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경유
그날(2004. 1. 31) 오후 4시 30분 인천공항을 이륙한 아시아나 OZ202편은 10여 시간 비행 후 그날 오전 10시(현지시간)에 LA 공항에 내려주었다. 우리가 LA로 경유한 까닭은 두 가지로 첫째 권중희 선생에게 항공권을 기증한 분이 아시아나 마일리지였다. 당시 아시아나 항공은 워싱턴 직항이 없었기에 LA를 경유했다. 그 둘째는 LA 거주 동포들이 우리 일행을 환영하고자 꼭 LA를 들러가라는 간청 때문이었다.
그날 LA 공항에서 노길남 민족통신 대표와 이용식 기자가 영접했다. 그 자리에는 1972년 오산중학교 재직 때 1-12 담임 반이었던 L.A 한국일보 진천규(전 한겨레, 현 통일 TV대표) 기자가 우리를 취재했다. 30여 년 전, 다섯메 교실에서 맺은 사제 간의 인연이 서로 취재 대상이 될 줄이야.
그날 오후 4시 15분(현지시간)에 L.A 공항에서 환승한 워싱턴 D. C.행 UA 200편이 동부 워싱턴 댈러스 공항에 착륙하자 자정 직전으로 한밤중이었다. 공항 출구로 나가자 젊은 동포 여러 분이 우리에게 꽃다발을 안겨주며 반겨 맞았다.
방미 이틀 후인 2004년 2월 2일, 마침내 권 선생과 나는 재미동포 주태상씨의 안내로 미국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의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갔다. 권중희씨는 그 건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무척 감개무량해했다. 수륙만리 그곳을 찾아가고자 얼마나 노심초사했던가?
우리는 까다로운 출입 수속을 마친 후 마침내 NARA 본관에 입장했다. 최신 6층 건물이었다. 층층마다 빼곡히 찬 기록물들을 보면서 미국의 저력과,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국민의 알 권리를 존중하는 정부의 대국민 서비스 정신에 감탄했다. NARA의 출입과 경비는 매우 철저했다. 하지만 일단 조사실에 입장하자 건물 내에서 활동은 생각보다는 자유로웠다.
한국전쟁 사진자료를 수집하다
NARA 5층은 사진자료실이었다. 영문에 능통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사진은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아 먼저 거기로 들어갔다. 나는 숱한 자료 가운데 'Korean War' 파일을 찾았다. 9개의 파일에는 수천 장의 사진이 소장된 바, 복사물의 번호를 적어 신청하자 직원이 원본 사진을 꺼내주면서 반드시 장갑을 낀 채 만지라고 했다.
그 사진들을 한장 한장 넘기자 갑자기 타임머신을 타고 1950년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B-29 폭격기의 융단폭격 장면, 치열한 시가지 전투, 전쟁고아들의 모습, 인민군 포로, 전차와 대포들이 불을 뿜는 장면, 군부대를 찾은 위문대들의 모습….
그리고 해방 직후 미군이 진주하는 날 조선총독부 광장에 일장기가 내려가고 성조기가 게양되는 장면 등, 그 모두 복사(현상)해 가고 싶었다. 하지만 복사비가 비싸고(한 장당 90센트) 그럴 시간도 없어 그날은 우선 조선총독부 광장에 일장기가 내려가고 성조기가 게양되는 장면 등 네 장만 현상했다.
2004년 2월 4일, 마침내 김구 암살 배후 NARA 현지 조사팀이 조직됐다.
지도 : 이도영(재미 사학자)
팀장 : 이선옥(재미 유학생)
팀원 : 박유종(재미동포)·권헌열(재미 유학생)·정희수(재미동포)·주태상(재미동포)
지원 : 이재수·김만식·서혁교(재미동포)
우리 조사반은 A, B, C 팀으로 나눠 작업한 바, 나는 C 팀으로 동포 박유종 선생과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현대사 사진자료를 수집했다.
알맹이는 없고 북데기뿐
나는 영어회화 및 영문에 능통하지 못하기에 김구 암살 배후 NARA 현지조사팀 활동에 대신 현대사 사진 자료 수집 일을 맡았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연배의 박유종 선생과 한 팀으로 일했다. 그분은 임시정부 백암 박은식 대통령의 막내손자로 호흡이 잘 맞았다.
우리 현지 조사팀의 지도자 이도영 박사는 1999년부터 NARA를 무시로 드나들면서 문서를 열람한 분이라 아키비스트(Archvist, 문헌관리사)들과 안면이 두터웠다. 그런데 이도영 박사는 1990년대 노근리사건 이후 미 정부가 문서 공개를 극도로 제한한다고 하면서, 우리가 딱 부러지게 얻고자 하는 문서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처럼 무척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 며칠 후 이도영 박사가 잘 아는 아키비스트 보이런을 통해 2001년 9·11 테러 사건 이후 미국의 국익을 해치는 문서는 97~98%가 '파괴(destroyed)'되었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 말에 우리 김구 팀은 아연실색했다. 어떻게 간 미국인가?
그 무렵 부산일보 김아무개 기자도 NARA에서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문서를 찾고 있었다. 그도 NARA에는 "알맹이는 없고 북데기뿐이다"고 개탄했다.
백악관에 가다
그 말에 권중희 선생은 우리 김구 팀이 백악관 앞에 가서 수거해 간 문서를 미국 측이 공개하라는 시위를 하자고 제안했다. 우리 김구 팀은 그날 일찍 퇴근하면서 곧장 워싱턴 D.C. 백악관 앞으로 갔다. 그런데 그 일대 경계는 매우 삼엄했다. 무장한 경찰은 기관총을 들고 사주경계를 하는가 하면, 백악관 상공에는 무장 헬기가 계속 빙빙 돌고 있었다.
한 자원봉사자가 내 옆구리를 찌르면서 말했다.
"미국은 한국과 다릅니다. 여기선 신고하지 않고 시위하면 얘네들은 그대로 발포합니다. 체포 후 두 분 선생님은 추방당하면 그만이지만 저희들은 어떡합니까?"
그 말에 권 선생과 나는 백악관 앞에서 시위할 용기를 잃었다. 그들의 도움없이는 영어 한 마디 못하는 우리 두 사람은 꼼짝할 수도 없을 뿐더러, 시위용 프래카드도 만들 수 없지 않은가? 우리는 해외에서 힘들게 사는 동포를 돕지는 못할지언정 그분들의 쪽박마저 깨트릴 수가 없었다.
다음은 그날 내가 쓴 기사 "워싱턴 D.C. 백악관 앞에서. 2004. 2. 6.)" 의 일부다
이제 미국은 한반도를 풀어주라
"(미국이) 진정한 세계 평화와 자유를 위한다면 남의 주권도 존중해 달라. 당신 나라의 한 주보다 작은 한반도를 '결자해지' 곧 묶은 자가 풀어주듯이, 이제는 지구상의 하나뿐인 한반도의 분단을 풀어주는 게 정녕 대국다운 아량이고,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는 길이 아닐까?
지나가는 나그네가 무심코 장난 삼아 던진 돌에 맞은 개구리가 치명상을 입듯이, 강대국들이 자기네 맘대로 그어 놓은 삼팔선, 휴전선 때문에 우리 겨레는 그동안 얼마나 서로 반목, 시기, 갈등의 나날을 보냈던가.
피를 나눈 형제끼리 한 하늘을 서로 함께 이고 살 수 없는 원수로 살지 않았나?
왜 우리 한반도가 분단되어야 하나? 우리는 전쟁을 일으킨 적도, 패전국도 아니다. 우리나라가 분단돼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되었는데도 여태 분단의 멍에를 짊어지고 사는 우리 겨레는 정말 억울하다.
- 워싱턴 D.C. 백악관 앞에서(2004. 2. 6.) 박도 시민기자.
(*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