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 다시 주식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다른 투자를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미래를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의 행복을 위해, 돈 대신 다른 것에 투자하기로 결정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편집자말] |
올해 봄부터 옷 만들기에 꽂혔다. 그냥 벼락 치듯 사로잡혔다.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아니, 계기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SNS를 통해 우연히 '옷 만들기' 강좌 홍보문구를 보았고 이상하게 머릿속에 맴돌았다. '만들고 싶다, 나도 만들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거듭하다 나중에는 '만들어야겠다'는 강한 충동이 나를 흔들어댔다.
뭐 안 될 것도 없잖아? 안 하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아 강좌를 신청했다. 겁도 없이. 온라인으로도 부족해 집 근처 문화교육센터에서 생활 한복 만들기 강좌도 신청했다. 내친 김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실과 원단, 바늘을 구입했고 급기야는 재봉틀까지 구입했다. 내 인생에 없던 시나리오였다.
예전부터 실과 바늘을 가지고 쪼물락거리기를 좋아하긴 했다. 훌륭한 솜씨는 아니지만 손바느질을 하고 있으면 마음이 안온했다. 성과물이 나오는 것도 뿌듯하지만, 바느질할 때 그 고요와 적막의 시간이 좋았다. 주로 가방이나 티코스터, 필통 같은 소품을 만들었다.
하지만 옷은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내가 어찌 옷이라는 걸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그런 내가 옷 만들기에 관심을 갖게 되다니.... 나는 내가 신기했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뜬금없는' 갈망에 사로잡힐 수 있단 말인가. 주변에서도 신기해했다. '너 갑자기 왜 그래?'
옷 만들기에 제대로 미쳤다
나는 미친 듯 옷 만들기에 매진했다. 머릿속은 늘 옷 생각뿐이었고, 머릿속에서는 늘 패턴을 그렸다지웠다 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원단을 쇼핑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고 이동하는 차 안에서는 유튜브로 영상을 뒤져가며 타인의 기술을 감탄하며 보았다. 평일에는 시간에 쫓겨 옷 만들 수 없음을 아쉬워했고, 주말에는 몰아서 마음껏 재봉틀을 돌렸다.
밥 먹는 것도 잊은 채, 밥 먹는 시간도 아쉬워하며 패턴을 그리고 재단을 하고 재봉틀을 돌렸다. 아주 단단히 미쳤다. 그런데 그 '미침'이 너무나 즐거운 거다. 하루하루가 너무 신났다. '내가 이렇게 금손이었다니...' 같은 유치한 착각도 하면서 나는 즐거웠다. 왜 좀 더 어린 나이에 옷을 배우지 못했는지, 한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옷을 만들 타고 날 운명이었음을 직감하며, 이제라도 늦게나마 입문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생계를 위한 기본적인 업무를 제외하고는 책도 읽지 않고 글도 쓰지 않고 저녁 약속을 잡지도 않고 오로지 옷 만들기에 매진했다. 시간이 아까웠다. 근래 그렇게 미쳐본 적이 없다. 그 와중에 배운 것이 있다.
첫째. 자부심이었다. 처음에 만든 옷들은 핏도 우스꽝스럽고 바느질도 어설퍼서 밖에 입고 나갈 정도까지는 못 되었다. 그래도 나는 나름 뿌듯해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몇 번 입고 나갔다. 직접 옷을 만들어본 사람은 안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옷을 입은 그 기분.
옷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내 자신이 존중받고 내가 소중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생각지 못했던 수확이었다. 처음에는 취미 생활로만 접근했는데, 옷 만들기는 생각 외의 자긍심과 자부심을 안겨줬다. 남들이 알아주든 말든, 나는 내 멋에 취했다.
옷을 직접 만든 후, 나를 더 소중하게 여겼다
둘째, 내 몸을 더 사랑하게 됐다. 내 몸 치수를 재어서 패턴을 그리다보면 내 몸에 대해서 알게 된다. 특히 옷을 직접 만들어서 입어보면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거나 맞지 않는 구석이 있다. 분명 공식이라고 알려준 대로 했는데, 그것과는 살짝 다른 내 몸 만의 '변수'가 있었던 것. 가령 나는 옷을 만들면서 팔 길이가 남들보다 조금 더 짧다는 충격적인(?) 사실도 알게 되었다. 무려 45년 만에.
그 외에도 어깨가 평균치보다 좁거나 가슴이 크거나 허리가 살짝 앞으로 굽었을 때 등등 기존 공식에서 어떻게 공식을 융통성 있게 수정해야 '나만의 옷'을 만들 수 있는지 연구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내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게 되고, '아하~~ 내 몸이 이렇게 생겼구나'라며 몸 자체에 신경을 쓰게 됐다. 그것도 예상치 않았던 수확이었다.
셋째. 삶의 지혜를 배우게 됐다. 나는 바느질을 할 때마다 시접(접혀서 옷 솔기의 속으로 들어간 부분)의 의미를 항상 떠올린다. 아무리 바느질 솜씨가 뛰어난 사람이라 해도 시접이 없으면 바느질을 할 수 없다. 그런데 또 재미있는 건, 바느질을 완성하고 나면 어떻게든 시접을 감추거나 최대한 자취를 감추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거다. 시접이 불룩해서 표가 나면 맵시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표나지 않게 세상을 받치는 '시접'과 같은 사람들
표나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시접을 보며 세상에는 '시접'과 같은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바늘의 묵묵함도 생각한다. 손바느질을 할 때, 이걸 다 언제 할까 싶은 분량도 한 땀 한 땀 묵묵히 하다보면 어느새 끝이 나 있다. 세상에 끝나지 않는 일은 없다. 꾸준함과 묵묵함이 바느질의 미덕이라는 것도, 생활의 지혜라는 것도 옷 만들기를 통해 배웠다.
좋은 시간만 있는 건 아니었다. 옷 만들기에 회의가 들 때도 있다. 돈, 시간 대비했을 때 기성복이 훨씬 경제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다. 아무리 취미 생활이라지만, 기왕이면 예쁘게 입고 싶어서 만든 건데, 내 예상과는 다르게 핏이 나왔거나, 내가 생각했던 느낌이 아니면 살짝 자괴감이 든다.
자괴감이 심해지면 '내가 이 나이에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잠도 안 자고, 돈 들여가며 이러고 있지?' 신세 한탄이 슬슬 기어 나온다. 2만 원이면 구입할 수 있는 옷을 만들기 위해 새로 원단을 구입하고 부자재를 구입하고, 몇 날 며칠 동안 끙끙대며 패턴 그리고, 재봉틀 돌려가며 만들었는데, 막상 만들었을 때 '하나 완성했다'는 뿌듯함 빼고는 기성 옷보다 나은 게 없을 때 그러했다.
열정 과잉이면 오만해지더라
처음 옷을 배울 때는 뭐든 금방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지도 원피스도 코트도 금방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열정 과잉이다. 열정이 지나치면 오만해지기 쉽다는 걸 알았다. 바느질을 망쳐서 실밥을 몇 번이나 풀었다 꿰맸다 해서 옷감이 너덜해지면 '아~ 난 역시 바느질은 소질이 없나 봐' 한탄했다. 뭐든 쉽게 얻으리라 생각한 나는 오만했다.
다시금 초심으로 되돌아 생각해보면, 난 옷 만들기로 뭔가 거창하게 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내 평생의 취미로 내 옆에 두고 싶을 뿐이었다. 물론 그 옷을 두고두고 오래 입을 수 있다면 더 말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옷 만들기를 꾸준히 하다 보면 자연히 그 실력도 늘 것이다.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갈수록 옷의 퀄리티도 나아지리라 믿는다. 생각지도 않았던 뜬금없는 취미는 내 인생을 풍요롭게 해주었다. 내 옷장에 쌓여가는 내가 만든 하나밖에 없는 옷들은 중요한 재산이 되었다. 아니, 옷 자체보다는 패턴을 고민하고 원단을 선택하는 '옷 만들기 놀이'가 중요한 재산이 되었다.
조금 더 실력을 향상시켜서 내 옷뿐 아니라 가족들과 자녀, 부모님 옷도 만들어드리려 한다. 지난여름에 아빠가 얇은 토시를 부탁하셔서 직접 만들어드렸는데 무척 기뻐하셨다. 단돈 몇천 원으로 살 수 있는 토시였지만, 직접 만들어드리니 내가 마치 부자가 된 기분이다. 딸 아이 친구 엄마에게 감사의 표시로 티 코스터와 천 마스크를 선물한 날은 나 스스로가 대견하기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옷장에 하나둘 걸려 있는 '핸드메이드' 내 옷들을 보면 먹지 않아도 배부른 심정이다. 앞으로 이 포만감을 잘 키우기 위해 나는 시간과 돈, 노력을 차근차근 들일 것이다. 하루아침에 되는 일은 아니다. 바늘 '한 땀의 묵묵함'을 믿으며 나는 기쁨의 재산을 오늘도 불려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