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는 1973년 소련 레닌그라드에서 유대인계 부친과 러시아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모이세이 (미하일) 시프만은 1937년생이었다. 부친의 아버지는 엔지니어로서 나치독일군이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 Saint Petersburg)를 포위하던 1942년 초반, 독일군에게 봉쇄당한 레닌그라드에서 굶주리며 아사했다. 그래서 그의 부친은 결국 홀어머니인 화학 엔지니어 슬하에서 성장했으며, 군 복무를 소련 미사일부대에서 1950년대 말까지 했다.
군 복무를 마친 그의 부친은 전기공학을 전공해 평생 발전소 변전기 설계를 해왔다. 하지만 지난 1991년 소련이 붕괴하자 그의 부친이 다녔던 설계연구소도 문을 닫았다. 부친은 결국 한동안 실업자로 살다가 결국 연금생활자가 되어서, 여생을 다소 불행하게 보내고 지난 2009년 죽음을 맞았다.
그의 모친 나데즈다 티호노바는 1939년생이었다. 모친의 아버지는 경제계획전문가이자 경제 관료였고 모친의 어머니는 의사였다. 모친은 미생물학 박사로 소련의 간호전문대학에서 미생물학을 가르쳤다. 소련이 붕괴하자 모친이 일하던 간호전문대 역시 부친의 직장처럼 문을 닫았고 그 후 모친은 연금으로 생활을 연명해야 했다.
천문학→고고학에 빠진 박노자
어린 시절 박노자는 천문학과 화학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10대에 접어들어 그의 관심은 지질학과 고고학으로 옮겨갔다. 그래서 중고등학교 시절 그는 소년공산당 문화센터 산하의 고고학 동아리에 열심히 참여했다(하지만 나중에 소련이 붕괴한 후 소련공산당 문화센터와 산하의 고고학 동아리 역시 문을 닫았다).
고등학교 1학년을 끝마치고 그는 고고학 동아리와 함께 소련 남부 시베리아에 있는 '미누신스크' 계곡에서의 스키타이(Scythian)계통의 고분군 발굴에 참여하기도 했다.(고고학에 대한 그의 이러한 경험은 나중에 그의 박사학위 논문자료 수집 시에 고분군 출토 유물들을 분석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고교 시절 그의 취미는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마야 도시국가의 사회, 경제, 정치형태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었다. 당시 그는 그 연구에 마르크스의 '아세아적 생산양식'론을 적용하고자 시도하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그는 중고시절에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책을 많이 읽었는데, 그때 마르크스와 엥겔스로부터 받은 강렬한 영향은 지금도 그의 머리와 가슴속에 강하게 남아 있다.
소련의 붕괴는 청년 박노자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개인적으로 부모의 직장이 하루아침에 공중분해 되고, 그 결과 전문직 맞벌이 부부였던 부모가 동시에 실업자로 전락한 것이었다. '자본주의의 돈맛'을 안 러시아 사회는 급격히 범죄화, 폭력화, 야만화 되어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정부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사회적 관심을 잃은 러시아의 기초과학, 기초인문사회과학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학술연구의 질 저하와 연구자 공동체의 위축과 붕괴 등은, 당시 대학생인 그에게 매우 충격적 경험이었다.
한편, 1989년 그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 동방 학부 조선사학과에 입학해 1994년 석사, 1996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원래 대학에서 공부하고 싶었던 분야는 티베트학과의 티베트불교였다. 하지만 1989년 티베트학과는 경쟁률이 높았다. 그래서 차선으로 조선사학과를 택했다. 당시 조선사학과 경쟁률은 5대 1로 티베트학과보다는 상대적으로 낮았다. 1989년 많은 소련 청년들이 '1년간 평양에서의 조선어 실습'이라는 조선사학과 입학 조건을 못 마땅히 여겨 조선사학과 지원에 머뭇거렸다. 평양 삶이 고립적이며 심심할 것 같아 꺼렸는데, 그는 오히려 평양에서의 삶이 궁금해 기꺼이 지원했다고 한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의 주안점은 5세기부터 562년 이전까지의 대가야(고령)와 아라가야(함안), 본가야(김해)의 외교수행능력, 전쟁 수행능력, 대민동원능력 등에 대한 '측정'의 시도였다. 주로 <일본서기>와 고대 씨족의 계보를 집성한 책(新撰姓氏), 그리고 고고학적 발굴의 성과에 힘을 입은 것이었다. 그는 6세기 중반의 가야 정치체들을 '준(準) 국가' 정도로 규정했다.
박사과정 중 한국인 만나 결혼, 귀화 신청
박노자가 박사과정 중에 있던 1995년 그의 인생에 일대 전환점이 일어났다. 그는 그때 한국 대학생들이 러시아로 유학 와서 다니고 있던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음악원 수업에 통역으로 '알바'를 하고 있었다. 실업자의 아들로 배고픈 시절인지라 그는 호구지책으로 별 '알바'를 다 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그는 자기가 통역을 돕던 한국의 바이올린 연주자 백명정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그해 결혼하여 나중에는 슬하에 1남 1녀를 두게 된다.
한국 여성과 결혼한 그는 결혼 4년 만인 지난 1999년 한국귀화 신청을 한다. 그는 당시 한국의 한 사립대학에서 비정규직 전임강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그 사립대학 내부관계의 구조 등 '자본과 노동' 사이의 비대칭적 관계에 강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제외하고는, 한국에서의 삶을 그는 아주 마음에 들어 했고 그래서 그냥 한국에서 계속 살고 싶어 했다. 한국 국내에서 정치나 사회평론 등을 하자면 그는 아무래도 '한국'이라는 공동체와 운명을 같이 하고 책임을 같이 지는 것이 적절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가 외국인으로서 한국 국내정치나 사회문제를 왈가왈부하면 '내정간섭'에 해당된다는 생각으로 결국 한국귀화 신청을 한 것이다.
그러던 중 지난 2000년 그는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교 동양학과에서 정규직 교수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지원해 수많은 경쟁을 뚫고 합격한다. 그래서 결국 그와 가족들은 노르웨이로 취업 이민을 가게 된다. 그리고 지난 20년간 그는 오슬로 대학교에서 한국, 일본, 중국의 정치, 사회, 역사, 사상, 종교 등에 관한 연구와 강의를 하게 된다.
그는 지난 20년간 노르웨이에 살면서 노동자의 천국을 몸으로 체험했다. 노르웨이에서 대부분 근로자는 1주에 37.7 시간을 근무한다. 그가 일하고 있는 오슬로 대학교 대부분의 직원들은 오후 3시면 상관 눈치를 전혀 보지 않고 정시에 '칼퇴근' 한다.
그에 따르면 노르웨이 근로자의 평균 소득세 세율은 30% 정도다. 하지만 그처럼 평균보다 연봉이 높은 경우에는 수입의 약 46%를 세금으로 낸다. 또 노르웨이 직장인의 대다수는 노조원들이고 노조의 역할은 아주 크다. 학교이사회를 비롯하여 대부분 기업이사회에서 노조 대표자들이 꼭 참석한다.
'노동자 천국' 노르웨이... "한국의 여러 문제, 비정규직만 없애도 해결될 것"
노르웨이 직장인 중 비정규직 비율은 25년 전에는 13%였는데 지금은 9%로 계속 하락세에 있다고 한다. 반면 대한민국 직장인 중 비정규직 비율은 약 33%다. 또한 대한민국 비정규직은 노조 가입이 어려울 뿐 아니라 국민연금 등 사회보험 가입률도 36% 정도에 불과하다. 임금도 정규직의 54% 정도에 불과하다.
반면 노르웨이는 비정규직이나 정규직이 아무 차별 없이 노조에 가입하고, 모든 사회보험을 적용받으며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에 따라 정규직과 똑같은 보수를 받는다. 그래서 그는 대한민국이 지금 당면한 인구감소나 세계 최소출산율 문제를,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바꾸면 쉽게 해결 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악질 착취기업을 상대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벌이는 투쟁에서 시민사회와 노동자들이 보여주는 단결력을 그는 한국사회의 가장 큰 장점으로 평가한다. 그는 부산의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을 대한민국 자랑이자 희망으로 여기고 그런 분들이 많아야 사회가 궁극적으로 좋아진다고 믿는다.
그는 다만 대한민국 전 사회에 걸친 극단의 군사화, 사회적 관계의 폭력화, 자본이 강요해온 '약육강식', '각자도생' 방식 같은 문제들을 극복하는 것을 한국 사회의 당면과제로 본다.
그는 체질적으로 각종 폭력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다. 그는 불교의 인과응보, 연기와 업설(業說) 논리야말로 폭력이 왜 중생에게 나쁜지를 너무나 잘 보여준다고 믿는다. 그는 또 불교가 중생이 서로 다 연관돼 있으며 타자의 불행 속에서 개인이 행복을 얻을 수 없다는 점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것도 대단히 마음이 든다고 한다.
그는 그런 자신이 불교 '신자'라기보다는 불교 철학에 많은 부분을 동의하는 편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불교의 '3천 배'나 '기와불사(기왓장을 사서 소원을 써 넣는 것)'는 백해무익이라고 생각하고, 한국불교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신행(信行: 법회 참석 등)'을 잘하지 않는다고 한다.
지금 한국 사회 일부에서 이명박-박근혜를 문재인 대통령이 사면해 주어야 한다는 목소리에 대해서 그는 단호히 반대한다.
박 교수는 "아무 죄도 없는 양심수 이석기 전 의원('내란선동' 등 혐의)도 사면하지 않은 채, 죄과가 무거운 소위 '적폐' 통치자들을 사면하자는 것은 언어도단"이라며 "이 사람들이 아직 본인들이 저지른 죄에 대해 일말의 반성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관련 기사:
[여론조사] 이명박·박근혜 사면, 반대 48.0% - 찬성 47.7%... "매우 반대" 35.6%).
사면론, 강력히 반대... 문재인 정부의 진보적 정책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박노자는 지금 문재인 정부의 사회정책이나 경제정책이 진보적 내용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나 최저임금인상, 건강보험 보장성 제고, 소득주도 성장 등의 집권 초기의 다소 진보적 정책들을, 문재인 정부가 이미 거의 다 포기하거나, 흐지부지해서 잘 완수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평가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사회나 경제 측면에서 문재인 정부에 별다른 '진보'를 이미 기대하기가 어려울 듯하다고 체념하고 있다.
반면 그는 검찰개혁과 같은 민주화 의제와 상식적인 대북정책, 강대국 사이의 균형 외교, 소수자 인권 보호 정도에서는 여전히 문재인 정부에 일말의 기대를 걸고 있다. 여전히 희망을 걸고 있다는 뜻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박노자 교수와의 페이스북 메신저 인터뷰를 통해 작성됐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