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전날 마트에서 장을 보는 동안 2020년은 참 잔인한 해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재난으로 일자리와 학교, 식당, 카페 같은 일상의 공간이 멈추더니, 이젠 삶의 기본 요소인 먹거리의 영역마저 균열이 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만 해도 3만 원에 살 수 있던 선물용 사과가 올해는 5kg 한 상자에 4만7천 원이었다. 시금치는 채솟값 폭등으로 한 단에 5천 원이 넘지만 물건이 없어 살 수조차 없었다. '농산물 수급 부족으로 공급이 원활하지 못한 점을 양해해달라'는 진열대 안내문을 읽으며 우리의 밥상을 덮친 기후위기를 실감했다. 봄에 갑작스레 찾아온 냉해, 여름의 역대 최장 장마와 연속 태풍 같은 이상기후에 내 책임은 없을까.
코로나19의 여파로 아이가 자주 가던 동네 키즈카페가 폐업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로 집 앞 태권도장이 또 문을 닫았을 때도 그랬다. 찔리고, 쓰라리고, 계속 신경이 쓰였다. 벼랑 끝에 선 이웃의 삶 앞에서 나는 떳떳한가. 마스크를 열심히 쓰는 것만으로 내 할 일을 다했다며 넘어갈 수 있을까.
평범한 일상을 지키는 마음, 염치
책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는 바로 이러한 '찔림'과 '쓰라림'이야말로 앞으로의 시대를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가치라고 강조한다. 코로나19와 기후위기 한가운데서 느끼는 미안함, 안타까움, 부끄러움, 반성 등의 정서, 즉 '염치(廉恥)'야말로 무너져 내린 세계를 복원할 공동체적 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게 저자들의 결론이다.
<오마이뉴스>의 이주연 기자와 그가 속한 독립편집부 '이음'은 염치라는 감정을 사회적·역사적·심리적·일상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진단한 결과를 이 책에 담아냈다. 256쪽을 채운 자료와 서사들의 내용은 각기 다르지만 관통하는 메시지는 하나다.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인 염치가 결정적인 순간마다 사회와 공동체가 최악으로 치닫지 않도록 지켜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 사회를 지키는 질서의 바탕에 염치라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장소"로 지하철을 꼽았다. 사람을 밀치고 지나가면서도 사과 한번 하지 않거나, 스마트폰 카메라로 여성을 몰래 촬영하는 몰염치한 인간군상을 만나기도 하지만, 가끔의 불운을 제외하면 우리는 대체로 별다른 불편함 없이 열차 안에서 멍 때리거나 영상을 보거나 하다가 목적지에 닿는다. 그런 당연하고 평범한 상태는 폐를 끼치지 않으려 다리를 오므리고, 백팩을 앞으로 메며 주변을 헤아리는 다수의 마음 덕분인 셈이다.
코로나19 유행만 해도 방역수칙을 어긴 소수 때문에 확산세가 다시 치솟기도 했지만, 분명한 건 소수의 몰염치를 뛰어넘는 어떠한 양심과 공동체적 의식의 힘이 이 세계를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맞벌이하는 내가 본격적으로 국내 감염이 시작된 2월부터 지금까지 아이를 어린이집 긴급보육에 맡길 수 있었던 것도, 외국처럼 '봉쇄' 사태만큼은 겪지 않고 있는 것도, 매일 답답한 마스크를 견디고, 손을 열심히 씻고, 불필요한 외출을 자제하며 어떻게든 사회적 거리두기 3단계를 막으려는 시민들의 마음과 실천의 힘 때문이리라.
사전은 염치를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라고 정의한다. 더 나아가 사회적 정의는 '나와 세계가 연결돼 있음을 감각하는 것' 아닐까. 조금 불편해지더라도 누군가의 평범한 일상을 지켜주려는 마음과 노력, 그것이 내가 책을 읽으며 느낀 염치의 의미다.
그렇기에 우리 사회에 좀 더 넓고 단단한 염치가 작동한다면,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안전하게 공존할 방법을 찾을지도 모를 일이다. 전례 없는 기후위기를 발판 삼아 지구를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맞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세상을 원한다면 다른 선택을
어떻게 해야 나와 우리의 '사회적 염치'를 키울 수 있을까. 책에는 염치의 미덕을 보여준 백종원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잘 살펴보면 이들에겐 두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하나, 과감하게 방향을 틀었다. 그들은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 뒤, 앞만 보고 내달리려는 관성을 거슬러 핸들을 단숨에 꺾었다. 한류 톱스타인 아이유는 "지금 이상의 재산은 불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어린이와 사회적 소외계층을 위해 꾸준히 기부를 실천해오고 있다. "2015년부터 2020년 2월까지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을 통해 후원한 금액만 7억2000만 원"이고, 코로나19와 관련해 벌써 4억 넘게 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탄광기업 집안 아들인 채현국은 사람들의 목숨값과 불의와의 타협으로 떼돈을 벌어야 하는 잔인한 기업세계에서 벗어나고자, 박정희 정부 시절인 1973년 회사를 팔았다. "매각대금은 탄광사고 피해자에게, 광부들에게" 배분했다. '금수저'에서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됐지만 그는 자신이 선택한 삶을 올곧게 이어오고 있다.
다른 세상을 원한다면 지금과는 다른 선택을 하는 수밖에 없다. 코로나19 재확산을 막고 싶다면 답답해도 각 개인의 이동량을 최소화해야 한다. 기후위기를 유발하는 지구 평균 온도의 상승을 멈추고 싶다면 귀찮아도 텀블러를 쓰고, 고기를 덜 먹거나 안 먹고, 석탄에너지 소비를 줄일 방법을 함께 고민할 필요가 있다. 그 불편함을 견뎌내는 게 단순한 부끄러움과 사회적 염치를 가르는 기준 아닐까 싶다.
둘, 그들은 어제보다 나아지려 노력했다. 하루아침에 완벽한 이상까지 도달할 순 없다면,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상상하며 실천하면 된다고 믿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동물, 원>의 무대인 청주동물원에서는 멸종 위기에 놓인 야생동물들을 돌보지만, 그곳 구성원들은 늘 죄책감에 마음이 무거웠다.
드넓은 자연에서 살아가야 할 동물들에게 동물원 우리는 '감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당장 초원에 동물을 풀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청주동물원 사람들은 쉽게 무력해지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 안에서 뱅뱅 도는 표범을 위해 길(원형 통행로)를 내줬고, 나무 속에서 먹이를 빼먹는 습성을 가진 동물을 위해 대나무 속에 먹이를 줬으며, 높은 곳에 올라가는 걸 좋아하는 동물에게는 '캣 타워'를 만들어줬다. <동물, 원>에 나오는 청주동물원은 그런 곳이었다. 그 찔림, 그 미안함을 덜어내려는 행위가 실제 일어난 장소였다." - 100쪽
보름달에 빈 아이의 소원
심리학자 김태형은 궁극적으로 사회적 염치의 감도를 높이려면 국가의 염치부터 바로서야 한다고 봤다. 공동체를 지키고자 제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사람들이 각자도생으로 치닫는 이유 중 하나는 국가가 무자비한 돈의 세계로부터 공동체를 보호하지 못하는 데 있다고 진단했다. 돈이 없으면 생존 못 하고 무시당하니까 어떻게든 남을 짓밟으며 나부터 살려고 아등바등하게 된다는 문제의식이다.
따라서 염치를 지키고 살아도 손해당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정책으로 보여준다면, 공동체의 태도와 문화도 크게 변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특히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공존을 위해서라도 "기본 소득제처럼 모두에게 적용되는 정책을 고안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상대를 적이 아닌 협력의 대상으로 여기려면 상대를 도구화하지 않아도 안전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시 명절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렇게 험난한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와 다소 무거운 마음으로 '집콕'하는 추석을 맞이했다. 어디 나가지 않고 직접 만든 음식을 먹고 TV를 보고 책을 읽다가 밤에 잠시 보름달을 보러 집 앞으로 나갔다. 동그랗고 환한 달 아래서 각자 속으로 원하는 걸 비는 중에, 6살 아이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소원이 튀어나왔다.
"코로나가 얼른 사라져서 다시 키즈카페 가게 해주세요."
아이는 달을 보고 집에 오자마자 손을 닦았다. 그리고 돌아와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아이의 소원을 꼭 이뤄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 책이 염치를 향한 나의 긴 여정에 좋은 연료가 되어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