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적은 중국의 전통적인 토비(土匪)에서 기원한다.
'악할 비(匪) 자'가 말해주듯이 농촌 출신자들의 도둑집단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보수파 유생들은 동학(東學)과 동학혁명을 동비(東匪)라 불렀다. 중국에서는 토비가 말을 타고 다니며 노략질을 한다고 하여 마적(馬賊)이라 했다.
'토비'란 한마디로 "약탈을 일삼는 농촌 출신자들의 무장집단"이라 정의할수 있을 것이다. 토비들이 집단화하는 일차적 요인은 법을 범한 자들이 안전한 곳을 찾아 한 곳으로 모여들게 되고, 같은 도망자들끼리라는 데서 응집력이 생기는 데 있다. 그들은 자연 실력있는 지도자를 구심점으로 의제가족적 공동체를 형성하고 외부로부터의 압력에 대처하여 결속을 강화하게 되었던 것이다. (주석 8)
만주에서 활동하는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천적이 일제의 군ㆍ경과 밀정이라면 두 번째는 마적이었다. 실제로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이 마적에게 피해를 당한 경우가 적지 않았고,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한 친일 마적은 일제 군ㆍ경과 다르지 않는 경계의 대상이었다.
독립운동가 이강훈(전 광복회장)이 1926년 여름 독립운동 단체 신민부의 사명을 띠고 백두산 산림지대에 둔전을 마련코자 머물다가 겪었던 비화이다.
습격을 당하고 생각해 보니, 도적을 방비한다는 보위단도 먼 거리에 있고, 또 현청(縣廳) 소재지도 거리가 멀어서 울창한 산림 중 고립무원한 것 등 모든 점을 숙고해 보아 놓여져 있는 조건이 이 지역은 둔전제 실시에 이상적인 지대가 못됨을 느끼고 당분간 그 계획을 보류하였던 것이다.
필자가 2년간 그곳 백두산 삼림 지대에서 도비가 온 것을 몇 번이고 만나 보았으나, 처음 습격해 왔을 때에 그 부락에서는 부유하다는 강씨 집에서 피해를 입은 외에는 별로 피해가 없었다.
이와 같은 만주에 있어서 특히 산악 삼림 지대에 재류(在留)한 우리들의 개인 생활이나 사회생활을 막론하고 마적 문제는 심각한 것인데, 이상에서 언급한 바 마적이란 존재는 일제 무리와 본질은 다르나, 망국민 우리들에게는 본토민들이 재산 보존상으로만 보는 면과는 달리 상당한 수의 마적은 일제 무리의 조종을 받는 독립투사 하수자로서 복잡한 의미를 갖는다. (주석 9)
최운산이 봉오동에 터를 닦으면서 가장 먼저 조직한 것이 마적으로부터 가족과 주민을 보호하기 위한 자위단이고, 이를 운영하고자 둔전제를 실시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자 함이었다. 이렇게 하여 독립운동단체 '도독부'가 조직되었다.
중국인들의 반일감정이 고조되고 제1차 세계대전이 장기화되면서 1915년부터 봉오동으로 들어오는 젊은이들이 점점 늘어났다. 독립군 지원자가 늘어나자 이들을 수용할 공간이 부족해졌다.
최운산은 봉오동 산중턱의 나무를 벌목하고 땅을 개간하여 대형 연병장을 건설했다. 산에서 베어낸 나무로 대형 막사 3동을 건축해 독립군들을 모두 수용했다. 독립군 본부인 저택을 중심에 두고 수천평 규모(종합운동장 3~4배 크기)의 두께 1m가 넘는 대규모 토성을 축조하고 그 토성의 네 귀퉁이에 포대를 쌓고 각각 대포를 배치했다.
'도독부'는 장작림부대에서 군사훈련을 맡았던 최운산 장군의 지도 아래 이미 실전 경험이 많았던 군인들이 조직되어 있었고, '지방국'을 조직해 지원병을 수월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군사 모집 체계를 갖추었다. 새로 들어오는 신병들은 '봉오동사관학교'에서 최운산 장군이 러시아에서 구입해온 신무기 사용법을 익히며 점점 정예 무장독립군으로 성장했다. 봉오동은 1915년 모든 독립군이 힘을 합쳐 대규모 무장독립군기지의 모습을 갖추었다. (최운산「연보」)
최운산이 서둘러 자위단을 조직하고, 이를 통해 봉오동사관학교를 설립한 것은 모두 무장독립전쟁에 대비한 준비였다.
주석
8> 필 빌링승저 지음, 이문창 역, 『중국의 토비문화』, 「역자의 말」, 일조각, 1996.
9> 이강훈, 『마적과 왜적』, 129쪽, 인물연구소, 1990,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