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0일 자정에 거행된 조선노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에서 북한 지도부는 심야 조명이 휘황찬란한 가운데서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전시하는 한편, 러브레터 같은 분위기를 담은 김정은 연설을 연출했다.
심야에 열병식을 연 것과 관련해 김정은 국무위원장 겸 노동당위원장은 "세인이 경탄할 이 화폭 자체가 우리를 괴롭히고 막아 나섰던 온갖 재앙들이 제압되고 우리가 내세웠던 정의로운 투쟁 목표들이 빛나게 달성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라고 연설했다. 재앙을 물리치고 목표를 빛나게 달성했음을 보여주고자 심야 열병식을 기획했음을 드러내는 발언이다.
자신감과 조심스러움
조선 헌종이 죽고 철종이 등극한 1849년에 홍석모가 쓴 <동국세시기>는 섣달그믐 밤에 민간의 외양간과 화장실까지 환히 켜놓고 불화살을 쏘아 올려 한밤중을 환하게 밝히는 이유와 관련해 "옛날 대나(大儺)를 열어 역질 귀신을 쫓던 제도의 흔적이며, 또한 섣달그믐 밤과 설날 아침에 폭죽을 터트려 귀신을 놀라게 하던 제도를 모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섣달그믐 밤의 나례(대나) 의식이 역병을 비롯한 각종 재앙을 쫒아내는 행사였다는 설명이다.
심야 연설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지금 이 행성에 가혹하고 장기적인 제재 때문에 모든 것이 부족한 속에서 비상 방역도 해야 하고 혹심한 자연피해도 복구해야 하는 엄청난 도전과 난관에 직면한 나라는 우리나라뿐입니다"라고 강조했다.
1950년 이래 경제제재를 지속적으로 가하는 '미국 귀신'에 더해, 금년 들어 전 세계를 위협하는 코로나 '역질 귀신'과의 싸움에 직면한 북한의 현실을 언급한 대목이다. 북한이 이런 위기에 잘 대응해서 '재앙을 억압하고 목표를 빛나게 달성했음'을 보여주고자 심야 열병식을 기획했다고 볼 수 있다.
현대판 심야 나례를 연출해 '귀신'을 막거나 쫓아냈다는 자신감을 드러내면서도, 북한 지도부는 대외관계와 관련해서는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김정은은 신형 ICBM을 과시한 열병식장에서 "우리 당은 우리 국가와 인민의 자주권과 생존권을 건드리거나 위협을 줄 수 있는 세력은 선제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군사적 능력을 제일 확실하고 튼튼한 국가 방위력으로 규정했으며 그를 실천할 수 있는 군사력 보유에 모든 것을 다해왔고 지금 이 순간에도 부단한 갱신 목표들을 점령해 나가고 있습니다"라며 자신감을 표출했지만, 바로 뒷부분에서 조심스러움을 드러냈다.
"나는 우리의 군사력이 그 누구를 겨냥하게 되는 것을 절대로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를 겨냥해서 우리의 전쟁 억제력을 키우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우리 스스로를 지키자고 키우는 것뿐입니다."
ICBM 전시를 통해 미국과 일본에 군사 역량을 보여주면서도, 이들과의 관계에서 돌발 변수가 나오지 않도록 막으려는 의중을 드러내는 표현일 수 있다. 미국 대통령선거의 윤곽이 아직 뚜렷하지 않은 지금, 일종의 현상유지책을 구사하면서 상황을 관찰하겠다는 의도를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북한이 현상변경을 단속하고 있다는 점은 김정은이 남북관계 악화를 막기 위한 발언을 했다는 점에서도 느낄 수 있다. 어업지도 공무원 피살 사건으로 남북관계가 예측불허 상황으로 확전될 가능성도 없지 않은 지금 단계에서 "사랑하는 남녘의 동포들에게도 따뜻한 이 마음을 정히 보내며, 하루빨리 이 보건 위기가 극복되고 북과 남이 다시 두 손을 마주잡는 날이 찾아오기를 기원합니다"라고 말했다. 남북관계·북미관계·북일관계에서 현상변경적 요소가 돌출하지 않기를 바라는 의중이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북한 인민 향해선 '러브레터'
이번 연설은 북한 지도부가 북한 대중의 현재 정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도 어느 정도 드러냈다. 이번 연설은 위기의 엄중함을 강조하는 동시에, 낙관적인 혹은 낭만적인 전망도 함께 반영했다. 이는 위기를 강조하는 대목과 함께, 러브레터를 연상케 하는 대목도 많았던 데서 느낄 수 있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에 멀리 떨어진 연인이나 존경하는 대상에게 편지 쓸 때 사용했던 표현들이 이번에 유독 많이 나타난 점에 주목할 만하다.
"온 나라의 마음이 뜨겁게 굽이치는 이처럼 벅차하고 환희로운 밤, 이 자리에 서고 보니 전체 인민에게 무슨 말씀부터 드렸으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당이 걸어온 영광 넘친 75년사를 갈피갈피 돌이켜보는 이 시각 오늘 이 자리에 서면 무슨 말부터 할까 많이 생각해 보았지만, 진정 우리 인민들에게 터놓고 싶은 마음 속 고백, 마음 속 진정은 '고맙습니다!' 이 한마디뿐입니다."
"이렇듯 강렬하고 진정 어린 믿음과 고무·격려는 나에게 있어서 그 어떤 명예와도 바꿀 수 없고 수억 만금에도 비길 수 없는 가장 소중한 재부이며 두려움과 불가능을 모르게 하는 무한대한 힘입니다."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인민을 매우 높이 떠받드는 표현들도 등장했다. "모두가 건강하신 모습을 뵈오니, '고맙습니다' 이 말밖에 할 말을 더 찾을 수 없습니다", "언제나 현명한 스승이 되어 지혜와 슬기를 주었고 무한한 힘과 용기를 안겨주었으며 결사적으로 옹위하고 성심으로 받들어주며 구상과 로선을 빛나는 현실로 만들어준 력사의 전능한 창조자인 위대한 우리 인민을 떠나서 어찌 우리 당의 영광 넘친 75년사에 대하여 한순간인들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표현들이 바로 그것이다.
겸손을 나타내는 표현들도 있었다. "제가 전체 인민의 신임 속에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위업을 받들어 이 나라를 이끄는 중책을 지니고 있지만, 아직 노력과 정성이 부족하여 우리 인민들이 생활상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위기를 강조하는 동시에 낙관적·낭만적 분위기를 동시에 연출한 것은, 지금의 북한 내부에 위기로 인한 고통과 극복 가능성에 대한 긍정적 전망이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대중의 정서 속에 낙관적 요소가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위와 같은 연설을 한다면, 듣는 대중이 생뚱맞거나 비현실적인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낙관적 전망이 상당부분 존재한다고 판단했기에, 위와 같은 연설문을 준비했으리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김정은 연설에서 풍기는 김일성 분위기
공개 연설을 통해 대중과 스킨십을 강화하는 김정은의 접근법은 아버지 김정일보다는 할아버지 김일성과 훨씬 가깝다. 김일성 역시 공개 행보를 즐기고 대중과의 친밀도를 중시했다. 김정은이 태어나기 2년 전인 1982년 태양절(김일성 생일) 때는 미래의 손자가 2020년 열병식 때 하게 될 연설과 유사한 연설을 했다. 1982년 4월 16일자 <로동신문>에 '경축연회에서 하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연설'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된 태양절 경축사에서 김일성은 인민에 대한 애정을 이렇게 표시했다.
"혁명동지들과 인민들이 나에게 돌려준 따뜻한 사랑과 두터운 신뢰는 나로 하여금 앞으로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더 많은 일을 함으로써 동지들과 인민들의 사랑과 기대에 반드시 보답하여야 하겠다는 혁명적 결심을 더욱 굳게 가지게 합니다."
김일성은 러브레터 같은 말도 했다.
"나에게 있어서 가장 기쁜 것은 인민들의 사랑과 지지를 받는 것이며, 가장 보람 있는 일은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 것입니다. 나의 념원은 앞으로도 계속 인민들의 사랑과 지지 속에서 사는 것이며, 나의 혁명적 의무는 인민을 위하여 끝까지 투쟁하는 것입니다."
인민을 자기보다 위에 놓는 겸손함도 드러냈다.
"인민들은 언제나 나의 극진한 보호자였고 고마운 은인이었으며 훌륭한 선생이었습니다."
할아버지의 1982년 연설과 비슷한 분위기로 연설함으로써 이번에 김정은은 자신을 '김일성 화신'으로 형상화하려는 평소의 의도를 좀더 강하게 드러냈다. 자신을 '김정일 후계자'도 아닌, '김일성 후계자'도 아닌, 김일성 화신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접근법을 보여준 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에서 드러나듯이 북한 역시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나라다. 이런 국가에서 정권이 하나의 혈통 내에서 3대째 승계되는 것은 북한 지도부 입장에서도 부담스러운 일이다. 왕조국가 헌법이 아닌 민주국가 헌법을 가진 나라가 '3대 세습 국가'라는 비판을 듣는 것은 당연히 짐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은이 '김정일 후계자' 이미지를 강하게 드러내면,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 승계가 한층 더 명료해진다. 반면, '김일성 화신'의 이미지를 띠면 3대 승계가 조금은 약화될 수도 있다.
정권이 3대째 승계되고 있다는 점은 북한 사람들도 다 알고 있지만, 김정은이 '김정일 후계자'가 아닌 '김일성 화신'의 이미지를 갖게 되면 세습의 부정적 이미지가 조금은 약해질 수 있다. 김정은이 연설 문구에서마저도 김일성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은 김정은과 북한 지도부가 3대 승계에 대한 부담을 항상 강하게 느끼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이번 열병식과 김정은 연설에서 표출된 북한 지도부의 정서는 3대 승계에 대한 비판을 여전히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점, 대내외적 위기 속에서 절박함과 낙관적 전망을 함께 느끼는 대중을 다독일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는 점, 신형 ICBM 전시로 미·일의 도발 가능성을 견제하는 동시에 선제공격의 의사가 없음을 명확히 함으로써 현상변경을 막고 현상유지를 꾀하려는 희망을 갖고 있다는 점 등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