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채식 인구는 나날이 증가하고 있으며 군대와 일부 학교에서는 채식 선택권 도입을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사람은 '채식' 하면 미디어에서 자주 등장하는 극단적인 채식주의자 이미지만을 떠올리며 채식을 어렵고 멀게만 생각한다. 정말로 채식은 어려운 것일까?
채식을 하겠노라 고백하는 순간부터 시달려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주변인들의 검열이다. 한국 사회가 바라보는 채식주의자란,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만 늘어놓는 잘난척쟁이', 혹은 '맛있는 고기를 줘도 마다하는 괴짜'로 나눠진다.
어쩐지 엄격하고 까다로울 것만 같고, 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저 몰래 야만인 취급하며 채점할 것만 같아 불편하다. 살던 대로 살면 안 되는 걸까. 도대체 채식의 올바른 기준은 어디에 있나.
바로 여기, 이 고루한 편견에 반기를 들고 선 이들이 있다. '플렉시테리언'이다. '플렉시테리언'은 가장 낮은 단계의 채식으로, 유연하다는 뜻의 'flexible'과 채식주의자를 뜻하는 'vegetarian'을 합친 말이다. 지난 1일 서면을 통해 개인 블로그에 플렉시테리언 식단을 공유하는 로미(활동명)씨를 인터뷰했다.
'100% 완전무결함'을 넘어서
- 플렉시테리언을 지향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2년 반 전에 인도 여행을 하면서 채식 도시를 방문하게 된 것이 계기였어요. 도시 자체적으로 육식을 금하고 있었는데 맛있는 음식과 식당을 찾는 일은 아주 쉬웠고 시간상 못 먹고 온 음식이 있어서 아쉬울 정도였어요. 짧은 기간 머물렀던 곳이지만 강렬하고 신선했던 경험이었어요.
타의적으로 채식을 해본 경험은 그전까지 한 번도 없었던 데다가 보통 채식 음식이라고 하면 샐러드 정도만 생각했었는데 실제로 먹어보니 채식 음식이 그렇게 다양하고 맛있는 음식이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으니까요. 그 뒤로도 채식에 관련된 글이나 다큐멘터리를 지속적으로 찾아보게 되었고 '고기를 먹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부터 조금씩 육식을 줄이게 되었고 지금은 플렉시테리언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 어떤 방식으로 플렉시테리언 생활을 실천하고 계시나요?
"제가 유동적인 채식주의자 생활을 하면서 지키는 원칙은 '억지로 하지 않는 것'이에요. 육류, 어류, 가금류, 유제품 등의 음식 종류 중 어떤 것을 섭취하느냐에 따라 채식주의자 안에서도 종류가 나뉘는데 저는 저의 채식 기준을 음식 종류에 두지 않고 '상황'에 둬요. 그 상황은 외식을 할 때와 정말 먹고 싶을 때입니다.
외식으로 먹는 구운 고기처럼 1인당 한 그릇의 요리가 주어지지 않는 식사 자리에서는 거의 육식을 해요.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같이 식사하는 사람들이 고기를 먹으면 같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먹을 때가 많아요. 그리고 치킨, 피자, 삼겹살 등과 같이 특정 음식이 먹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고 그 음식을 먹었을 때 내가 지금 불만족스럽게 느끼는 무언가가 해소되리라 생각되면 억지로 참지 않고 그냥 먹습니다."
- 플렉시테리언이 된 이후로 생긴 긍정적인 변화가 있나요?
"육식을 한 날과 안 한 날의 몸 상태가 확연히 다른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건강상의 문제로 채식을 하게 된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신체적 만족감을 느낀 것이 가장 큰 변화였습니다. 이런 변화가 플렉시테리언 생활을 지속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아요."
- 플렉시테리언에 대한 주변인의 반응은 어땠나요?
"같이 식사를 할 때 '채식하지?, 그럼 뭐 먹지?' 하고 먼저 물어봐 주긴 하지만 외식할 때는 보통 육식을 하기 때문에 플렉시테리언 실천 이전에 비해 먹는 음식과 반응이 크게 다르지는 않아요."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고기를 먹는 채식주의자가 채식에 대해 논하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채식은 왜 먹는 음식 종류로만 구분해야 할까요? 그리고 왜 그렇게 엄격해야 할까요?
1년 넘게 일주일에 5일 이상, 하루에 2끼 이상을 직접 요리해서 먹는 저는 육고기를 식재료로 구매한 지는 1년 반, 닭과 달걀을 구매한 지는 6개월이 넘었습니다. 일주일 전에 치킨을 먹기는 했지만요. 플렉시테리언 이전 식단과 비교하면 육식 비중은 1/5 정도로 줄어든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플렉시테리언이 되기 전보다 된 후의 지금 더 만족합니다."
원칙 없는 사람들? 어쩌면 틀을 깨는 사람들
누군가는 플렉시테리언이 모순적이고 원칙 없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 오해들과 맞닥뜨릴 때도 있지만 그들을 향한 오해는 역설적이게도, 사실 플렉시테리언의 지향점을 정확히 관통하는 개념이다.
플렉시테리언의 의미는 그저, 작은 실천으로 이룰 수 있는 변화들을 애써 모른 척하지 말자는 데 있다. 이는 채식을 하는 데 중요한 것이 100% 완전무결함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우리는 살아가는 내내 우리 주변을 둘러싼 여러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늘 맞닥뜨려야 하며 어느 쪽에 설 것인지 선택해야만 한다. 그중에서도 기후변화 위기는 우리 세대가 더는 외면할 수 없으며, 막연한 미래의 문제가 아닌 지금 당장 극복해야 할 과제다.
1인 평균 식생활 온실가스 배출량의 원인으로 육류와 유제품이 절반 이상(66.4%) 차지했다. 매일 하는 식사 중 한 끼라도 육류 소비를 줄인다면,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간헐적 채식 캠페인인 '고기 없는 월요일'의 이현주 대표는 <세계일보>와 인터뷰에서 "한 사람이 일주일에 1번만 채식을 해도 약 1년에 15그루의 나무를 심는 놀라운 효과도 가져온다"고 언급했다.
즉, 기후변화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육류 소비를 줄이는 게 가장 큰 핵심인데, 그렇다고 당장 모든 육류를 섭취하지 않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완벽하지 않지만 개인이 할 수 있는 작은 실천 방법으로 플렉시테리언을 제안한다. 가끔 육류를 섭취하는 것이 모순적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플렉시테리언이야말로 기후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열쇠다.
엄격한 잣대로 그들에게서 모순을 찾기보다는 육류 소비를 줄이려는 실천 의지에 주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어떤 방식으로 채식을 하든 정답은 없고 틀린 것도 없다. 주말에만 채식을 하는 사람, 평소에는 채식을 하다가 약속이 있을 때만 육식을 하는 사람 등등 어떤 플렉시테리언이 될지는 당신에게 달려있다. 또한 환경 문제가 아닌 다른 이유로 채식에 관심을 두고 있더라도 그동안 채식이 어렵게만 느껴졌다면 오늘부터 플렉시테리언이 되어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