당인 민주당에 대해 반박하는 형국이다.
여야(與野)는 물론 우파와 좌파, 보수와 진보는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굳어진 나머지 유리할 때는 자기들의 신성한 이념을 앞세우고, 불리할 때에는 무조건 상대를 공격하고 상대가 잘되는 꼴은 죽어도 못 보는 이른바 '편 가르기 사이비 진영론자'에 빠져있다.
남아프리카 반투어에 "네가 있어 내가 있다"라는 의미를 지닌 '우분투'라는 단어가 있다. 야가 있기에 여가 있고 야당이 있어 여당이 있다. 與黨(여당)의 與는 한자로 '더불어여, 줄여'자이다. 현재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이름에도 '더불어'가 있다. 근데 이름만 '더불어민주당'이지 베풀어주는 '與'는 아님이 이번 21대 국회 전반기 상임위원장의 독단적 결정 등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야당인 국민의힘도 "21대 국회에서 숨 쉴 수 없다"며 여당의 결정에 무조건 반대할 것이 아니라, 어렵겠지만 대한민국 미래와 국민 대통합을 위해 국회에서 자유민주주의 이념 실현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우리(더불어민주당)는 '공정·정의, 안전, 포용·통합, 번영, 평화'를 시대 가치로 삼고, 서민과 중산층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들 것이다"라는 게 민주당 정강(政綱) 도입부다.
"국민의힘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통해 발전해온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계승 발전시킨다. 대한민국을 명실상부한 세계 선진 국가로 만들고, 국민 각자의 행복을 높이는 데 우리 당의 역사적 임무가 있다"라는 건 국민의힘 정강 도입부다.
개인의 자유를 지키고(보수) 중시하는 통합당 정강과 사회적 평등으로 나아가는(진보) 민주당 정강의 첫 부분에 나타난 공통점은 하나같이 "모든 국민이 행복한 대한민국"이다. 무엇보다 보수와 진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처음도 끝도 '국민이 행복한 대한민국'이다. 혹자는 "대한민국 진보의 경우 깜빡이는 좌측(좌익진보)으로 넣고 실제로 차는 우측(우익보수)으로 몰았다"고 주장한다.
한국 정치와 진보·보수층 이념대립이 이렇게 가다가는 결국 교통사고로 차량은 물론 운전자와 국민이 민주당·통합당의 정강 이념인 '행복'을 누리기는커녕 다치거나 죽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