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16일 금요일 오후 'ㅇㅇ대학교' 비대면 전화 면접을 했다. 심리학 공부를 위해 기회를 보고 있었는데, 마침 지역 학교에 아동 심리학과가 신설된다는 소식을 듣고 입학을 결정했다. 코로나19 상황이어서 전화로 한 면접이었다. 나는 성인 학습자여서 딱히 물어볼 말이 없었는지 궁금한 것이 있으면 말해보라고했다.
"교수님 수업 열심히 따라가겠습니다."
"그럼, 3월 수업에 뵙겠습니다."
면접은 간단하게 끝났다. 학교에 가고 싶은 이유는 예전에 평생교육원에서 받았던 심리학 공부에 대한 아쉬움이 컸고, 한편으로 직업적 성취를 위한 목표도 있다. 지금까지 해 왔던 일련의 작업을 정리하면서 최종적으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마음 작업을 밀도 있게 진행해 보고 싶은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면접을 마치고 나니 덜컥, 겁이 났다. 학교 공부를 마친 지 얼마인가?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살고 있으나, 학과 공부는 다른 것일 텐데... 막상 공부를 다시 시작한다고 생각하니 염려가 되는 게 사실이다.
방송통신대학교를 졸업한 지 이십여 년, 그때도 겁이 나긴 마찬가지 였다. 스터디 멤버 중 한 사람 빼고 모두 나보다 훨씬 젊은 엄마들이었다. 그 틈에서 뒤처지지 않게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1학년 첫 시험 기간에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전기난로를 끼고 앉아 공부했다. 나중에 전기료가 이십 만 원이 넘게 나왔던 기억이 새롭다. 처음엔 그렇게 힘이 들어간 몸과 마음 때문에 긴장의 연속이었다. 가장 공부를 열심히 한 1학년 성적보다 느슨하게 공부한 4학년 성적이 훨씬 좋았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힘이 들어가 용만 쓰다 만 1학년 때처럼, 지금 내 염려는 비슷한 것일지도 모른다.
여상을 졸업한 나는 대학에 가고 싶어 많이 울었다.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이 인문계 원서를 낼 때 나는 실업계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공부는 해서 뭐하랴 싶어 방황도 많이 했다.
부모님 속을 썩이는 일인 줄도 모르고 퇴근하면 독서실 계단을 오르며 내 스무 살의 시간을 보냈다. 마치 시위하듯 해마다 학력고사에 응시했다. 합격해서 면접을 보고도 학비를 낼 수 없어 포기했다. 더 이상 대학교는 내게 없을 것이라는 단념과 체념을 했다.
무슨 열망이 그렇게도 많았던 것일까? 아니, 열망이 아니라 결핍이었을까? 나는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허무한 마음을 책에서 보상받고 싶었던 심리 작용은 아니었나 싶기도 했으나, 책이라는 세계는 나를 실망하게 하지 않았고 오히려 열망을 부추겼다.
그렇게 한순간도 놓지 않은 책과의 인연은 평생 함께 가는 도반이다. 그 영향이었는지 국문과 공부는 그리 어렵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오히려 교수님께 장문의 편지 아닌 하소연을 적은 적도 있다. 공부는 밤새워서 했는데 막상 시험지를 받으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 캄캄하다는, 즉석 글을 적어 점수를 후하게 받아낸 적도 있으니, 모두 책을 가까이하고 산 덕을 본 셈이라고나 할까?
졸업 증서를 받아들고 찔끔 눈물을 흘렸다. 함께 공부한 사람들 모두 나와 비슷한 경우로 학교에 갈 기회를 놓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굳건하게 연대할 수 있었다. 서로에게 보내는 격려도 남달랐다. 학교를 졸업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일도 갖게 되었다. 공부한 대가를 충분히 누린다.
내년 3월이면, 나는 학생이다. 잘 할 수 있을까? 싶은 염려는 내려놓고 싶다. '지금까지 잘해 왔으니 앞으로도 잘할 수 있을 거야'라는 말을 자주 되뇔 것 같다. 스스로 거는 용기의 주문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항상 학생이라는 신분으로 살아온 것 같다. 아이들 학교 보내고, 책상 앞에, 도서관과 문화센터로, 무엇이든 배운다는 것을 앞세워 분주하게 보냈다.
문화센터 바닥을 기어 다니며 노는 딸을 지켜보며 금속공예를 배웠고, 직행버스 기사한테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스텐실로 제작한 커다란 액자를 버스에 실어 나르기도 했다. 센터 선생님은 스텐실 공방을 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동네 엄마들과 아이들을 끌고 전시회장과 공연장을 누비고 다녔다. 바빠서 한동안 뜸하면 먼저 묻는다.
"요즘 뭐 볼 것 없어?"
"나도 뭐 한 가지 배우고 싶은데 추천 좀 해줘."
배우는 일은 곧 내 삶을 지탱하는 버팀목이었다. 배우면서 만난 사람들은 더 끈끈한 무엇이 있었는데, 그것은 배우는 즐거움과 동시에 성취감이라는 감정을 공유한다는 공통점이다.
독서 모임을 하면서 얻은 즐거움과 성취감은 최고였다. 나는 그 모임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가야 할 방향이 어딘지를 최종적으로 파악한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대문호 '왕멍'의 <나는 학생이다> 책에는 '배움은 언제나 나를 고무시켰고, 힘을 주었으며, 존엄과 신념, 즐거움과 만족을 주었다. 내게 배움은 가장 명랑한 것이며, 가장 홀가분하고 상쾌한 것이다.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역경에 처했을 때, 배움은 내가 파도에 휩쓸리지 않도록 매달릴 수 있는 유일한 구명부표였다'고 말한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일은 약간의 설렘과 두려움이 함께 온다. 그런데 두려움보다 조금 앞서는 설렘이 언제나 이긴다. 배움이라는 설렘에 손을 내밀 때 내가 살아 있다는 확신이 든다.
'배우고 나니 부족한 것을 알게 되는 것'이라 하니, 나는 결국 나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항상 배움터를 전전긍긍 기웃거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배워서 남 주자'라는 말을 좋아한다. 이제는 내가 배운 그 무엇이라도 나 자신과 타인을 향해 손을 내미는 배움이기를 바란다.
3월이면 나는 학생이다. 학교 갈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