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가 기승을 부린다. 설상가상으로 코로나19도 활개를 치고 있다. 야외 정원으로 간다. 2020년 열린 제1회 전라남도 예쁜 정원 콘테스트에서 우수상을 받은 정원이다. 지역주민과 관광객이 함께 소통하고, 광주-목포간 도로변에 자리하고 있어서 외지인들도 쉽게 찾을 수 있다. 고택을 활용한 문화공간, 나주 39-17마중이다.
옛집이 지어진 때가 1939년, 방치된 이곳이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 2017년이었다. 일제강점기였던 39년의 정서와 문화를, 17년으로 대변되는 현대가 마중 가서 되살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옛집의 정취를 고스란히 살린 현대식 공간이다.
당시 전라도 유일 건축가에게 맡겨 지은 집
여기에 고택이 있다. 난파 정석진(1851∼1896)이 쓰던 정자를, 1915년 그의 아들 정우찬이 다시 지었다. 아버지를 기리는 제당이었다.
한옥의 구들장과 툇마루, 일본식 기와와 창문, 서양식 방갈로를 더한 건물도 있다. 당시 한옥과 양옥, 일본가옥의 건축양식을 버무려서 지은 집이다. 마당에 큰 금목서와 은목서가 있다고 '목서원'으로 이름 붙여져 있다. 1939년에 난파의 손자 정덕중이 홀로 계신 어머니를 위해 지었다고 한다.
당시 전라도에서 유일하게 건축가 자격증을 갖고 있던 박영만에게 맡겨 지었다. 보존 가치가 높은 건축물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한때는 재일동포 출신 재력가로 금하장학재단을 설립한 서상록 선생한테 팔려 금하장학회 건물로 쓰이기도 했다. 90년대 이후 방치됐다.
난파 정석진의 인생사도 굴곡이 크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농민군으로부터 나주읍성을 지켜낸 인물이다. 그 공로로 해남군수를 제수받았다. 이듬해엔 단발령에 반발해 을미의병을 일으켰다가 참수를 당했다. 관군으로 살았고, 마지막엔 의병으로 산 인물이다.
정석진이 쓰던 난파정은 옛 나주읍성의 서성문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있다. 동학농민군과 수성군이 치열하게 싸웠던 자리다. 이 난파정과 근대가옥 목서원 일원이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게스트하우스와 카페로 활용되면서 나주의 새로운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외세에 맞선 한말의병장 정석진의 기개와 정석진에 의해 막힌 동학농민군의 못다 이룬 꿈이 한 데 서려 있다.
39-17마중이 일반에 공개된 게 4년 전이다. 오랫동안 도시재생 분야에서 일한 전북 전주 출신의 남우진이 방치된 땅 1만3000㎡를 사들여 복합문화공간으로 단장했다. 새로 건물을 짓거나 시설을 하지는 않았다. 기존의 건물을 청소하고 손본 것이 전부다.
정원의 가운데에 고택과 근대가옥이 자리하고 있다. 마당을 차지한, 수령 80년 된 금목서와 은목서는 39-17마중을 대표하는 향이다. 향기가 만리까지 간다고 해서 '만리향'으로도 불리는 금목서는 샤넬 향수의 원료로 쓰인다. 은목서의 향도 그것에 버금간다. 한 번이라도 다녀간 사람은 목서의 향을 잊지 못해 다시 찾는다. 꽃이 없는 계절에도 목서 이야기를 하며 추억을 떠올린다.
주변의 경치를 그대로 들여와서 지은 것도 절묘하다. 집과 집 사이에 작은 의자와 원두막이 있다. 의자 바닥에는 고택에서 뜯어낸 기와가 깔려 있다. 정원도 넓다. 방문자들이 거리를 충분히 두고 쉴 수 있다. 코로나 시대에 맞는 언택트 정원이다.
자연 그대로의 경치를 담아낸 창문
39-17마중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건 주변 경치를 그대로 들여온 차경(借景)에 있다. 우리 선조들이 집을 지을 때 창문에서 고려한 것이 풍경을 담을 수 있는 액자 기능이다. 바깥의 경치를 빌려오기 위해서다. 39-17마중의 창문도 매한가지다. 나주향교를 창문에 전부 담았다.
80년 된 쌀창고를 보수한 목서원 카페 안팎에서 수백 년 된 향교와 흙담이 창문으로 들어온다. 사계절 언제라도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 카페 뒤쪽에는 또 200년 된 느티나무와 회화나무가 맺어진 연리지가 있다. 여기에는 향교 안을 조망할 수 있도록 나무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옆집 나주향교까지도 배경으로 활용한 39-17마중이다.
안팎으로 빛나는 정원이다. 그럼에도 따로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쌀창고를 고쳐 만든 카페에서 차 한 잔 주문하는 걸로 충분하다. 차 한 잔 들고 정원을 산책하면서 구경하면 더 좋다. 차를 시키지 않았다고 누가 뭐라 하지도 않는다.
39-17마중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나주향교도 멋스럽다. 앞쪽에 대성전을 중심으로 한 제사공간, 뒤쪽은 명륜당을 중심으로 공부를 가르치는 공간이다. 전묘후학(前廟後學)의 공간 배치를 하고 있다. 규모도 크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탄 한양의 성균관을 복원할 때 여기 대성전을 본떠서 다시 지었다고 전해진다. 전국 향교에 있는 대성전의 본보기다.
나주향교에 사마재(司馬齋)도 있다. 생원과 진사 시험에 합격한 유생들이 공부하던, 요즘말로 특별반의 공부방이다. 우등생을 위한 기숙교실이다. 1480년에는 나주향교에 다니던 학생 10명이 동시에 생원과 진사 과거에 급제하는 경사가 있었다. 당시 교수였던 박성건이 '금성별곡'을 지어 축하를 했다고 전해진다. '금성별곡'도 국문학사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향교에 있는 나무도 멋스럽다. 오랜 역사에 걸맞게 대성전 앞에 수령 500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심었다고 전해진다. 명륜당 앞에 수령 400년 된 비자나무도 있다. 나무 가운데에 기다랗게 구멍도 뚫려 있다. 그 사이로 내다보는 향교 건축물도 별나다.
나주는 옛 전라도의 중심이었다. 고려성종 때 설치한 나주목이 913년 동안 유지되면서 전라도의 행정과 경제·군사·문화의 중심이 나주였다. 당시 나주의 인구가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혔다고 전해진다. 흥선대원군이 '나주 가서 세금 자랑하지 말라'고 했을 정도로, 세금을 가장 많이 거둔 곳도 나주였다.
북한산과 한강을 배산임수 지형으로 삼은 한양에 빗대 '작은 한양'으로 불린 곳이 나주였다. 뒤로는 금성산, 앞으로는 영산강을 두고, 옛 나주읍성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지닌 작은 궁궐 금성관도 있어서다. 금성관은 지난해 국가문화재 보물로 지정됐다. 나주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인정받았다.
금성관을 중심으로 둘레 3679m의 나주읍성이 있었다. 면적이 30만 평으로 수원화성보다도 2배 넓었다. 금성관은 옛 나주목의 관아로 관찰사가 업무를 보고, 조정에서 내려온 사신들이 묵어가던 곳이다.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와 궐패를 모셔두고 궁궐을 향해 예를 올리는 망궐례도 여기서 행해졌다.
목사내아는 나주목사의 관저이자 살림집이었다. 지은 지 200여 년 돼 세월의 더께가 묻어난다. 일제강점기에 군수들의 관사로 쓰이면서 변형됐던 것을 복원했다. 내아 담장에 수령 500년이 넘은, 벼락 맞은 팽나무도 있다. 읍성의 4대문으로 동점문과 서성문·남고문·북망문도 복원돼 있다.
39-17마중에서 가까운 데에 나주성당도 있다. 기해박해와 병인박해 때 나주에서 순교한 천주교도를 기리는 순교자 기념성당이다. 순교자들이 겪은 사면초가의 상황을 표현한 빈 무덤 형태의 경당이 만들어져 있다. 청동으로 만든 순교자의 기도상도 있다. 까리다스 수녀회의 첫 본원인 한옥 건물과 한복을 입은 성모자상도 눈길을 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