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서 한국사회 직장문화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상임대표)
고 박원순 서울시장 성추행 의혹의 진상규명과 위력 성폭력 사건의 재발방지를 위해 288개의 여성·시민단체가 모여 연대체를 만들고 활동에 나섰다.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 공동행동'(공동행동)은 15일 서울 중구 서울시청 앞 서울도서관에서 출범 기자회견을 열고, '박원순 성추행 의혹' 사건 대응 등 앞으로의 활동 계획을 밝혔다.
이들은 "(박원순 성추행 의혹에 대해) 집권여당은 구체적인 재발 방지 대책 대신 형식적인 사과에 그쳤다. 그 사이에 일부 세력은 정치적인 음모론을 제기하거나 피해자에게 '다른' 의도가 있다는 식의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2차 가해에 대응해나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나아가 피해자 지원을 통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피해자의 일상회복을 도모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밖에도 공동행동은 지방자치단체장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구조를 방지하기 위한 대책을 정부나 지자체에 요구하는 한편, 직장 내 성희롱·성차별을 근절하는 '조직문화 개선' 활동을 펼칠 계획이다.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구조적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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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순 성추행 의혹' 피해자 편지 대독 "꿋꿋하게 살아서 진실 규명할 것"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박원순 성추행 의혹' 피해자의 글이 여성단체 활동가에 의해 대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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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성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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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원순 시장의 문제가 시장 한 명의 문제일까? 문제가 발생한 상황을 보면 서울시의 오랜 관행과도 연관이 있다. (...) 시장 비서실은 아주 중요한 업무를 하는 곳이고 대개의 경우에 경력이 짧은 신규보다는 수년간 업무 숙련이 된 직원이나 경험이 충분해서 비서업무에 이력이 난 직원을 선호하는데, 유독 시장 비서실은 어린 미혼의 여자 공무원들이 계속 배치되어 왔었다. 누가 봐도 젊은 여성들이 분위기를 띄우거나 사무실의 꽃 역할을 담당하기를 기대하는 구조임을 부인할 수 없다." - 익명의 서울시 직원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한 서울시 공무원의 의견이 대독됐다. 그는 '박원순 성추행 의혹'을 구조적 문제로 진단했다. 서울시 조직 내 관리자들에게 여전히 성인지 인식이 부족한 모습이 목격되고 있으며, 이는 성폭력 가해자들에 대한 솜방망이 징계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상임대표 역시 "문제가 있는 사업장에는 한 가지 문제만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직장 내 성희롱, 성폭력 사건은 당연히 그 사건 자체의 해결과정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근본적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조직문화와 조직 운영방식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밝혔다.
이하영 성매매문제해결을 위한 전국연대 공동대표는 남성 중심적인 정치 구조를 지적했다. 그는 "안희정 충남도지사, 오거돈 부산시장, 박원순 서울시장까지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되었다"라며 "지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이미 조짐이 보였다. 민주당이 공천한 시도지사가 100% 남성, 당선된 시도지사도 100% 남성이다. 이것부터가 문제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이 공동대표는 "더 이상 성별에 눈감은, 그래서 남성에게 기울어진 민주주의를 참지 않겠다"면서 "여성이 마음껏 평등하게 참여하고 대표될 수 있는 성평등한 민주주의를 원한다"고 강조했다.
피해자 "유사한 피해 막아야"... 김지은 "기시감 든다"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안희정 성폭력 사건'의 고발자인 김지은씨와 '박원순 성추행 의혹'의 피해자가 쓴 글이 대독됐다.
김지은씨는 "노동자로서의 제 삶은 미투 이후 모두 파괴되었다"면서 "힘겹게 쌓아왔던 경력과 노력들은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고, 직장에서 동료라고 불렸던 사람들은 2차가해를 일삼았다"라고 전했다. 그는 여전히 평범한 일상으로의 회복이 어렵다고 밝혔다.
이어 김씨는 "박원순 사건 피해자분께서 겪고 계시는 현실을 보면서 제가 앞서 말씀드린 지난 시간을 반복해 보고 있다는 기시감이 든다"면서 "비슷한 일을 겪은 한 사람으로서 굳건한 연대와 변함없는 지지의 마음을 전한다. 용기와 연대만이 우리를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격려의 말을 전했다.
'박원순 성추행 의혹' 피해자는 공동행동을 비롯한 피해자를 보호하는 이들에게 감사의 뜻을 밝히면서도, 진상규명의 어려움과 2차 가해에 의해 고통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피해자는 "신상에 관한 불안과 위협 속에서 거주지를 옮겨 지내고 있지만, 거주지를 옮겨도 멈추지 않는 2차 가해 속에서 절망감에 괴로웠다. 특히 그 진원지가 가까웠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몸서리처졌다"라며 주변인에 의한 2차 가해에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다고 호소했다.
이어 자신의 사건에 대해 "대표적인 인권운동가가 막강한 권력 뒤에서 위선적이고 이중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든 것에 대한 사회적 반성과 앞으로 이와 유사한 일들을 예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여 우리 사회가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를 바란다"라고 강조했다.
피해자는 "100일, 저에게는 너무나 길고 괴로운 시간이었다"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서 진실을 규명하고 우리 사회가 정의를 실현하는 모습을 반드시 지켜보고 싶다"라며 문제 해결에 함께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날 기자회견은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와 음모론 등을 반박하는 퍼포먼스와 더불어 '우리는 함께 한 걸음 더 나아간다'라는 구호를 적은 보라색 우산을 펴면서 마무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