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를 샀다. 중고에 전자 피아노지만 아이 방에 넣으니 진짜 피아노처럼 그럴듯해 보였다.
어릴 적 피아노를 배운 덕인지 음악은 늘 곁에 있었다. 열혈 애호가까지는 아니더라도 가요와 팝에서부터 영화음악, 재즈, 클래식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즐겨 듣는다. 일상의 배경과 분위기를 바꾸는 데 음악만 한 게 없기 때문이다.
음악은 때로 위로가 되고 기쁨과 슬픔, 멜랑콜리의 감정을 풍성하게 풀어주는 촉매제가 되어주기도 한다. 어려서 피아노를 배웠던 경험이 삶 속에 자연스레 음악을 흐르게 한 것 같다. 그래서 아이에게도 악기 하나쯤은 익히게 하고 싶었다.
한두 번 중고 피아노를 알아보다 마음을 접곤 했다. 만만치 않은 부피 때문에 덜컥 샀다가는 애물단지가 되기 십상이었다. 그런데 어린이집 선생님에게 아이가 피아노에 관심을 보인다는 말을 듣고 나니 지금이 피아노를 살 타이밍인가 싶었다.
아이가 흥미를 보이는 동안 쓸 요량으로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의 전자 피아노를 물색했다. 피아노가 도착한 저녁, 아이는 신이 나서 그동안 익힌 곡을 연주했다. 작은 별, 비행기, 나비… 손가락에 힘이 없어 어설펐고 다섯 손가락을 쓸 줄도 몰라 한 손가락으로 건반 사이를 오고 갔다.
피아노 교습은 거기서 끝났다
나는 유치원 대신 피아노학원을 다녔다. 사 남매가 자라는 집은 늘 주머니 사정이 빠듯했다. 네 아이 모두를 유치원에 보내기엔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피아노를 초등학교 4학년까지 배웠다.
당시엔 몰랐는데 돌이켜보니 엄마의 교육열이 만만치 않았구나 싶다. 그림에 소질이 있는 언니를 예중에 진학시킨 후 나까지 피아노로 예중에 보낼 꿈을 꾸었으니까. 그것도 꿈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두 딸 중 한 명은 그림을, 한 명에겐 피아노를 시키고 싶어했던 마음을 말이다.
아빠가 혼자 벌어오는 얄팍한 월급으로 사남매를 키우기도 벅찼을텐데 다달이 들어가는 학원비까지 어떻게 감당했을까. 그러니 엄마의 야심 찬 계획은 현실의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엄마가 예중 입시를 진지하게 생각했던지 평소 다니던 동네 피아노 학원 말고 다른 데로 나를 데리고 갔다. 입시를 위해 이름있는 선생님에게 레슨을 받게 해볼까 싶어 실력 테스트 겸 갔던 것 같다. 나는 준비해갔던 베토벤 곡에 평소보다 풍부하게 감정을 실어 연주했고 선생님과 짧은 대화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피아노 교습은 거기서 끝났다.
피아노를 그만둔 이유는 레슨비 때문이었다. 분명 엄마가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엄마를 졸라 피아노를 계속 배우겠다고 떼쓰지 않았다. 피아노를 쳐서 예중에 가고 싶다는 마음도 없었고 더 이상 못 배운다고 해서 크게 아쉽지도 않았으니까.
피아노에 대한 열정은 연습은 귀찮지만 안 치면 조금 허전한 애매한 크기였다. 무엇보다 그날 선생님의 반응으로 어린 나도 짐작할 수 있는 게 있었다. 성의도 없고 무심해 보였던 선생님의 반응에 피아노를 치겠다는 내 마음도 시큰둥해졌다.
언니도 그림을 계속하지는 못했다. 집안 형편으로 예고 진학을 포기했고,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니며 다시 그림을 배워 미대에 들어갔지만 결국 이론으로 진로를 돌렸다. 순수 미술을 지속하기 위해 유학이나 작업 비용을 감당하기엔 집안 형편이 안 되었다.
내가 피아노를 접은 건 좌절이라 할 수도 없는 축에 들지만 언니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지금은 다른 길을 찾아 자신의 커리어를 잘 쌓아가고 있지만 한창 하던 그림을 그만두겠다고 할 때마다 집안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언니는 상처받았을 테고 지원해주고 싶어도 능력이 안 되는 엄마는 애가 탔을 것이다. 우리가 좌절할 때마다 엄마는 더 큰 좌절을 경험했는지도 모르겠다.
내 삶의 풍요는, 모두 엄마 덕이었다
피아노를 사자 어릴 적 집에 있던 피아노 생각부터 났다. 밝은 갈색에 반들반들 윤이 나던 피아노. 당시엔 큰돈을 들여야 했던 피아노를 사면서 젊었던 엄마는 어떤 꿈을 꾸었을까. 시골에서 나고 자란 엄마의 어린 시절엔 피아노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는 신문물이었을 테다. 그런 것을 어린 자식들에게 가르칠 생각에, 자신은 갖지 못한 교양과 교육을 아이들에게 불어넣을 기대에 가슴이 부풀었을까.
초등학교 1학년, 하루는 엄마와 피아노를 치다 학교에 지각한 적이 있다. 오전 오후로 나누어 등교하던 시절, 오후반이었던 날이다. 내가 피아노를 치고 엄마가 곁에서 노래를 부르며 한창 즐겁게 놀다 보니 학교에 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헐레벌떡 가방을 챙겨 나왔지만 엄마와 나, 누구도 울상이 되지 않았다. 텅 빈 등굣길을 뛰지도 않고 어슬렁 걸어가며 엄마와 보낸 달콤한 한낮을 되새김질했던 기억이 난다.
전날 저녁 알려준 <허수아비> 를 아이가 혼자 피아노로 연주한다. 거실에 앉아 듣고는 속으로 놀랐다. 아이들은 인지하지 못하는 새 배우고 터득한다. 그런 아이를 하릴없이 놀린다며 나이 든 엄마가 더 성화다. 뭐라도 좀 시키라고. 그런 엄마에게 괜찮다고 대꾸하는 마음에는 내가 습득한 지식과 기술이 나만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라는 얼토당토않은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피아노, 스케이트, 수영, 자전거, 그림... 내 삶을 한층 풍요롭게 해주는 취향과 안목, 지식과 기술은 기실 젊은 시절 엄마의 노력과 헌신에 크게 빚진 것이었다. 서른이 갓 넘은 엄마가 아끼고 모은 돈을 어린 자식의 삶에 쏟아부어 만들어준 자양분 덕분이었다.
지금의 나보다 한참 어렸을 그때 엄마에게도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런데도 자식에게 아낌없이 투자했던 건 엄마에겐 그게 꿈을 꾸는 또 다른 방식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의 꿈이 차곡차곡 쌓여 내 삶이 되었다. 당시엔 엄마들 대부분이 그런 삶을 살았다. 요즘 엄마들은 아이를 통해서만 꿈꾸지 않는다. 하지만 엄마가 바랐던 삶의 지향점이 내 삶에 투영되었듯 내가 지향하는 삶이 알게 모르게 아이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어떤 꿈은 세대를 넘나들며 자라기도 할 것이다.
엄마에게 꿈이 뭐였냐고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다. 우리를 위해 꿈을 꾸기 이전에, 우리의 엄마이기 이전에, 엄마는 어떤 꿈을 꾸었을까. 그리고 그 꿈은, 어떻게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