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정권 시절에는 누구든 간첩이 될 수 있었다. 특히 제주에는 공권력의 고문과 폭력에 간첩으로 조작된 사람들이 많다. 제주에 사는 조작간첩 피해자의 피해 사실과 그들의 삶과 기억을 기록해 현대사의 비극에 직면하고 이를 통해 파괴된 공동체와 인권의 회복을 돕고자 한다. [편집자말] |
"정말 이런 날이 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23년 만에 무죄라는 이 소식을 듣고 어떻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 강희철, 2008년 6. 23. 연합뉴스
"조작된 간첩사건이 45~50건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강희철씨 사건의 경우 순수하게 피고인측에서 재심을 청구하고 해결된 첫 사례가 될 것 같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많은 조작 사건들의 진실이 밝혀지기를 바란다."
- 강희철의 재심을 담당했던 최병모 변호사, 2008. 6. 23. 연합뉴스
2008년 6월 23일 뉴스에 그의 이름이 나왔다. 무죄 판결을 받은 강희철씨와 최병모 변호사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 눈을 지그시 감거나 눈시울을 붉혔다.
서슬이 시퍼렇던 5공화국 시절인 1986년 4월 28일 만삭인 아내를 대신해 아침 밥상을 차리다가 대공분실로 끌려간 뒤 간첩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가석방될 때까지 12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던 강희철.
이날의 무죄는 제주 출신 재일동포 조작간첩 사건 중 첫 진상규명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매우 컸다. 한편으로 또 다른 조작간첩 재심의 시작이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2011년 가을 제주에 사는 강희철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 너머로 전해오는 잘 지내냐는 그의 인사에 반가움보다는 걱정이 먼저 들었다. 그럴 이유가 있었다.
필자가 진실화해위원회에 몸담고 있던 때에 강희철씨는 이장형씨와 함께 간첩으로 조작되었다며 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두 사람 모두 제주 출신으로 신촌 사람 강희철씨는 1986년 제주도경에 연행되어 85일간 구타, 물고문 등 온갖 가혹행위를 당하며 허위자백을 강요받았고, 고산 사람이던 이장형씨는 1984년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연행되어 악명 높은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 고문을 받고 간첩혐의가 조작되었다. 두 사람 모두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았고 공교롭게도 2005년 9월 모두 법원에 재심을 신청했다.
나 말고도 더 있다
그들이 함께 재심을 신청할 수 있었던 데에는 천주교인권위의 도움이 컸다.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때부터 출감 후까지 천주교인권위는 진실규명을 위해 두 사람을 백방으로 도왔다.
재심을 함께 신청했다고 재심 개시도 함께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이장형씨의 재심 소식이 없을 때 2008년 강희철씨의 재심이 먼저 열렸다. 그리고 그해 강희철씨는 법원으로부터 최종 무죄 선고를 받았다.
앞서 강희철씨는 진실화해위원회에 자신이 억울한 조작간첩이라며 고문수사관 등을 조사해 진실을 규명해 달라고 했던 신청을 재심에 집중하기 위해 취하했다. 신청인의 뜻을 존중해 진실화해위원회는 사건 조사를 취하하겠다고 통보했다. 그랬던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나 전화가 온 것이다. 이미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기에 강희철씨가 내게 연락할 이유는 없었다.
전화기 너머로 '잘 지내느냐, 요즘 뭐 하고 지내느냐'는 그의 말에 '지금여기에'에서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돕고 있다고 하자 그는 제주에도 조작간첩 피해자들이 여럿 있다며 좀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했다. 그의 말을 듣고 제주에 내려가겠다고 하고는 날짜와 장소를 잡았다. 그렇게 제주에서 만난 피해자들이 강광보, 김용담, 김평강, 허간회 등이었다.
강광보의 구술 = "(교도소에서) 나와 가지고 내가 빨리 재심할 줄은 몰랐는데 제주도에서는 정보가 늦어가지고 서울에서는 재심한다 하는데 제주도에서는 정보가 늦어가지고 재심할 줄을 몰랐지. 2008년도인가 그때 제주 화북공업단지에서 전세버스회사 경비원을 하고 있었거든. 아, 어느 날 저녁 9시 뉴스에 강희철이가 나오더라고. 그 친구는 내가 교도소 들어간 지 며칠 안 돼서 들어왔는데 무기를 받고 왔더라고. 같이 들어온 사람 하나가 더 있었는데 7년을 받고 온 제주 사람인데 아, 보니까 오재선이더라고. 둘 다 양승태한테 재판 받고 왔더라고.
그런데 일요일에 교회당에 모여서 영화 보고 밖에서 연사가 와서 연설을 하는데 거기서 서로가 보니까 알겠더라고.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데 머리 빡빡 깎고 있는 모습을 보고 내가 손 흔드니까 같이 손을 흔들더라고. 교도소에서 말은 못하게 하니 말은 안 해봤어. 그때 한번 본 것이 전부였는데 이 친구가 고향이 제주 신촌이란 건 알고 있었어.
교도소 나와 가지고 보니까 이 친구가 무죄 받아서 인터뷰하는 것이 텔레비전으로 나오잖아. 아, 이 친구를 찾아야겠다. 그래서 전화번호를 뒤졌는데 안 나와... 그래서 신촌으로 직접 찾아가 강희철을 알 만한 분을 찾다보니까 내 후배 되는 애가 안다는 거야. 그 후배가 낚시를 좋아하는데 같이 낚시하는 친구가 강희철을 안다고 하는 거야. 그 친구가 어제도 희철이하고 낚시하고 술을 마셨다고 하면서 연락을 해줬어.
그 친구를 통해 희철이에게 연락하니까 전화를 받았어. 희철이를 만나니 나더러 그러더라고. '왜 진작 날 안 찾았냐'고. 그래서 내가 집을 알아야 찾지, 모르는데 어떻게 찾느냐고 하면서 아무튼 반갑다고 했지. 그날은 그렇게 헤어지고 일주일 후에 우리 집에 찾아왔어. 와가지고 나에게 '자기가 재심할 때 이렇게 이렇게 했으니까 이렇게 하면 됩니다'하며 알려주더라고. 그 친구 도움을 많이 받았지. 내가 재심을 하게 되니까 광주에서 같이 살았던 제주도 출신들 김평강 선생이나 여러 사람을 내가 알거든. 그 사람들도 혹시나 모르고 있지 않을까 해가지고 내가 찾아다닌 거야."
먼저 재심에서 무죄를 받은 강희철씨의 뉴스는 간첩으로 조작되어 늘 억울함을 간직하고 살았던 강광보씨에게 한줄기 희망의 빛이었다. 간첩으로 조작된 이후 가정이 파괴되고 인생 모두가 망가져 버린 그에게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방법은 재심을 통한 무죄밖에 없었다. 무죄를 받으려면 다시 재판에서 억울함을 밝히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재심은 꿈같은 일이었다.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몇 번이나 재심을 통해 자신의 억울함과 무죄를 증명하려 했으나 주변 모두가 말렸다. 재심이 열리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어려운 재심을 해봐야 돈만 날리고 마음의 상처만 더 커질 것이라 했다.
어렵게 재심을 한다 하더라도 큰돈을 들여 변호사를 사야 하고, 설령 돈을 마련한다 하더라도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의 재심을 맡아줄 변호사를 구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찾아가는 변호사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손사래 치는 경험을 여러 번 해야 한다. 그래서 억울하지만 재심하기를 포기하고 살았던 강광보씨에게 강희철씨의 소식은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서로 돕다
그 순간에도 강광보씨는 자신만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광주교도소에서 만났던 제주 출신 피해자들을 떠올리며 자신처럼 간첩으로 조작된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그렇게 찾아낸 것이 자신을 비롯해 김평강, 김용담, 허간회 등이었다. 본인만을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시간과 발품을 들여 다른 피해자들을 찾아 나선 이유에 대해 강광보씨는 이렇게 이야기 했다.
강광보의 구술 = "왜 그런 생각이 들었냐 하면 내가 광주교도소 들어가니까 집시법 위반으로 잡혀 들어온 학생들이 운동 갔다 들어오더라고. 그 학생들이 나보고 '아저씨 어디서 왔냐'고 물어봐. 그래서 제주도에서 왔다고 하니까 '아 저기 몇 호실 아저씨도 제주에서 왔는데?' 하면서 자기들하고 운동하고 있다고 말해 주더라고.
그래서 찾아가 보니 정말 제주 사람이 있더라고. 그래서 나보고 어떻게 해서 들어왔냐고 물어보길래 일본에서 오래 살았다가 귀국했는데 일본 친척, 조총련 관계로 들어왔다고 했지.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제주 출신 사람들 한 7, 8명이 운동 마치고 들어오더라고. 다른 재소자들이 운동 마치고 들어오면서 우리를 보더니 '아 전두환 놈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하면서 '아저씨 걱정 말아요' 하면서 안심시키더라고(웃음). 언젠가는 좋은 세상이 오면 반드시 보상 받으니까 아저씨 낙심하지 말라고 응원을 하더라고.
우리가 교도소 안에서 생활하는 동안 동료들끼리 자주 말해요. 너는 어떻게 해서 들어왔냐, 다 형기 마치면 다 재심하겠다, 그런 대화를 자주 하거든요. 그 당시 교도소 안에 있을 적에 아는 분이 경비대를 통해서 밖으로 편지를 보낼 수 있으니까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으로 사건 내용을 써서 보내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몰래 편지를 써서 보냈지. 그 뒤 얼마 안 있어서 <말>지에 내 편지 내용이 나왔나 보더라고. 나중에 당시 박원순 변호사의 <야만의 시대>라는 책에도 내 사건이 나왔어요. 그분들이 내 사건을 어떻게 알겠어요. 그때 내가 편지를 보냈으니 알고 내보낸 것이죠. 감옥에 있는 동안 그렇게 서로 협조하면서 살았죠."
1980년대 광주교도소에는 제주에서 끌려온 조작간첩 피해자 다수가 수감되어 있었다. 제주 피해자들은 제주지방법원에서 1심 재판을 치른다. 피해자들은 법원에서 고문과 허위사실을 주장해 보지만 판사에게 전혀 반영되지 않고 공소장대로 간첩이 되어 7년 형 이상을 선고받는다. 억울한 피해자는 항소하고 제주를 관할하는 광주고등법원에서 재판을 받기 위해 광주교도소로 이감된다.
교도소에 입감되면 먼저 와 있던 제주 출신 피해자들이 서로 알아보고 먼저 챙겼다. 먼저 온 피해자는 나중에 들어온 피해자가 고문으로 상처받은 몸과 마음을 위로했고, 비록 지금은 범죄자로 조작되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진실을 밝히겠다는 다짐을 서로서로 나눴다. 수십 년이 흘렀지만 교도소에서 다짐했듯이 억울함만은 꼭 풀겠다는 희망만은 버리지 않고 있었다. 긴 기다림 끝에 결국 강희철씨의 재심을 통해 그 희망을 보았고, 그 순간 감옥에서의 다짐대로 서로 재심이라는 희망의 불씨를 나눈 것이다.
강광보의 구술 = "김평강 선생은 일본에 돈 벌러 다시 들어가서 제주에 없었거든. 수소문해서 알아보니 김평강 선생 아들이 용담동에 있는 현대아파트에 산다고 해서 연락처를 알아가지고 아들에게 연락을 했지. '아버지에게 자주 연락하냐' 하니까 그렇다고 해.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아버지하고 같이 교도소에서 고생한 사람인데 재심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으니 아버지가 같이 재심을 할 생각이 있으면 물어보고 연락을 달라고 했지.
그랬더니 얼마 안 있다가 김평강씨에게 연락이 왔더라고. 아니 어떻게 된 거냐고 했더니 일본에서 불법체류 했다가 걸려서 얼마 전에 들어왔다고 하는 거야.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래서 같이 재심을 신청하기로 했어. 강희철에게 소개받은 최병모 변호사를 통해서 같이 재심을 신청했는데 그때 같이 신청한 사람이 다섯 사람이었어. 그런데 재심을 신청할 때가 이명박 대통령 때라 재판이 바로 열리지 않고 한 3년은 묵혔어."
그랬던 그들이 재심을 시작했다. 남도의 외딴 섬 제주의 조작간첩 피해자들은 어떻게 재심을 이뤄냈을까? 이제 그 이야기를 시작한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2004년 12월 국정원 진실위원회에서 조사관으로 근무하기 시작했고 2006년 4월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으로 위원회를 옮겨 2010년 12월까지 과거사 조사를 계속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해체된 뒤에도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피해를 밝혀내는 일을 꾸준히 해왔고 지금은 국가폭력 피해자 지원단체인 '지금 여기에'에서 일하며 국가권력으로부터 부당하게 인권 침해를 당한 피해자들의 진실을 규명하고 이들의 사법적 회복을 돕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